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이어온 인연들: 『이름 없는 별들』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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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의 욕조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1987년 1월, 경찰은 수배자의 몫을 거칠게 조여 오고 있었다. 전두환이가 전국의 경찰서장들을 집합시켜 놓고 ‘수배자를 잡지 못하면 옷을 벗어라’고 협박하던 시절이었다.

동 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던가. 1987년 6월 29일 노태우가 항복 선언을 하자, 서울 시민들은 “오늘 같이 좋은 날”을 축하하였으나, 나와 같은 수배자에겐 그 1987년이 가장 견디기 힘든 숨 막힌 시절이었다. 형사들이 처의 오빠들에게 들러붙어 나를 잡아내라며 괴롭힌다는 소식이 귓전에 들려올 때마다 언제나 이 군사독재가 끝나려나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그때 내가 네 살짜리 아이와 함께 남몰래 몸을 숨긴 곳이 마포구 망원동의 지하방이었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그 방 말이다.

15년 후, 2002년 어느 날, 나는 그 때 아들과 놀던 망원동의 놀이터를 가 보았다. 밤늦도록 아들과 나는 축구공 놀이를 하였다. 부인은 저만치 팔짱을 끼고 아들과 남편이 노는 모습을 구경하였고. 그렇게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다.

망원동의 놀이터를 지나면 파출소가 나오고, 파출소를 경유하여 어느 3층 건물 입구에 서면 <실천문학사>라는 간판이 보인다. 가보면 마포에 출판사들이 많은 이유를 알 것이다. 가난하기 때문이다. 실천문학사를 책임지고 있는 이는 소설가 김영현 선배였다. 그날 나는 김영현 선배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김영현 사장을 만나러 왔다.

출판사 사장과 작가의 관계는 미묘하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이 글쟁이의 소임이라면 좋은 글을 만나는 것은 사장의 존재 이유다. 따라서 출판사 사장과 글쟁이는 한 밤 찢어가며 술을 묵는 동업 관계이다.

풀빛 출판사 나병식 사장은 이 동업 관계를 잘 요리하는 선수였다. 오늘은 원고료를 받는 날. 부푼 마음으로 출판사를 찾아가면, 나병식 사장은 먼저 삽결살에 소주 한 잔을 제의한다. 삽겹살 안주라고 하면 환장하던 시절 후배들의 마음을 병식 형은 꿰뚫고 있었다. 선배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척 하였다. 나는 이 비밀을 훨씬 뒤에 알았다. 1차가 끝나면 2차는 맥주집이다.

“아줌씨, 여기 맥주 한 박스!”

들어가자마자 한 박스의 맥주를 시원하게 부르는 나병식의 호기 앞에서 누군들 기가 죽지 않으랴. 선배는 이제 마시기 시작한다. ‘커, 조타.’ 선배는 몸만 거구일 뿐 아니라, 목소리도 거창하다. 장안의 온갖 정보를 수집하여 후배들 앞에서 늘어놓는다. “있잖아, 근데 말이야?” 약간의 서울 사투리를 써가면서 늘어놓는 이야기도 듣기에 싫지 않다. 선배는 약간의 사회과학적 지식을 인용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새벽 4시, 이제는 돌아서야 할 시점에 선배는 다시 3차를 제의한다. 청진동에 가면 좋은 해장국집이 있다는 거다. 이렇게 하여 그날도 원고료는 받지 못하고 우리는 술만 디지게 얻어 묵고 돌아오는 것이다.

동업 관계이지만, 자본가와 노동자가 균등하지 않듯, 작가는 약자이다. 처음부터 계약서를 쓰고 글을 쓰는 작가는 행복하다. 대다수의 필자들은 지가 먼저, 지 마음대로 글을 쓴 다음, 자신의 글을 사 줄 오너를 찾아다닌다. 인연이 있는 오너를 찾아나서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법칙이다. 원고뭉치를 안고 출판사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먼저 숨이 막힌다. 딱지를 맞으면 어떡하지?

