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오문현 선생 탐방기
우리는 만났다. 운암동 예술회관 앞에서 만나 해남을 향했다. 고용호, 나병남, 황광우는 이 시대를 뜻깊게 살아가는 벗들이다. 기꺼이 운전대를 잡아준 이는 고용호였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 광우랑 담소를 나누었고, 용호는 병남이와 수다를 떨었다. 용호와 병남이는 고교 동창생이자 대촌 마을 출신이어서 주고받아야 할 옛이야기가 많아 보였다.
2022년 10월 29일 9시 40분 출발한 우리의 차는 상쾌한 가을 하늘을 뚫고, 붉은 단풍잎을 지나 해남하고도 북평면에 당도하였다. 시계는 얼추 12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독립운동가 오문현 선생의 생가를 탐방한다. 오문현 선생은 1932년 조직된 전남운동협의회의 주역이시다. 완도의 황동윤 선생, 이기홍 선생 그리고 해남의 김홍배 선생, 강진의 윤가현 선생과 함께 1930년대 이곳 남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분이다.
내가 확보한 정보에 의하면 오문현 선생의 생가 마을이 북평면 도산리였는데, 우리는 도산리를 찾을 수 없었다. 네비 양도 도산리를 모르겠다고 하니, 이를 어쩐담? 해남에 사는 후배 박병률에게 우리의 사정을 호소하였더니 이렇게 답하였다. “형, 오산리에 가면 오 씨들의 집성촌이 있어요. 거기에 가서 도산리를 물어보세요.” 도산리를 찾기 위해 오산리를 가려는 그때, 옆 좌석에 앉아 있는 황광우가 조용히 귓속말로 건넨다. “형, 좌일 장터에 가면 택시 기사들이 있을 터이니, 거기에서 도산리를 물어봅시다.” 좋은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기사 식당을 찾아가 물었다. “도산리는 모르겠구요, 항일 독립운동가의 마을 오산리가 있는데요, 여그서 1킬로 쭉 가서 우회전하세요.” 그 말을 들은 황광우는 도산리가 오산리인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우리는 기사식당에서 출출함을 달래기로 하였다. 시골의 기사식당인데 뷔페 식사였다. 귤도 먹고 진빵도 먹고 수정과도 마시고 괜찮은 요기를 하였다.
멀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지나 이내 오산리 경노당에 도착하였다. 가을 햇살이 눈부셨다. 집집마다 정원수가 그득하였고, 제주도에서나 봄직한 야자수도 눈에 띄었다. 역시 이곳은 남도에서도 남도였다. 마을 앞엔 두륜산의 투구봉이 보였고, 마을 뒤엔 완도의 숙승봉이 보였다. “저 섬이 고마도인디라우, 내 아부지가 태어난 섬이지라우. 혜당 스님은 고금도에서 태어났고, 황지우 시인은 인근 북일면에서 태어났지라우.” 평화로운 마을, 고즈녁한 마을 오산리에서 황광우는 집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용호 역사관장이 맨 먼저 탐험의 발길을 나섰다. 골몰길에서 엉그적엉그적 나오는 구순의 할머니께 고용호는 다가가 물었다. “할머니, 여그에 오문현 선생 생가가 있다고 듣고 왔는디, 어디다요?”, “나는 모르겄소. 쩌그가 우리집잉께 가서 내 바깥양반한테 물어 보쇼. 그 양반이 알랑가 모르겄소.” 알고 보니 할머니가 소개해 준 당신의 남편은 오문현 선생의 8촌 형제인 오사현 씨였다. 조금 있으면 세상을 그만둘 것 같은 노구를 힘겹게 이끌고 나온 오사현 씨는 우리에게 오문현의 생가를 안내하여 주었다. 그때 고용호는 생가의 주소를 사진에 담는 주도면밀함을 보여 주었다. 알고 보니 오사현 씨는 동복오씨 대종회 부회장을 지낸 분이었고, 오문현 선생의 서훈 작업을 주도한 분이었으며, 오씨 문중의 제각에 오문현 선생의 추모비 (오산리 937-21번지 소재)를 세운 분이었다. 그야말로 무망한 야산에서 금을 캔 기쁨이었다.
