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젖은 두만강>의 ‘그리운 내 님’은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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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두만강>의 ‘그리운 내 님’은 누굴까?

[황광우의 역사산책 4]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 이야기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젊은 시절 신입생 환영회에서 빠지지 않고 불렀던 노래가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다. 노래는 메들리로 이어졌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흥남부두’를 거쳐 우리의 합창은 <소양강 처녀>로 이어져갔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몰랐다. 두만강 푸른 물에 떠나보낸 ‘내 님’이 박헌영이었음을… 설날이면 안방 무대에 초대되어 열창하는 국민 가수 김정구, 그의 형 김용환이 만든 노래가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단다. 1928년 8월 김용환은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두만강변에 와있었는데, 이때 박헌영의 탈출을 도와주고 그 감회를 노랫말로 만들어 동생 김정구더러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이다(박헌영의 아들 박병삼의 회고).

주세죽(왼쪽)과 박헌영.
▲  주세죽(왼쪽)과 박헌영.

2004년이었을 것이다. 평택 만기사의 주지 스님으로 계시는 원경 스님(속명 박병삼)을 나는 어렵게 만났다. 스님은 평생을 걸쳐 만든 <박헌영 전집>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총 9권으로 엮인 <박헌영 전집>에서 나는 박헌영의 육성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1922년부터 1927년까지 약 5년 동안, 중간에 1년 동안의 휴지기를 제외하고는 줄곧 조선의 감옥에서 영어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나는 1922년 초 평양 감옥에서 복역하다 1924년 말에 출옥했다. 1925년 11월 나는 21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의주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 죽음의 집에서 , <모쁘르의 길> 1929년 제17호

‘모쁘르’란 옥중에 있거나 망명 중인 혁명가들을 돕는 국제구호협회이다.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톡으로 간 박헌영은 모쁘르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건강을 회복해 나갈 수 있었다. 이후 박헌영은 모스크바의 레닌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고, 다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33년 일경에 체포, 구속되었다. 1939년에 옥문을 나섰으니 박헌영은 일제 치하에서 무려 10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지낸 것이다.

일제 치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형무소에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치면 6만 년이 넘는다고 한다. 한 사람이 평균 3년 형의 옥고를 치렀다면 2만 명이 넘는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었다는 얘기다. 김철수의 증언에 따르면 1930년대에 감옥에 들어온 독립운동가의 다수가 박헌영 그룹이었다고 한다.

나는 예심 기간 동안 고문을 당한 결과 심한 신경쇠약증세에 시달리게 되어 1927년 말 친척들의 손에 넘겨졌다. 건강이 다소 회복된 후 1928년 말 나는 아내와 함께 동지들의 도움으로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다시 모스크바로 들어왔다.

나는 잡지 『모쁘르의 길』 독자들을 위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젊고 건강했던 내가 정신분열의 상태까지 다다랐는가, 일제 경찰이 체포한 조선혁명가들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 두고자 한다. 일제 천황의 친위대들이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인지는 차마 믿기 어려울 것이다.

동지들의 도움으로 두만강을 건넜다고 하였으니, 박헌영의 탈출 과정에는 ‘모쁘르’와 같은 조직의 공조가 있었을 것이며, 김용환의 역할도 드러나지 않은 조직 활동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박헌영은 ‘죽음의 집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신경쇠약증세, 정신분열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술회하였다. 계속해서 ‘죽음의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들어 보자.

우리들 중 누군가가 체포되면 곧바로 경찰서의 비밀장소로 끌려간다. 일제 경찰은 냉수나 혹은 고춧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는다. 경찰들이 벌이는 축구공 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풀려난 박헌영을 보고 충격에 빠진 심훈은 이렇게 썼다.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올 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중략)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중략)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심훈, <박군의 얼굴>)

그러니까 1980년대 우리가 전두환 정권에게 당했던 고문은, 사실은 일경으로부터 물려받은 악습이었다. 1985년 그렇게 김근태가 남영동 치안본부 취조실에서 고문을 당했고, 1986년 춘천교도소에서 김병곤이 교도관들에게 그렇게 집단폭행을 당했으며, 1987년 박종철이 그렇게 물고문을 당하여 숨을 거두었다. 계속 박헌영의 육성을 듣자.

감방에는 맨바닥에 가마니만 깔려 있었다. 방안의 온도는 영하 5~6도였다. (중략) 감옥의 규율을 위반하는 사람은 독방에 집어넣었다. 손발을 묶고 매질을 했다. 이로 인해 박순병, 백광흠, 박길양과 권오상과 같은 용사들이 감옥에서 사망했다.

내가 두 번째 원경 스님을 만난 것은 2021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원경 스님의 외로운 노후를 보살펴 드려온 손호철 교수의 도움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날 밤늦도록 나는 책에서는 읽을 수 없었던 박헌영의 비화를 많이 들었다. 스님은 박헌영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호칭하였다. 원경 스님은 박헌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2015년 아버지의 일대기를 만화로 출간하였고, 나에게도 <만화 박헌영>한 질을 선물로 주었다.

12월 초 우리는 평택의 만기사에서 밤을 새워 원경 스님의 이야기를 듣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세 번째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스님이 먼저 니르바나(열반, 涅槃)의 그곳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오는 11월 26일은 원경 스님의 기일이다. 일제 치하에서 민족의 해방과 정의를 위해 싸운 박헌영 선생, 목탁을 두드리며 아버지가 고통이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시라 기원하는 것이 운명이었던 원경 스님, 두 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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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광우는 베스트셀러 <철학콘서트>의 저자이다. 1980년대에는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와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을 집필하여 민주화운동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교 시절 첫 옥고를 치른 이래 20대에는 학생운동에, 30대에는 노동운동에, 40대에는 진보정당운동에 땀을 흘렸다. 지금은 인문연구원 동고송과 장재성기념사업회를 이끌면서 역사정신과 인문정신을 탐색하고 있다.

작가 황광우
▲  작가 황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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