통상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은 여리다. 그냥 술 한 잔 묵으러 왔다고 할까? 그리하여 작가와 사장의 만남은 술자리로 이어진다. 술자리에서 “어이, 요즘 뭐해? 지난 번 쓴 ‘들어라’처럼 대박 나는 글 없어?” 이렇게 먼저 저 쪽에서 글쓰기 제의가 오면, 그때 가서 “한 번 써 볼까요? 요즘 나는 ‘인연’이라는 걸 화두로 삼고 있거든요.” 정도로 빠다를 치고, 다시 저 쪽에서 “커, ‘인연’이라 대박감인데.” 요렇게 미끼를 물어주면 그때 가서 하는 수 없이 필을 잡아보는 것으로 내숭을 떤다.

이런 내숭도 서울에 사는 작가들이나 가능한 쇼다. 지방에 거주하는 필자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당신이 지방에서 올라와 굳이 이 출판사의 문턱을 넘었을 때는 명백한 사유가 있어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원고 뭉치를 풀어보여야 한다.

자신이 쓴 원고를 먼저 꺼내 보이는 것처럼 작가에게 부끄러운 일도 없다. 처녀가 자신의 맨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고 할까. 창피한 일이다. 누구로부터 나의 글을 평가받는다는 거,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다. 솔직히 말하자. 밤을 새워 쓴 글이었는데, 출판할 가치가 없다고 딱지를 맞는다는 건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것이다. 아니다. 나는 태어나길 인생을 잘 살 역량이 없는 놈이었다. 이것이 지방에 거처하는 글쟁이들의 마음이다. 아예 올라가지 않는다. 글을 다 써놓고도.

내가 실천문학사의 김영현 선배를 찾아갔던 날도 이런 번민이 교차하던 날이었다. “광우야, 어떻게 사니?” 영현 형은 한 때 다정하게 지낸 추억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드러운 인사를 건네줄 것을 나는 믿었다. 나는 형의 부인을 가슴에 품은 적이 있었다. 까놓고 말하여 나와 형수 사이에는 아무런 썸씽이 없었다. 다만,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품은 연모의 거시기가 있었던 거다. 대방동에서 함께 야학을 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교회가 그러하듯이, 야학도 젊은 것들이 연애하는 공간이었다. 이제는 형수가 된 여인의 순결한 마음을 나는 연모한 적이 있었다.

영현 형이 나를 박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또 다른 믿음이 있었다. 1986년이었던가? 인천 5.3 사태 이후 부인과 함께 도발이(범죄를 저질러놓고 뺑소니를 치는 일)를 치기 시작하였을 때, 형의 집엘 찾아갔었다. 수유리의 어느 민가였다. 형은 조건 없이 피난민을 수용하여 주었다.

때는 2월이었다. 수유리 4.19 묘역 근처에는 가로수들이 즐비하다. 가로수가 새싹을 피우던 순간, “광우야, 봐라, 저 싹을. 하, 눈물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히던 형의 순수를 나는 잊지 않는다.

실천문학사에 들어서면 사무실에서 온 종일 원고를 뒤적이는 노신사가 있다. 실천문학사의 주간을 보는 이 분의 함자는 黃자 光자 洙자이다. 무슨 인연인가? 황광수와 황광우는 닮아도 너무 닮지 않았는가? 고향이 어디인가 물었더니 전라남도 완도란다. 오매, 울 아부지 고향이다. 머시여? 실천문학사 주간 황광수 선생을 만나고 돌아온 날 나는 이 기이한 인연을 놓고 형께 물었다.

“형, 실천문학사 황광수 선배 알죠?”

“알지. 그 분 얼굴이 우리 작은 아버지 상호를 꼭 닮지 않았냐?”

