“당신, 대한민국 국민인가?” 모욕적 질문한 공무원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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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국가보훈처 청사
▲  세종시 국가보훈처 청사
ⓒ 국가보훈처

난생 처음 세종시 종합청사에 갔다. 2022년 4월, 봄빛 화사한 어느 날이었다. 유관순처럼 광주에서 3.1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김범수 선생이 왜 서훈을 받지 못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필자를 포함한 광주 지역 인사들은 김범수 선생을 포함한 광주학생독립운동 유공자들께 서훈을 하라고 요구해왔다.(관련기사 : 유관순과 만세 외친 광주 청년은 왜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나 https://omn.kr/22ji7)

국가보훈처 건물을 찾았다. 빌딩 안에 들어가 조금 기다리니 공훈발굴과의 모 공무원이 나왔다. 나는 물었다.

“광주 3.1운동을 이끌다 옥고를 치른 김범수 선생께 왜 서훈을 하지 않지요?”
“해방 후 행적에 이상(異常)이 있습니다.”
“행적 이상이라니 뭐가 이상하다는 겝니까?”
“남로당(남조선노동당, 해방 이후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 – 편집자 말)에 입당한 사실이 있습니다.”
“남로당 입당이 독립유공자 서훈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당신, 대한민국 국민 맞소?”
“네. 대한민국 국민인데요.”
“남로당 입당자에겐 훈포장을 줄 수 없다는 것도 모르는가요?”
“허허… 그렇다면 김범수 선생이 남로당에 입당한 사실이 없음을 입증하면 훈포장을 줄 거요?”
“네. 드리지요.”

예순네 해를 살면서 이렇게 모욕적인 말을 듣진 않았다. 나더러 대한민국 국민 맞느냐고 힐문하는 공무원은 마흔 살 전후로 보이는 젊은 공무원이었다. 불끈거리는 주먹을 참았다. 나는 지금 민원인이다. 공무원은 갑이고 나는 을이지 않은가?

박창규 자백의 모순

김범수 선생이 남로당 당원이었음을 제기하는 공무원의 근거는 신문 기사였다. 본디 신문 기사는 법적 증거력이 없는 문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은 1961년 2월 2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경전처럼 들이댔다.

<동아일보> 기사는 박창규씨의 검찰 기소장 발췌문을 소개하고 있었다. 본디 검찰의 기소장은 실체적 진실을 넘어 검찰의 주관적 욕망을 여과 없이 서술할 때가 많다.

박창규씨는 경주호를 타고 북으로 가려다가 실패했고, 경찰에 체포됐다. 검찰의 취조 과정에서 자신으로 하여금 남로당에 입당하도록 권유한 자가 김범수라고 자백하였다. 박창규씨는 왜 김범수 선생에게 누명을 씌웠을까? 추측건대 자신의 조직 상부선을 감추기 위해 타계한 유명 인사를 끌어들인 것이었으리라.

박창규씨는 “1950년 4월, 광주시에 소재한 남로당 시당 사무실에서 김범수를 만나 남로당에 입당했다”고 진술했다. 1950년 4월이면 남로당 전남 조직은 백운산에 웅거하고 있었고, 광주시에는 남로당 사무실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시당 사무실에서 김범수를 만나 남로당에 입당했다”는 박창규의 자백은 거짓이 된다.

1961년 2월 2일 자 <동아일보> 기사
▲  1961년 2월 2일 자 <동아일보> 기사
ⓒ 동아일보

나는 김범수(1899~1951) 선생이 남로당원이 아닐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의 심증은 세 가지였다. 첫째, 김범수 선생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분이다. 유관순 선생을 포함해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소박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김범수 선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분이 해방 후 뒤늦게 남로당에 뛰어들 가능성은 희박하다.

김범수 선생은 1899년생이다. 나이로 보나 투쟁경력으로 보나 남로당의 지도자 박헌영(1900년생)의 선배에 해당한다. 한국의 정치문화에서 후배가 운영하는 정당에 선배가 가입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 후배가 편하게 활동하도록 선배가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한국인의 정치문화다. 그래서 나는 김범수 선생이 남로당원이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심증이었다.

1945년 9월 창립된 조선공산당 전남지부의 창립 멤버들 중 박헌영 계열의 당 간부들이 있었다. 윤순달과 고항, 이남래와 조주순이 그들이다. 조주순은 김범수의 사위였다. 딸아이의 남편이 활동하는 정당에서 장인어른이 함께 활동한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선택이다. 이것이 김범수가 남로당원이 아닐 것이라는 나의 세 번째 심증이었다.

국가보훈처는 아직껏 김범수 선생이 남로당의 당원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단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신뢰할 수 없는 신문 쪼가리를 흔들며 독립유공자의 행적 이상을 외치는 것은 공무원의 직무유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또, 검찰 기소장을 가지고 김범수 선생이 남로당원이라고 우기면서 마땅히 드려야 할 훈포장을 거부한다면 이것은 공무원의 권력남용이 아닐까?

법원 “박창규 자백은 허위”… 이제 보훈처가 답할 차례

나는 김범수 선생의 행적을 파악하기 위해 대검찰청이 작성한 <좌익사건실록>을 뒤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국회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총 11권에 달하는 이 고문서를 뒤졌다. 좌익사건의 대부분이 1948년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삐라나 포스터를 붙이다가 검거된 남로당원들의 기록이었다. 검거된 남로당원들은 대부분 하급 당원들이었고, 연령은 대부분 30대 전후 청년이었다. 이제 지천명의 나이로 들어가는 김범수 선생이 남로당의 하급 당원으로서 삐라를 뿌리고 다녔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가 아닐까?

하지만 나는 실패했다. 김범수 선생이 남로당의 당원이 아님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 남로당은 당원 명부를 작성해 공개한 정당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렇다면 특정인이 남로당원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범수 선생이 남로당의 당원이 아님을 입증하겠다”며 호언한 나는 이제 궁지에 빠지게 됐다.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박창규의 진술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이었다. 박창규의 진술이 진실인가 거짓인가를 확인하려면 판결문을 봐야 한다. 대체적으로 판사들이 작성하는 판결문은 신뢰할 만하다.

나는 판사로 활동하고 있는 지인에게 박창규 사건의 판결문을 떼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먼저 사건 번호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었다. “사건 번호를 모르고 판결문을 찾기란 한강에서 바늘 찾기와 다름없다”라는 답변이었다. 이번에는 검사로 활동하고 있는 지인에게 부탁했다. 천행이었다. 검찰청은 판결문을 모두 정보화해 놓고 있었다.

어느 날, 나의 이메일에 박창규 사건의 판결문이 떴다. 판결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박창규의 검찰 진술은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기 때문에 사실 증거력이 없다” 이는 대법관 7인 전원 합의였다.

김범수 선생
▲  김범수 선생
ⓒ 오마이뉴스

박창규 사건이 터진 지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까지 국가보훈처는 박창규의 판결문조차도 확인해 보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국가보훈처는 김범수 선생의 행적 이상을 고집스럽게 주장해 왔다.

이번 삼일절에도 김범수 선생은 검찰이 가슴에 새겨넣은 남로당원이라는 주홍글씨 때문에 서훈을 받지 못했다.

나는 고발한다. 작금에 국가보훈처 공무원들이 벌이고 있는 행태는 명백한 권력남용이다. 공무원이라는 자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면 이를 고발할 의무가 국민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황광우(장재성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