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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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인들은 서럽다. 어디 가나 찬밥이다. 돈 없고 냄새나고 구질구질하다고 핀잔이다. 누구 하나 노인을 따사롭게 보는 사람은 없다. 노인도 노인을 싫어하고 경원(敬遠)한다. 비단 여기서만 그런 게 아니다. 2007년에 제작된 코엔 형제의 문제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황혼에 접어든 보안관 벨은 말한다.

“개목걸이를 목에 두르고 알몸으로 거리에 뛰쳐나와야 겨우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끌 수 있어. 늙은이들한테는 누구 하나 관심이 없잖아.”  

21세기 유일 세계 제국 아메리카에서도 노인들은 소외당하고 방치되고 살해되고 있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하면서 남긴 치명상의 희생양은 노인들이었다. 만일 젊은이나 어린아이들의 희생이 그토록 우심(尤甚)했다면, 상황은 바뀌었을 터. 지구 전역 어디에도 노인은 나라도 공동체도 없다. 그들은 끝없이 내몰린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만의 해방구를 찾아 오늘도 부나방처럼 이리저리 배회(徘徊)한다.

오래된 공원과 낡아빠진 영화관, 대낮부터 술을 파는 싸구려 무도장(舞蹈場), 무임승차 가능한 지하철과 역사(驛舍), 드넓은 대학교정 같은 곳이 그들의 회합 장소다. 그런 공간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와 색깔과 한숨과 분노와 투정과 짜증을 서로에게 쏟아부으며 마지막 그날을 향해 느릿하게 질주한다. 그러다 거리에서 문득 아름다운 장면을 본다. 

아침 여덟 시 무렵 팔뚝에 완장 차고 마스크 쓰고 모자 깊게 눌러쓴 노인 두 사람이 초등학교 인근 건널목에서 교통안내를 자임(自任)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아이들이 형형색색 옷을 입고 건널목에 모여 있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노란 입들이 하나같이 뭔가를 종알대는 것이다. 그런 소음을 뒤로 하고 두 노인은 주어진 임무에 충실한 모습이다. 아, 저렇게 세상과 만나는 노인들도 있구나.

손수레에 파지(破紙)며 고철, 빈 병과 온갖 잡동사니를 싣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남녀 노인들의 행장(行狀)에 우울한 기억이 생생하다. 서리가 하얗게 내린 그들을 거리로 내모는 자식들과 이 나라 보건당국과 실무 행정가들의 냉담함과 무책임에 분노하지만, 실상 내게는 뾰족한 수가 없다. 그저 한숨이나 쉬고 허공에 주먹질해대는 것이 고작이다. 아무런 존재감도 없던 노인들이 대가(代價)도 없이 거리에서 생의 존재를 마음껏 과시하는 풍경은 적이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고유한 자리와 책무가 있다. 달리 말하면 나름의 소명이 있다. 그것을 찾아서 제 길을 가는 사람은 행복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쓸쓸하고 우울하다. 노경(老境)에 든 사람들의 빛나는 과거를 새삼 돌이키자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살면서 이룩한 지난날의 성과와 결과물을 성심껏 평가하고 존중하는 자세는 필요하지 않을까?!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과 관계와 시공간을 존중함은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자세이므로.  

더욱이 그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방도를 만드는 것이 이 나라 정부와 정책 입안자들의 기초적인 책무 아닐까? 누구나 늙고 죽는다는 진부하지만, 너무도 타당한 명제를 떠올리는 아침나절이다. 

<경북매일신문>, 2022년 3월 28일자 칼럼 ‘파안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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