실천출판사의 문턱을 두 번째 넘을 때엔 지난번과 같은 번민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형이 나의 글을 출판해주기로 약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날도 나는 황광수 선배께 인사를 드렸다. 선배는 맥주 한 잔 하자는 것이다. 동네를 빠져나와 어느 2층 맥주 집에 자리를 잡았다. 황선배는 기분 좋은 말로 나를 위로하여 주었다. “황광우 씨의 글엔 젊은 날의 열정이 진하게 배어 있어요.” 칭찬을 듣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나중에 『레즈Reds』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오겐 된 이 책 속에 나는 젊은 날의 노동 체험을 집어넣어 놓았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요즘 망실된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복구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박헌영, 이재유, 김삼룡, 이관술, 이주하….밤하늘의 별빛 보다 더 영롱한 선배들의 넋을 우리가 찾지 않으면 누가 하리오!

그때 황광수 선배의 눈빛이 빛났다. 선배의 아버지가 또 하나의 ‘이름없는 별’이었다. 가슴에 묻어온 회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하는데, 나는 그만 넋을 잃었다. 아버지 황동연과 그 동료들의 이야기를 나는 분명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는 모두 내 어머니의 구술이다. 어머니는 1919년 3월생이다. 전라남도 바닷가 해남 북평면에서 나셨다. 어머니에겐 마음씨 착한 오빠가 있었고, 외삼촌에겐 독립운동가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지주의 아들이었는데, 일본에 유학을 가서 사회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들은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동혁이처럼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다. 지주의 아들이 세운 야학에서 어머니는 국문을 깨우쳤다. 심청전, 춘향전, 홍길동전, 조웅전, 임경업전을 독파했다. 박정희의 반공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그 시절, 외삼촌은 나의 유일한 정신적 지지자였다.

“광우야, 내가 아는 사회주의자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시야.”

대흥사 일지암에서 고개를 건너 넘어오면 당도하는 곳이 해남의 외가집이었다. 인공 때 양민을 죽인 것은 경찰이었다. 한 색시가 좌일 장터에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 때는 겨울. 팬티만 입혀 놓은 채, 경찰은 색시를 심문했다.

“네 남편, 빨갱이지?”

“내 남편은 아무 죄가 없어라우.”

“땅,땅,땅.”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남편의 무죄를 옹호하다 한 색시는 이렇게 즉결 처분되었다. 이런 가슴 애리는 이야기들이 어머니의 기억 바로 밑층에 저장되어 있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외삼촌은 사회주의자들의 인격을 흠모하였다. 다만 사회주의자들의 불운을 탓하였다. 외삼촌의 친구들, 그 사회주의자들은 누구였을까? 나는 김주익으로 기억한다. 어머니가 자신의 야학 선생이라고 들려준 것이다.

“5월이 되면, 야학에서 무슨 잔치를 벌였시야. 노래도 부르고, 상도 주고.” (그날은 메이데이 기념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인터내셔널가를 불렀을 것이다.)

“엄니, 그때 불렀던 노래 생각나?” (어머니의 기억력은 놀라웠다.)

“응, 일어나라 무산자들아, 저 거머리 같은 지주들….이런 식이었제” (당시 무산자는 소작농들이었다.)

“엄니, 선생님들 어떻게 되었어?” (나는 바로 이분들이 독립투사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근디 순사들이 다 잡아가 불드라.”

1934년 일경은 완도와 해남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검거하였다. 이른바 적괴(赤魁) 사건, 요샛말로 붉은 악마 사건이다. 서울에서는 이재유의 동료들을 검거하고 있을 때, 이곳 남도에서는 황동연의 동료들을 일망타진한 사건이다. 검거자의 숫자가 무려 500여 명. 구속자의 수만도 50여명.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이 규모의 의미를 모른다. 1974년 박정희가 전국의 불순한 대학생들을 민청학련으로 검거했을 때, 검거자가 1000명에 달했고 구속자가 100여 명이었다. 1930년대의 인구수는 2000만 명. 그것도 전라남도의 남쪽 끝에서 500명의 운동자들을 검거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1930년대 중반 일제하 독립운동, 혹은 사회주의운동이 얼마나 강고하고 광범위했는지, 적괴사건은 증거하고 있다. 완도는 일제하 독립운동의 한 중심이었다. 어머니는 나이 16살의 꽃띠에 역사의 중심을 목격한 것이다. 야학은 무너졌다.