경노당에는 골목길에서 나오시던 할머니와 할머니의 남편 오사현 씨, 그리고 이름 모를 마을 아주머니가 자리를 함께 하였다. “오따, 오따 배가 고플 것인디…”, “아니라우, 저그서 점심을 먹고 오는 길이라우.” 남도 할머니의 정깊은 대화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오문현 선생을 뵌 적이 있습니까?” 불행하게도 1933년생 오사현 씨는 어려서 오문현 선생을 본 적은 없다고 하였다. 다만 오문현 선생의 장례를 목격한 기억이 있다고 하였다. 분명 들려줄 이야기가 많은 분이셨는데, 안타깝게도 노인의 기억력은 가물가물하셨다. “저 양반이 갈수록 물짜가 되요.” 할머니는 자신의 바깥양반에게 거침없이 말하였다.
나는 동복오씨 족보를 보여달라고 부탁하였다. 오사현 씨는 노구를 이끌고 직접 집에 가서 족보를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족보를 뒤적였다. 족보는 좀체 오문현 석 자를 보여 주지 않았다. 답답하였던가, 황광우가 안경을 벗고 족보 찾기에 동참하였다. 우리의 주인공은 족보의 말미에 있었다. 그 기쁨이란 헤어진 연인과 재회하는 것이었다.
자, 그러면 오문현 선생을 소개해 보자. “오문현 선생은 아버지 오재복과 어머니 이은아 슬하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933년 5월 전남운동협의회의 조직부를 맡아 활동하던 중 1934년1월 검거 되어 목포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의 옥살이를 하였다. 생가는 오산리 335번지이고,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현재 부인 김대례님과 함께 대전 국립현충원 지사묘역에 안장돼 있다. 1911년 7월 21일 생이고 1943년 10월 29일 폐결핵으로 별세하셨다.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이었을 것이다. 자녀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큰아들 오영돈은 1933년생인데 한양대 교수로 퇴임하였고, 현재에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 둘째 아들 오영교는 1941년생이고 서라벌예대를 나와 서울에 살고 있다. 딸은 의사와 결혼하여 광주에 살았으나 사망했다.”
오 씨 문중 제각에 들렀다. 역시 오문현 선생의 추모비가 떡하니 서 있었다. 고용호는 할머니께 저녁에 맛있는 거 사드시라고 금일봉을 드렸고, 나는 오사현 씨에게 저녁에 약주나 한 잔 하시라며 봉투를 드렸다. 작별 인사를 마치니 해는 오후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해남읍으로 가서 황승우 선생(혜당 스님)을 뵐 차례이다. 혜당 스님은 나의 고교 은사이시다. 출중한 실력으로 광주일고생들의 영어를 이끌었다. 내가 은사님을 처음 뵌 것이 1971년이었으니, 무심한 것이 세월인가, 51년이 어디로 흘러갔단 말이냐? 성불암은 해남읍의 구교리에서도 저쪽 산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걸어 나오는 황승우 선생은 젊은 영어 교사, 미모의 황승우가 아니었다. 혜당 스님의 얼굴에서 인생무상을 느끼며 나는 큰절을 올렸다. 스님은 굵은 눈물을 흘리셨다.
“선생님께서 3월 어느 날 수업 도중에 가까운 수창초등학교에서 ‘나리 나리 개나리’ 노래 소리가 들려오니 갑자기 강의를 멈추고 어머니 생각이 난다고 하셨습니다.”며 나의 추억을 말씀드렸다.
“그랬지야…”
혜당 스님은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감수성이 풍부한 것은 옛날과 다르지 않았다. 동생 황광우는 51년만에 이루어진 이 해후를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리고 있었다. 용호, 병남과 두런두런 어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장성 백양사 곳감을 선생님께 드렸다. 자그만 오두막에 앉아 다과를 들면서 주섬주섬 추억을 주웠다.
“선생님, 백학순 선배가 김대중 기념사업회에서 큰 자리를 맡았습니다.” 내가 이야기를 꺼냈다. 스님의 입가에서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반가운 소식이었나 보다.
“오, 그래…학순이는 내가 제일 이뻐하던 제자였지.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교환교수 자리를 만들어 나를 초대했어.” 그때 광우가 거들었다.
“학순이 형은 형님한테 공짜로 영어를 배웠어요. 허허…”
해남에서 광주로 돌아오는데 온 산야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멀리서 무등이 우뚝 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좋은 뜻을 품은 좋은 분들과 함께 여행을 하니, 이것이 삶의 지락(至樂)이 아니겠는가?
2022년 10월 31일
장재성기념사업회 조사위원장 박동기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