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으로 가는 머나먼 길 – 황광우

0
110

오방으로 가는 머나먼 길
황 광 우

“주여,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조금 후 로마 병정에게 체포될 자신의 미래 앞에서 예수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와 보니, 제자들은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지요. 그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주문합니다. “깨어 있으라!(Be awake!)”

최흥종 선생은 빛고을 사람들의 잠든 정신을 일깨우는 ‘깨어 있는 정신’이었습니다.

제가 ‘광주 정신’의 실체를 찾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흔히들 광주를 의향이니 예향이니 말합니다만, 저는 광주가 왜 예향이라고 떠드는지 실감할 수 없었고, 왜 광주를 의향이라고 규정하는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빛고을의 100년 역사가 저에겐 암흑이었습니다. 1919년 3월, 이곳 광주에서 누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지 몰랐고,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있기까지 이곳 광주의 독립운동을 누가 이끌었는지 도통 깜깜했습니다.

제가 처음 오방의 존함을 만나게 된 것은 소설가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에서였습니다.

한때 최망치라는 별명을 갖고 광주의 왈패였던 최흥종은 25세에 선교사 유진벨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해, 광주지역 최초의 목사가 되었으며, 3.1만세운동 때 연루되어 1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문순태의 술회는 오방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어지는 오방의 활동상은 저에게 오방의 진정성에 대한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는 상속받은 땅 1,000평에 나환자촌을 세웠으며 광주제중원에서 환자를 돌보기도 했다. 광주 YMCA 창설을 주도했으며 21년에 노동공제회 전남지회를 결성하여 지회장에 추대되었고 이듬해에는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견되었다가 1년 만에 돌아왔다. (『타오르는 강』 8권, 189쪽)

풍편에 최협 교수의 조부님이 오방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정녕 오방의 인격을 만나는 길은 멀었습니다. 신경호 선배가 아버님 신정식의 일대기를 책으로 묶어 낸 것이 2019년의 5월의 일이었죠. 소록도에서 젊음을 바친 신정식 선생의 배후에 최흥종 선생이 계셨음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1950년대 어느 날 벙거지 차림의 최흥종이 신정식을 찾아왔답니다. “신 의사, 나하고 문둥이 일하세.” 신정식 의사가 최흥종이라는 이 영성의 기인을 접한 때는 1954년이었다고 합니다. 신정식은 최흥종의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하죠. “대선각자의 분부를 어느 명이라고 언감생심 거절하겠는가?”라고 그는 회고하였습니다. 1950년대 이곳 광주에는 두 명의 의인이 있었고, 광주정신은 이렇게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신정식 의사는 한센환자가 오면 목욕비에다가 여관비, 밥값까지 대주었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 가라고 했답니다.

신정식은 자신의 방에 슈바이처와 최흥종의 사진을 걸었습니다. “어이, 광우, 나는 어려서 최흥종 선생 영정이 내 할아버지 영정인 줄 알고 자랐어. 에잇…” 신경호 선배의 우스개 이야기도 그즈음 들었습니다.

2019년 늦가을, 오방 최흥종 기념관이 건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양림동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두 번이나 발길을 돌렸습니다. 월요일 오전에 찾았던 겁니다.

삼고초려 끝에 기념관의 내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알수록 경이로움은 더해지나 봅니다. 왜 이 위대한 정신을 이제야 만나는가? 오방의 삶도 모르고 스스로 ‘광주의 아들’이라 자처한 저의 과거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한때 『도덕경』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소련공산당이 무너지고, 새로운 이념의 좌표를 찾는 도정에서 저는 노자의 무소유 정신에 홀딱 반해 버렸습니다. 기념관을 둘러보았더니 오방은 『도덕경』의 실천자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식자들은 오방(五放)의 뜻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 오방은 무소유 정신의 압축적 표현이었습니다. 가족의 안위도 버리고, 경제적 부도 버리고, 사회적 지위도 버렸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정치적 야심도 버리고 심지어는 종교적 아집마저 버린다는 오방의 선언은 소유의 껍데기에 안주하길 좋아하는 우리의 상식을 전복하는 무소유주의자의 혁명 선언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지식인들이나 종교적 지도자들은 행동보다 말하길 좋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지식인들을 싫어합니다. 언행일치의 덕목을 일관되게 실천한 분을 찾기란 참 어렵습니다. 오방 기념관에 들어섰더니 여기에 언행일치의 아름다운 인격이 마치 신상처럼 서 있지 않겠습니까? 오방은 언행일치를 넘어 신행일치를 추구했더라구요.

