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에 드리워진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
[서양은 위]와 [동양은 아래] 은유
나익주 (한겨레말글연구소)
‘팩트체크’는 한 종합편성방송의 유명한 뉴스 프로그램에서 앵커와 기자들이 사회적 관심을 끌고 있는 쟁점의 정확한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보도를 가리키는 꼭지의 명칭이다. 대개 ‘여기서 바로 팩트체크를 해보죠./해보겠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뉴스 꼭지의 인기 때문인지 이제는 공영방송의 뉴스 프로그램이나 일간신문의 뉴스 보도에서도 흔히 이 낱말을 내세운다.
- [팩트체크] 대통령 출퇴근 때, 체증 감추려 CCTV 통제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분간 서울 서초 자택에서 용산 대통령실로 출퇴근을 해야 하죠. 그래서 출퇴근 시간대 차가 좀 더 막힐 수 있단 얘기도 나왔는데, 또, 막히는 길을 가리려고 CCTV를 통제한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바로 팩트체크 해보죠. 이지은 기자, 정확히 어떤 주장인 거죠? (JTBC 2022.05.11.)
- [팩트체크K] 한국이 일본보다 먼저 소멸한다?: “출산율이 사망률을 웃돌게 하지 않으면 일본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그런 일은 우리 세상에 큰 손실이 될 것이다.”…… 이런 인식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실제로도 그럴지 따져봤습니다. (KBS 2022.05.12.)
- [팩트체크] 담배 끊으면 살찐다는데, 진짜?…팩트체크 해보니: 흡연자가 담배를 끊으면 몸무게가 늘어난다는 통설이 있다. 이 같은 가설이 사실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금연으로 인한 체중 증가와 이에 따른 건강상 이득 간 상관관계는 어떨까. 팩트체크를 해보니 의료계는 체중이 증가해도 금연할 때 얻는 건강상 이익이 훨씬 크다고 봤다. (문화일보 2022.5.11.)
여기서 나의 관심은 이러한 기사의 내용이 실제로 참인지 거짓인지를 다시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이 유명 앵커는 ‘사실 검증’ ‘사실 확인’ ‘진위 확인’ ‘사실 여부 확인’ 등의 우리말을 놓아두고 왜 굳이 ‘팩트 체크’를 사용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대체 가능한 한국어 표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뉴스 프로그램의 앵커나 기자가 사용하는 외래어는 ‘팩트 체크’만이 아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아도 ‘루저’ ‘런칭(론칭)’ ‘워딩’ ‘이니셔티브’ ‘에비던스’ 등 영어 음역 표현이 들어있는 뉴스 기사는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다.
- ‘식사정치’로 풀어보는 정치권: 이번 사태의 가장 큰 루저는 김○○ 대표다.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이 얘기에 동의하십니까? 제일 큰 루저가 김○○ 대표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연합뉴스 2015.7.1.)
- 이탈리아 네오 클래식 브랜드 ‘메트로시티’가 다양한 디자인과 컬러로 썸머룩의 포인트를 더할 타임피스 컬렉션을 론칭했다. 5가지 컬렉션으로 구성된 총 38가지의 특별한 디자인으로 라인업된 타임피스 컬렉션은…… (서울경제 2022.5.13.)
- 이때 인터뷰를 참관하던 한 관계자는 “안병영 부총리가 교원평가라는 워딩을 하셨기 때문에 교장도 포함되지 않겠느냐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마이뉴스 2004.2.06.)
- 윤석열 정부, 110개 국정과제 발표…키워드 ‘민간 이니셔티브’: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3일 윤석열 정부가 국정운영의 근간으로 삼을 국정 비전과 국정과제를 발표했다. (연합뉴스 2022.5.3.)
- 정부의 연간 세수입 전망을 과도하게 올리기에는 이르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기재부 관계자는 “세입경정을 하려면 (세수가 늘어날 것이라는) 확실한 에비던스(증거)가 필요하다”며 “최소한 3월 세수입 추계치는 보고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아시아경제2022.04.21.)
왜 ‘패자(敗者)’보다 ‘루저’를 선호할까?
