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의 알코올이 가져온 기적 (어나더 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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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빙허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1921)는 아내의 장탄식으로 끝난다. 소설에서 빙허는 동경 유학생 출신의 선진적인 의식을 가진 남편과 낙후한 전근대의 봉건적인 아내의 대립을 그린다. 명예와 권력, 옳고 그름을 다투는 식민지 조선의 남루한 지식인 사회 때문에 괴로운 남편은 술꾼으로 전락한다.

밤마다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오는 남편을 견디다 못한 아내가 불평을 토로하자 남편은 부조리한 사회가 통음(痛飮)의 근원이라 말한다. 하지만 ‘사회’라는 말을 알지 못하는 아내는 남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같은 하늘을 이고 한 지붕 아래 살아가는 부부의 거리가 너무 멀다. 여기서 술은 불가능한 소통을 해소하기는커녕 악화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술 권하는 사회>와 아주 딴판으로 술을 다룬 영화가 있다. 덴마크의 빈터베르크 감독이 연출한 <어나더 라운드>가 그것이다. 지금까지 12편의 영화를 연출했거나, 주연배우로 활약한 빈터베르크는 2013년 <더 헌트>에서 유치원생 여자아이의 새빨간 거짓말로 무참하게 무너지는 유치원 남자 교사와 가족 이야기를 서늘하게 연출한다.

영화 제목 <어나더 라운드>는 ‘한 순배(巡杯) 더’라는 뜻이다. 예전에 술꾼들이 주점에 둘러앉아 술잔을 채우고 주고받은 말이 ‘한 순배 더’다. 영화의 덴마크어 원제는 <드루크 (Druk)>로 그 의미는 만취나 폭음이라고 한다. 여하튼 이 영화는 북유럽에 있는 인구 580만의 작은 나라 덴마크의 음주 실태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알코올이 부족한 현대인?

코펜하겐의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 네 사람이 영화의 등장인물이다. 역사 교사 마르틴, 체육 교사 톰뮈, 음악 교사 페테르, 심리학 교사 니콜라이. 그들은 비슷한 또래이자 절친이다. 니콜라이의 마흔 번째 생일잔치에 그들은 레스토랑에 모인다. 그때 니콜라이가 노르웨이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스코르데루의 이론을 설명하면서 분위기를 주도한다.

“요즘 너희는 어때? 현대인에게는 알코올 농도 0.05%가 부족하대!”

그들 모두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학생들도 마지못해 수업에 응할 따름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즉시 0.05% 알코올 섭취 실험에 착수한다. 그들이 세운 규칙은 간명하다. 24시간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되, 밤 8시 이후에는 술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들은 술로 인한 일상의 변화를 모두 기록하고 함께 평가하기로 한다.

이쯤 되면 영화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감이 올 것이다. 일상생활에 미치는 음주 영향 보고서. 그렇다면 이 영화는 기록영화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덴마크가 자랑하는 국민배우 매즈 미켈슨이 역사 교사 마르틴 배역을 연기한다. “약간만 취하면 인생은 축제다”는 명제를 몸소 확인해 보려는 교사들의 좌충우돌 배꼽 잡는 이야기가 화면 가득하다.

0.05% 알코올의 영향

명확하지는 않으나 오래전부터 마르틴은 아내 아니카와 냉랭하게 지내며 가까스로 가정을 유지하고 있다. 학교에서 가장 지적이며 박사 후보자로 평가받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하기 이를 데 없다. 급기야 집중력도 떨어지고 일관된 내용도 없는 수업 때문에 그는 학부모들의 호출을 받아 자신을 변명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런데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면서부터 그의 삶은 180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낯빛과 걸음걸이, 목소리와 자세 하나까지 모든 것이 일변한다. 자신만만한 태도와 다양한 자료로 학생들을 압도하면서 수업을 진행한다. 생기 없고 느슨하며 맹한 표정으로 일관했던 학생들이 마르틴을 대하는 자세 또한 급변하게 됨은 당연한 결과다.