저는 <도덕경>의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좋아합니다. “세상에서 착한 것은 물이다.” 도덕경은 말합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도우면서 다투지 않는다. 사람들이 머물기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1930년대 식민지 치하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산 이는 누구였습니까? 거지요, 문둥병자였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계림동 경양방죽 인근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곳 움막에서 거처하던 거지들을 좀 압니다. 저도 그 거지들처럼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극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경양방죽의 거지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했던 오방의 삶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방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어진 이’이었습니다. 교회에 거지들을 초대하여 점심을 대접했던 이, 이 분이야말로 살아있는 ‘빛고을의 정신’이 아니었을까요?

역시 기념관에는 김구 선생이 휘갈긴 화광동진(和光同塵)이 걸려 있었습니다. “티끌 속에 묻혀 산다.”는 도덕경의 메시지를 몸으로 실천한 이, 그가 오방이었습니다. 리어카에 소소한 살림을 싣고 빛고을의 거리를 누비며 다녔다고 하지요?

“나에게 애지중지하는 보물 세 개가 있다. 하나는 자애요, 둘은 검소요, 셋은 감히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我有三寶, 持而保之,一曰,慈,二曰,儉,三曰,不敢爲天下先) 저는 도덕경의 이 구절을 무척 좋아합니다. 무등산 골짜기에서 움막을 짓고 여생을 마감한 오방이야말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한 생을 마감한, 도덕경이 가르치는 무소유 정신을 삶에 그대로 복사해버린 진정한 실천가였습니다.

저는 칼 마르크스를 좋아했습니다. 노동해방을 통해 인간해방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이가 칼 마르크스였습니다. 마르크스가 인간해방운동의 선구였다면, 오방도 인간해방운동의 선구였더군요.

마르크스가 노동운동을 통해 인간해방운동을 추동하였다면, 오방은 문둥이 일을 통해 인간해방운동을 실천하였습니다. 전국의 문둥이들을 결집하여 조선총독부를 향하여 진격한 그의 구라(救癩)투쟁은 정말이지 세계사에 기록해 두어야 하는, 조선의 사건이었습니다. 오방은 인간해방운동의 전위였습니다.

2000년 전, 로마 시대에 조국을 위해 바칠 것이 몸뚱아리밖에 없는 사람을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라고 불렀다지요.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된 힘으로 자본의 지배 체제를 전복하고, 인간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들려고 한 이가 칼 마르크스였습니다. 그런데 일제 치하에서는 조국에게 바칠 몸뚱아리도 없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몸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나병환자가 그들이었습니다. 문둥이는 굳이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트의 프롤레타리아트’였습니다.

구라투쟁은 마르크스주의자의 용어로 규정하면 나병환자의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한 경제투쟁이었습니다. 그런데 투쟁의 대상을 지주나 기업가로 설정하지 않고 조선총독부로 설정하였으니 이는 엄연한 정치투쟁이었습니다. 놀라운 전술이었고, 대담한 창의였습니다. 조선총독부 우가끼(宇垣) 총독을 만나 담판을 하였으니, 오방은 여운형의 기지를 넘어섰고, 이재유의 대담을 넘어선 위대한 독립투사였습니다.

1927년 최흥종 선생이 신간회 전남 대표를 맡고,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의 전남 대표를 맡았던 것은, 이념의 좌우를 떠나 남도의 모든 사람들이 오방의 인품을 흠모했다는 증좌일 것입니다.

저는 1969년, YWCA 1층 강당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저는 YWCA 주일학교에서 마태복음을 암송했습니다. 1974년, YMCA 2층 한켠에서 김용근 선생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선생의 무섭도록 진지한 ‘부활 신앙’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추억에 그냥 그렇게 서 있었던 YWCA가, 건물에 지나지 않았던 YMCA가 오방을 만나 그 속살을 저에게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Y의 정신이 오방의 정신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광주가 부활하였습니다.

형 황지우는 동부교회에서 백영흠을 만났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동부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냐고 물었더니, 1961년 열 살 때부터 다니기 시작했답니다. 그때 저희 집에 고모가 와 있었는데, 고모의 손을 잡고 동부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형 황지우는 고교 시절 내내 백영흠의 훈자(薰炙)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사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비틀어 보는 정신, 즉 비판 정신을 배웠다고 하더구요.

저는 1974년 봄, 백영흠을 만났습니다. 제가 백영흠을 뵈었던 1974년에는 동부교회가 없었습니다. 금남로 2가에 있던 구 동구청 건물 2층에서 고교생 10여 명이 매주 일요일 만나 백영흠으로부터 인문학 교양 강의를 들었습니다. 학교의 어느 선생으로부터도 듣지 못하는 철학의 속살을 들을 수 있었으니 우리의 정신은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광주의 목사들, 전부 도둑놈들이어요!!!” 밑도 끝도 없이 소리치는 백영흠의 질타를 그때 우리는 알 수 없었습니다. 독재정권과 타협하는 목회자들에 대한 질타인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음성이 오방의 절규였음을 알기까지 참으로 세월은 오랫동안 흘렀습니다.