다른 나라의 언어로부터 유입되는 모든 낱말을 그 의미를 전달하는 한국어 낱말로 바꾸어야 하고 그러한 낱말이 없는 경우에는 그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낱말을 새로 주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언어 국수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어에 이미 존재하는 낱말로도 그 의미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경우에는 굳이 이러한 외국어 음역 표현을 써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바로 위의 기사문에 들어있는 ‘팩트’와 ‘체크’ ‘루저’ ‘론칭(런칭)’ ‘이니셔티브’ ‘에비던스’가 그러한 음역에 해당한다. 이들은 각각 영어 낱말 fact와 check, loser, launching, initiative, evidence를 음역한 표현으로 ‘사실’과 ‘점검(확인)’ ‘패자’ ‘출시’ ‘주도’ ‘증거’로 대체해도 기사의 작성자가 의도하는 의미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
애초에 한국어에 없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나 대상을 지칭하는 전문적인 첨단 학문 분야의 외국어 용어를 소개하고자 할 때에는 외국어 음역 표현의 사용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팩트’ ‘루저’ ‘에비던스’ 등은 전문적이거나 특별한 사용역을 갖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굳이 이러한 음역 표현의 사용을 선호하는 것일까? 한 삽화가 떠오른다. 주변의 어떤 친구가 영어나 불어 표현이 들어 있는 문장을 섞어가며 대화를 이어가면 우리는 흔히 “너 문자 좀 쓴다.”라고 농담 반 부러움 반이 섞인 말을 했고 그 친구는 “그래, 내가 요즘 문자 좀 쓰지.”라며 너스레를 떨곤 했다.
이 짧은 삽화는 ‘배움과 지식의 많음’을 우러러보던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외국어 음역 표현의 빈번한 사용이 이러한 선망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물론 어떤 사물이나 사건, 현상을 설명하고자 할 때 자신의 유식함을 과시하기 위해 음역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자기도 모르게 거의 무의식적으로 사용할 것이다. 위의 기사에서 기자들이나 전문가들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팩트체크’ ‘루저’ ‘론칭’ ‘이니셔티브’ 등의 표현이 더 편리하거나 더 적절하다고 느껴서 사용했을 것이다. 이 인지적 무의식의 한가운데에 한 은유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이 은유가 바로 음역 표현의 빈번한 사용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
‘궁전예식장’은 가고 ‘웨딩팰리스’만 남아
이 은유가 무엇인지 논의하기 전에 우리의 언어 생활에 음역 표현들이 얼마나 넘쳐나는지 그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방송 뉴스나 신문 기사, 학자들의 논문에서만 음역 표현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언어 생활에서도 수없이 그러한 표현을 접하게 된다. 거리에는 외국어 음역 상호명이 넘쳐나고 초고층아파트 벽면에는 어느 나라 언어에서 나온지도 무슨 의미인지도 알 수 없는 음역 표현이 붙어 있다.
- 예식장 상호: 까사디루체 웨딩컨벤션, 아르델 웨딩컨벤션, 웨딩홀 라루체(아이리스홀), 노블레스 웨딩홀컨벤션, 라플레이스 웨딩하우스, 더바인웨딩홀, 드메르 웨딩홀, 더라움 웨딩센터, 의정부 웨딩팰리스
- 커피숍 상호: 앤제리너스, 투섬플레이스, 이디아커피, 비엔나커피하우스, 카페베네, 까사델라루체, 블루빈스커피
- 미용실 상호: 까사달헤어, 제이진헤어, 버터바버샵, 아이펠마르 뷰티헤어, 르마레 헤어살롱, 헤어살롱 토니앤가이
‘궁전예식장’이나 ‘행복예식장’ ‘명동예식장’ ‘서울예식장’ 간판 대신에 “결혼을 하는 장소”를 뜻하는 우리말 ‘예식장’은 ‘웨딩홀’이나 ‘웨딩하우스’ ‘웨딩컨벤션’ ‘웨딩센터’로 바뀌었고, 상호의 고유성을 알려주는 ‘궁전’이나 ‘행복’ ‘명동’ ‘서울’은 ‘까사디루체’ ‘아르델’ ‘라플레이스’ ‘드메르’ 등이 자리잡고 있다. ‘다방’이나 ‘찻집’이라는 명칭 대신에 ‘카페’ ‘커피숍’ ‘커피하우스’로 바뀌었고 ‘투썸플레이스’나 ‘까사델라루체’ ‘앤제리너스’ ‘할리스’와 같은 외국어 간판이 들어서 있다. 아예 한글로 상호를 적지 않고 로마자 표기로만 적어 놓거나 한글 표기는 아래 한쪽 끝에 조그맣게 표기해 놓은 간판들도 많이 있다. 이발소나 미용실도 ‘헤어(숍)’이나 ‘바버샵’, ‘헤어살롱’이란 간판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곳은 ‘미용실/이발소’보다 더 크고 화려하며 가격도 더 비싸다.
