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의 주인은 박헌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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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원경 스님을 만났다. 경기도 분당의 어느 음식점에서였다. 손호철 교수가 이 자리를 마련하였고, 나의 벗 장석 시인이 동석하였다. 스님은 팔순의 나이라기엔 너무 젊었고, 풍채가 훤칠하였다. 오랜 수도 생활 탓이었을까? 스님의 얼굴에선 깨끗한 기운, 청기가 넘쳐흘렀다.나는 스님의 성장 과정을 물었고, 스님은 역사의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해방이 되고 아버지 박헌영을 처음 만났다는 이야기, 장충동에서 김삼룡 아저씨와 살던 이야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손을 잡고 지리산의 이 골짝 저 골짝을 뛰어다녔던 이야기, 1958년 아버지가 북에서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방황의 길을 걸었다는 이야기….

“스님, 길상사의 주인이 박헌영 선생이라는데 맞는 이야기입니까?”
“네, 이정 선생의 재산이었습니다.”

(원경 스님은 아버지 박헌영을 이정 선생이라 호칭하였다. 이정은 박헌영의 호이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박헌영으로 통일한다.)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사찰 길상사(자료사진).
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김영한씨로부터 기부를 받은 요정 대원각을 개조한 절이다. 1995년 성북동의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기부한 김영한씨는 젊은 시절 백석 시인과 열애를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내 사랑 백석>이라는 수필집에서 김영한씨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가 바로 자신이라고 술회하였다.”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로 시작되는 이 시를 나도 암송하던 적이 있었다. 노동운동을 하다 보면 수배되고,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몸이 지친다. 진보정당 운동을 하다 보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선거에 대응하느라 가산이 거덜나고, 진보정당이 잘 될 희망은 보이지 않고, 불현듯 세상을 떠나고 싶어진다. 그때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시구는 삶에 지친 우리를 위로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타샤가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나타났다.

“당신은 봉투 한 장을 떨어뜨리고 떠났다. 누런 미농지 봉투를 뜯어보니 당신이 친필로 쓰신 한 편의 시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가 들어 있었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당신의 그 깊고 진실한 사랑의 환상에 빠져버리곤 한다. 당신은 때로 ‘나타샤’가 없는 덩그런 부인방에서 혼자 쓸쓸히 소주를 마시곤 했다.”( <내 사랑 백석>)

‘나타샤’는 특정의 여인이 아닐 것이다.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탄생한 ‘시 속의 연인’이다. 하지만 백석과 김영한은 한 시절 사랑을 주고받은 연인의 관계로 알려졌다. 때문에 김영한의 회고를 사실무근의 이야기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상사에 대한 원경 스님의 증언은 이어졌다.

“등기를 떼어 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원각의 원주인은 조봉희였는데요, 조봉희는 박헌영의 누나였습니다. 박헌영의 어머니 이학규가 첫 남편 조 씨로부터 얻은 딸이 조봉희구요. 이학규가 박현주와 재혼을 하여 얻은 아이가 박헌영이었으니, 조봉희와 박헌영은 한 어머니에게서 출생한 형제 사이였지요. 대원각의 법적 소유자는 조봉희였지만, 실질적 소유자는 박헌영이었던 겁니다(일설에 의하면 박헌영이 누나 조봉희에게 맡긴 대원각은 당의 비자금을 관리하던 곳이라고 함).”

“조봉희와 김병순 사이에서 딸과 아들이 태어나요. 딸이 김소산이죠. 영화까지 만들어졌던 여간첩 김소산 말이에요.(1973년 윤정희·최무룡 주연 영화 〈기생 김소산〉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김소산은 박헌영의 조카였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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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사실인가? 지금 원경 스님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혹시 오랜 세월 자기 암시로 신념화한 환상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넋을 놓았다. 하지만 스님에게 차마 그 자리에서 근거를 제시해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조봉희는 딸 김소산에게 대원각의 경영권을 넘겨주었고, 김소산은 1949년경 김영한에게 대원각의 관리를 부탁했다. 전쟁이 끝나고 조봉희도 죽고, 김소산도 죽고, 1955년 대원각의 주인은 김영한으로 바뀌었다.

원경 스님의 회고가 사실인가, 상상인가? 요는 대원각의 등기를 떼어 보면 될 일이었다. 나는 손호철 교수께 대원각의 등기를 열람해 보자고 제안했다. 손호철 교수는 미리 준비를 해놓았다는 듯 한시도 지체 않고 바로 등기를 보내주었다.
대원각의 등기부 등본. 가운데 점선 부분에 조봉희, 오른쪽 아래에 김영한의 이름이 보인다.

▲  대원각의 등기부 등본. 가운데 점선 부분에 조봉희, 오른쪽 아래에 김영한의 이름이 보인다.

과연 대원각의 소유자는 조봉희였다. 박헌영의 누나 조봉희, 한자 ‘趙鳳嬉’가 새겨져 있지 않은가? 1997년 김영한씨는 우여곡절 끝에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기부했다. 박헌영은 지하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안타까운 것은 박헌영의 월북이었다. 만일 미군정 당국이 조선공산당을 불법시하지 않고 정치 활동의 자유를 보장했다면 박헌영은 북으로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정의 조선공산당 불법화, 이어지는 박헌영 체포령은 박헌영의 입장에서 볼 때 정치생명의 사형선고였다. 그것은 박헌영 한 개인의 비극의 서곡이었을 뿐 아니라, 민족사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안재성이 쓴  <박헌영 평전>에서 한 토막을 인용한다.

“말수도 적고 잘 웃지도 않았던 박헌영이었지만 한번은 일제 말기 도망 다닐 때 끓여 먹던 된장찌개 만드는 방법에 대해 실감나게 말해주었다. 일제시대, 비밀 모임을 갖고 난 다음 날이면 제일 먼저 일어나 된장찌개와 밥을 해놓고 후배들을 깨웠다고 한다. …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공포와 혐오는 지속적인 반공 교육의 효과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선량하고 온건한 고급 지식인이었다.”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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