1974년 겨울, 저희들은 상무대에 있던 백영흠의 자택에 찾아가 선생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선생은 간디의 『진실을 찾아서』를 강독하여 주었습니다. 저는 그때 백영흠 선생으로부터 간디정신을 배웠습니다. 알고 보니, 백영흠 선생이 우리에게 새겨준 것은 오방의 무소유 정신이었습니다.

저는 기독교가 광주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끼친 공헌을 인정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제외하고 광주 3.1운동을 이야기할 수 없지요.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을 이끈 도시가 광주였습니다만, 이 광주에서 기독교가 수행한 공로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김영철 평전』을 쓰면서, 최흥종-백영흠-조아라로 이어지는 정신의 흐름을 확인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김영철은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의 건설을 꿈꾸었더군요. 저는 최흥종으로부터 흘러온 빛고을의 기독교 정신을 기독교 휴머니즘으로 명명하여 보았습니다. 개인과 가족의 구복을 기원하는 한국 기독교의 대세로부터 독립적인 건강한 정신, 낮은 곳에서 신음하는 이웃들의 벗이 되고자 하는 정신을 기독교 휴머니즘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1980년 윤상원과 함께 도청의 최후를 지킨 김영철, 그는 이후 머리를 벽에 부딪쳐 자결 하려 했으나 죽지도 못하고 정신병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광주는 김영철을 오랫동안 잊어버렸습니다. 그 김영철의 일대기를 들여다보니 김영철은 어려서부터 공동체를 꿈꾼 낭만주의자였더군요. 알고 보니 김영철의 정신은 최흥종-조아라-서경자로 이어지는 기독교 휴머니즘의 한 흐름에 속해 있었습니다.

1966년은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최흥종 선생의 장례가 최초의 시민장으로 치러진 것을 어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때 제가 존경하며 따랐던 백영흠 목사님이 장례부위원장을 맡았더군요. 언론인 김일로 씨가 오방의 조사를 신문에 실었구요. 김일로 씨는 그해 12월에 타계합니다만, 그분이 남긴 여식을 저는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살았습니다.

지난 7월 소심당 19주기 추모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한신애 선생이 쓴 ‘기념강연’ 자료에 그리운 분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었습니다. 광주 YMCA 옥상에서 무등산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존경하는 백영흠 목사님과 조아라 장로님이 서 있었습니다. 거기에 오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저 무등산 깊은 곳에 오방이 숨어 있으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온몸으로 무소유 정신을 실천한 오방은 무덤 속에 묻혀 있던 빛고을의 역사를 저에게 부활시켜 주었습니다. 저는 주저하지 않고, 오방을 ‘빛고을의 큰 바위 얼굴’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8월 1일

황광우 씀

***황광우 작가는 현재 <(사) 인문연구원 동고송>에서 상임이사를 맡고 있고, <장재성기념사업회>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철학콘서트』를 위시한 다수의 인문학 교양도서가 있고, 『이름 없는 별들』을 위시한 광주 정신 연구서가 있다.

발 표 자 소 개

황 광 우

황광우는 1958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75년 고교시절 반독재 시위를 주도하다가 투옥되었다. 이후 검정고시를 거쳐 1977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에 입학했다. 1978년 <6개 대학 연합시위>를 주도하여 군사 재판정에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서울대 학생회 사회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계엄포고령으로 수배를 당했다.

1984 인천의 경동산업에서 노동을 하였다.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와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을 집필하였다. 1986년 인천 5.3 항쟁을 주도하여 수배가 되었고, 1987년 6월 26일 부평 역 앞에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을 창립하였다.

1992년 총선에서 민중당 후보로 광주 동구에서 출마했고, 이후 복학하여 뒤늦게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에는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역임했다. 2009년 전남대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광주의 뜻 있는 시민들과 함께 10여 년 동안 <고전공부모임>을 이끌어오던 중, 2019년 4월 사단법인 인문연구원 동고송을 창립하였다. 현재 동고송의 상임이사를 맡아, 광주정신과 인문정신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2022년 김용근 교육상을 수상하였다.

<저서>
『레즈』(2003)
『철학콘서트』(2006)
『젊음이여, 거기 오래 남아 있거라』(2007)
『소크라테스-사랑하라』(2013)
『철학의 신전』(2014)
『역사콘서트』(2015)
『촛불 철학』(2017)
『나는 왜 이제야 아는가』(2020)
『이름 없는 별들』(2021) 등

 

의견을 남겨 주세요.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