외국어 음역 표현의 사용은 아파트 명칭에서 훨씬 더 심하다. 우리 꽃이나 식물 이름을 딴 ‘개나리아파트’나 ‘무궁화아파트’, 지역 이름을 딴 ‘옥인아파트’나 ‘신수아파트’, 건설회사 이름을 딴 ‘현대아파트’나 ‘경남아파트’와 같은 이름은 지어진 지 아주 오래된 아파트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재건축으로 들어선 초고층 아파트에는 거의 다 외국어나 외래어로 지은 이름이 붙어 있다. 그 사이에서 어쩌다가 눈에 띄는 우리말 아파트 이름인 ‘풍경채’와 ‘어울림’이 어색할 지경이다. 특히 높이 200미터 이상의 초고층아파트는 우리말로 지은 이름이 하나도 없다.
- 아파트 이름: 타워팰리스, 트라팰리스, 갤러리아팰리스, 위브더제니스, 아이파크, 더샵 레이크파크, 더샵 센트럴스타, 더샵 퍼스트월드, 하이페리온 타워, 메타폴리스, 위브포세이돈, 리첸시아, 펜타포트, 트럼프월드, 리더스뷰, 더샵 센텀스타, 래미안 첼리투스, 엑소디움, 위브센티움, 베르디움, 아델리움, 메가트리움, 그라시움, 리츠빌카일룸, 피오레, 리젠시빌, 루센티아, 래미안 블레스티지, 트루엘, 힐스테이트, 아데나루체, 미켈란쉐르빌, 아이유쉘 메가시티, 와이시티
이밖에도 많은 기업 명칭과 제품 이름, 상표 이름(브랜드)은 물론 다양한 사건(예: 그루밍)과 현상(예: 님비)을 지칭할 때에도 흔히 외국어 음역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와 같은 공공기관에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언어인 공공언어에서는 음역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까? 아니다. 공적인 영역의 언어 사용도 별로 다르지 않다. ‘드라이브 스루 검사’, ‘팬데믹’, ‘코호트 격리’ 등 우리의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한 현상을 지칭하는 이름이나, 공공기관에서 발행하는 문서를 무작위로 몇 개만 읽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 ‘그린필드형 투자’, ‘밸류 체인’(외교부), 홈리스’(보건복지부), ‘2012년 탑라이스 생산 시범사업’(농림부), ‘그린스타트 운동 확산을 위한 그린 리더 참가신청서’(환경부), ‘Safe & Clean Hub’(검찰청), ‘Support-chain’(산업통상자원부), ‘Go! Region, Get Vision’(지역박람회 표어), ‘
- 에코델타시티, 에코스마트시티, 리버프런트, 굿모닝콜, 메디컬스트리트, 로컬푸드, 마이스산업, 드림스타트, 희망드림론, 그린시티 대전 프로젝트, 목척교 르네상스 프로젝트, 컬러풀 대구, 클린업 시스템, 서울에너지드림센터, 서울정책아카이브, 에코투어, 3아웃(out) 7업(up) 프로젝트, Bridge of BUSAN 통합 브랜드 네이밍, K-move 센터, Work Together 센터, 아웃리치(Out reach), R&E 페스티벌
- 데이케어센터, 마더세이프전문상담센터, 맘프러너 창업스쿨, 시프트, 플로팅아일랜드, 디자인월드플라자, 도시갤러리프로젝트
공공기관이 추진하는 사업이나 정책 과제를 지칭하는 위의 명칭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에서 발행하는 공식 문서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외국어 음역 표현이 들어있다. 심지어는 ‘중소벤처기업부’라는 정부 부처 이름에도 외국어 음역 표현이 들어있다. 이러한 명칭 중에서 우리는 별다른 인지적 노력 없이 해당 사업이나 정책 과제의 내용을 얼마나 짐작할 수 있을까? 또한 이러한 명칭만으로 해당 사업이나 정책 과제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국민들은 얼마나 될까? 공공기관의 사업이나 정책의 실행이 국민들의 세금에 근거한다고 할 때 직접 관련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음역 표현의 선호: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