그것은 학교생활에 국한하지 않는다. 남편과 대면하기 싫어 장기간 야근을 고집한 아니카에게 마르틴은 아이들을 데리고 카누를 타러 가자고 제안한다. 정말 오랜만에 함께하는 가족 나들이가 가져온 환상적인 밤에 그들 부부는 하나가 된다. 이 모든 게 알코올 농도 0.05%가 불러일으킨 기적 같은 결과였다면 여러분은 믿을 수 있겠는가?

알코올의 가져온 선물이 마르틴 한 사람에게 국한되었다면 얘기는 다르다. 하지만 알코올은 체육 교사 톰뮈의 잠자던 영혼과 육신을 깨운다. 활기차게 아이들을 지도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톰뮈. 심드렁한 합창 연습 시간을 환상적인 감성과 환희의 순간으로 바꿔놓는 음악 교사 페테르. 졸고 있던 아이들의 내면세계를 일깨우는 니콜라이.

멈추지 않고 간다?

이쯤 하고 멈추면 얼마나 좋겠는가? 교사도 학생도 아내도 자식들도 말이다. 하지만 그들 4인방 교사는 실험을 계속하기로 한다. 알코올 농도를 0.1%로 올리고, 다시 0.2%까지 올리면서 그들은 자신들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지속한다. 그 결과 영화관에는 웃음과 박장대소가 터져 나온다. 그 가운데 아주 흥미로운 장면 하나를 소개한다.

니콜라이의 아내 아말리에는 세 아이의 엄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한다. 덴마크에는 아직도 아이를 셋이나 낳아 기르는 젊은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다. 남편이 집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한 가지 부탁만 남기고 자리를 뜬다. 시장에 가서 생대구를 사다 놓으라는 것이다. 그들은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가게로 간다.

진열대를 쓰러뜨리고 손님과 부딪치고, 점원과 말다툼을 벌이며 술꾼의 추태를 선보인다. 하지만 어디서도 생대구를 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그들은 북해의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항구에서 대구를 잡기로 한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술꾼에게 걸려들 멍청한 대구가 있을까? 누군가 바닷물에 풍덩 하고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술꾼들은 멈추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삶을 축제로 만들어주는 알코올의 효능은 실로 대단하지만, 적정 수준에서 술과 공존하기란 쉽지 않다. 아울러 21세기 현대인의 삶은 노동과 일상과 관계로 몹시 피로하고 퇴로가 막혀 있다는 사실도 영화는 말한다. 영화는 삶의 밑바닥에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린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몇 가지

요즘은 코로나19로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밤새 술을 먹는 한국인들이 부지기수였다. 술집과 편의점 어디서든 24시간 음주자를 보는 일이 여반장(如反掌)이었다. 그런데 <어나더 라운드>에서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알게 된다. 덴마크 남성들도 어마어마하게 술을 마신다는 재미난 사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음주문화가 그곳에도 있다.

한국의 교육부가 실행하려는 ‘고교 학점제’를 덴마크에서는 이미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새롭다. 페테르가 유급생 세바스티안에게 음주를 권하고, 즉석에서 그를 평가하는 장면은 신선했다. 교사와 학생이 하나 되어 긴장 이완을 위한 방도로 술을 권하고 마시는 장면은 <김영란법> 운운하는 우리 사회와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었다.

어디서나 여성이 음주문화에 손사래 치는 공통점도 눈에 띈다. 적정한 수준의 음주가 대화와 소통 활성화에 윤활유 구실을 한다고 나는 믿는다. 술 먹는 일을 무작정 타박하고 비난함은 음주문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 불신을 거둬내고 상호이해에 도달하려면 음주에 기꺼이 동참함이 어떤가?

조지훈 선생은 <주도유단(酒道有段)>이라는 글을 남겼다. 술을 아주 못 먹지는 않으나 아니 먹는 불주(不酒)에서 시작하여 술로 인해 다른 세상으로 떠난 열반주(涅槃酒)에 이르는 18단계가 그것이다. 세계 모든 나라와 유명인사들이 술과 관련하여 숱한 명언과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어나더 라운드>는 그것을 일깨우고 사유케 하는 유쾌한 영화다.

DR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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