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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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시인이자 극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1862-1949)가 쓴 <파랑새>가 떠오르는 시점이다. 1908년 출간된 <파랑새>를 러시아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모스크바 예술극장’ 무대에서 곧바로 상연한다. 외견상 <파랑새>는 어린이를 위한 작품 같지만, 그 내면에는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기나긴 여로가 자리한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가난한 남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선물을 받지 못해 의기소침해 있다. 그때 옆집 할머니가 들어와서 앓고 있는 딸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건네준 요술 모자를 쓰고 길을 떠난다. 아이들은 ‘추억의 나라’와 ‘밤의 궁전’을 지나 ‘행복의 궁전’과 ‘미래의 나라’를 떠돌다가 돌아온다. 

아이들이 돌아왔다기보다 엄마가 깨우는 소리에 꿈에서 깨어났다는 말이 더 맞겠다. 아이들이 돌아다닌 세계는 꿈의 환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옆집 할머니가 들어오자 아이들은 파랑새 대신 비둘기라도 가져가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집에서는 비둘기를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긴다. 아이들의 비둘기 날개가 파란색으로 변하여 그들이 찾아다녔던 파랑새가 집 안에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할머니는 파랑새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고, 딸은 기력을 회복한다. 아이들이 먹이를 주려고 새장 문을 열자 파랑새는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파랑새는 행복의 상징이다. 요즘 한국인들은 행복의 노예처럼 보인다. 누구나 삶의 가장 큰 원인을 행복에서 찾는다. 행복하지 않으면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행복 강박증에 중독된 사람들 같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는 행복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이 별로 없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행복의 조건을 숙고하지 않은 채 행복을 추구함은 허전하고 이상하다. 왜 부자가 되려는지, 왜 결혼하려는지, 왜 대학에 들어가려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들이 행복을 찾고, 부자가 되려 하고, 결혼과 진학은 누구나 하는 거니까 거기 맞춰 살아가려는 게다. 오랜 세월 독재자들의 병영국가, 군사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서 그런지 우리는 전체주의와 획일주의에 익숙하며 그것에 순치(馴致)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마주하고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온갖 것을 돌이켜보면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이토록 차고 넘치는 물질과 재화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때로 격절(隔絶)된 작은 섬들을 본다. 난바다에 둥둥 떠서 서로를 목청껏 부르지만, 누구도 그 목소리에 호응하지 않는 차갑고 비정한 세상. 

3월 9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선이 끝났다. 홀가분하다. 북새통처럼 시끌벅적하던 사위(四圍)가 고요해지니 이제야 사람 살아가는 세상처럼 보인다. 사람 하나 바뀐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전혀 없다. 그러니 다투고 시비하던 사람들이여,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가 차분하게 일상과 대면하시라. 당신이 기다리던 진정한 파랑새는 거기 있을지 모르니까. 

<경북매일신문>, 2022년 3월 14일자 칼럼 ‘파안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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