흔히들 외국어 음역 표현의 만연이 우리들의 마음속 사대주의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사고 과정은 본질상 대부분 은유적이다.’라고 주장하는 개념적 은유 이론에 따라 해석한다면 ‘마음속 사대주의’는 당연히 은유적인 사고 과정의 일부일 것이다. 즉, 우리의 마음속에서 [상대국은 위]이고 [자국은 아래]이다. 이 사대주의 은유가 [국가는 사람] 은유와 다시 결합할 때, [자국은 은유적으로 나약한 사람]으로 개념화되고 [상대국은 강력한 사람]으로 개념화된다.
이 사대주의 은유는 사회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우리의 신체적 경험으로부터 발생한다. 몸싸움을 할 때 우리는 대체로 키와 몸집이 큰 사람이 힘이 세며 키와 몸집이 작은 사람을 위에서 내리누른다. 몸싸움을 하면서 위에 있을 때는 평안함을 느끼지만 아래에서 눌림을 당하면 고통스럽고 불편하다. 그리고 물리적 싸움에서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기분이 나쁘다. 국가들의 대결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전쟁 사극에서 흔히 보듯이 살아남은 병사들은 서 있고 죽거나 부상당한 병사들은 누워 있으며, 승전국 수장은 높은 단 위에 당당히 앉아서 호통을 치고 패전국 수장은 땅에 엎드려 단 위의 장수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한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침략을 하기보다는 침략을 받아왔고 최근에는 식민지로 전락해 지배를 받았으며, 사대주의를 생존을 위한 전략의 하나로 택하기도 했다. 이 사대주의 전략은 자국은 약한 존재로서 아래에 있으며 위에 있는 강한 상대국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 전제한다. 은유적으로 말하면, 자국은 늘 [아래]였고 상대국은 [위]였다. 그러면 자국의 언어인 한국어는 [아래]이고 상대국의 언어는 [위]이다. 식민지 이전까지는 중국어가 [위]였고, 식민지 시대에는 일본어가 [위]였다.
이제는 우리의 사고 속에서 서구의 언어―특히 영어―가 [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은유적 사고에서는 역사적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사대주의’의 영향보다 서구인들이 동양과 동양인들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구성해 우리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일련의 고정관념인 오리엔탈리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 틀에서 서양(인)을 대표하는 특성은 문명, 강함, 성숙, 합리성, 안정성, 화려함 등인 반면, 동양(인)을 대표하는 특성은 야만, 허약, 미성숙, 비합리성, 불안정성, 초라함 등이다. 어떤 문화에서나 이러한 특성은 흔히 물리적인 수직성 개념 [위-아래]의 관점에서 은유적으로 이해한다. 은유적으로 [강함은 위]이고 [약함은 아래]이며, [성숙은 위]이고 [미성숙은 아래]이며, [문명은 위]이고 [야만은 아래]이며, [합리성은 위]이고 [비합리성은 아래]이며, [화려함은 위]이고 [초라함은 아래]이다.
은유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은 위]와 [동양은 아래]로 약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서구어(영어)는 위]가 되고, [한국어는 아래]가 된다. 한국어 대화와 글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어(음역) 표현을 이 오리엔탈리즘 사고의 반영이라고 본다면 무리한 논리적인 비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