“우리 선생님들에 비하믄 김대중은 아무 것도 아니야. 선생님들은 덩치가 황소만하고 눈은 호랭이 눈깔이었어. 오죽 좋은 분들이었는디, 다 죽어 불드라.”

좌익머리 쓴 사람들 치고 말로가 좋은 사람 보지 못하였다며 어머니는 나의 길을 만류할 뿐, 분들의 인격을 태산처럼 신뢰하였다. 이렇게 기억하는 어머니의 주인공이 바로 황동연 씨와 그의 동료들이었다. 이 무슨 인연인가? 황광우와 황광수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냐, 어머니 선귀례와 아버지 황동연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냐?

선배는 말하였다.

 

“아버지는 사회주의자였어. 이기홍 선생, 김홍배 선생과 더불어 트로 이카를 조직했던 것 같아. 아버지의 트로이카 밑에 500명의 활동가 들이 독립운동, 농민운동, 교육운동을 하였지. 그러던 아버지를 구속 한 사건이 <전남운동협의회사건>이야. 3년간 구속되었어. 해방이 되던 날이야. 집 앞 마당에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김선태가 무릎을 꿇고 있었어. ‘동연이, 목숨 한 번 살려 주소.’”

 

그러니까 선배의 아버지는 완도군의 인민위원장이었다. 아버지는 일본에 유학 가서 사회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 함께 유학 간 친구 김선태는 고등고시를 합격하고 검사가 되어 돌아왔다. 김선태는 이후 부끄러운 길을 걸었다. 해방이 되자 김선태는 인민재판의 처결 대상이 된 것이다. 아버지는 친구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1947년 그해 9월 아버지는 쇠몽둥이를 얻어맞고 죽었다. 김선태 하수인들의 짓이었다. 어려서 어쩌다 방문한 완도의 친가에 가면 코딱지만한 방구석 벽지 벽지 마다 국회의원 김선태의 얼굴이 붙어 있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1960년대 완도와 해남을 대변한 국회의원 김선태의 이름 뒤에 이런 피비린내나는 동족상잔이 감추어져 있었음을 나는 지금, 황광수 선배로부터 듣고 있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엔 일본놈들한테 붙어 충견 노릇을 한 자가, 해방이 되자 친구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빌었다. 미군정의 비호 하에서 친구의 뒤통수를 쇠몽둥이로 때려죽인 것이다.

 

황동연 선생께서 국가보훈처로부터 국가유공자의 서훈을 받은 것은 2021년 3월이었다. 황광수 선배가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 20년이 넘도록 자료를 뒤지고 서류를 작성하여 국가보훈처에 제출하여 왔건만, 국가보훈처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 많은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아들마저 몸이 좋지 않아 드러눕게 된 올 해에서야 느닷없이 서훈을 받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기이한 ‘인연’이 작용한 탓이었다.

나는 작년 2020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한 분들이 70인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선 너무 가슴이 아팠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앞장을 선 죄로 퇴학을 당한 독립유공자를 합하면 300인이 넘는 분들이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게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한 많은 분들은 사회주의자였다. 그런 까닭에 지난 독재 시대 우리는 선배들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살았다. 지금 선배들의 족적은 역사의 바위틈에서 이끼처럼 퇴색되어 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선배들의 자취를 복원하는 것은 살아 있는 후배들이 져야할 당연한 소임이리라.

『이름 없는 별들-호남 독립운동가 열전』은 지난 20년 동안 내가 자임했던 역사의 미션이었다. 관련된 자료가 너무도 박약하여 뜻했던 만큼 글이 쓰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만 살아온 묵은 빚, 여기에서 털고 싶다.

 

2021년 9월 22일 추석 다음 날 빛고을에서

 

황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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