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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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알았지?”

 

2021년 12월 14일, 오늘은 서울 가는 날. 박동기 선배는 어제 헤어지면서 한 번 더 다짐을 하였다. 그 다짐 덕택에 나는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요즘 아침엔 택시 잡기가 영 힘들기 때문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역사관에 가면 나의 벗 고용호 관장이 있다. 고 관장은 뜻하지 않은 출현이지만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조금 있으니 약속했던 분들이 들어왔다. 이기홍 선생의 따님이신 이경순 교수, 김범수 선생의 손녀이신 김행자 관장.

우리는 오늘 서울 나들이를 간다. 박동기 선배가 운전대를 잡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광주에서 서울까지 가는 길은 만만치 않은 길인데, 박동기 선배는 운전을 자임하였다.

오늘,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의 정근식 위원장을 면담하기 위해 가는 이 길은 어찌 보면 촌놈들의 한양 구경 나들이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한 맺힌 원정 투쟁의 길이다. 하지만 너무 진지하면 공기가 무거워진다. 오늘 우리는 소설 쓰는 마음으로 쾌활한 원족을 하기로 했다.

 

“차안에서 소설을 쓰게요.”

 

역시 영문학자다운 이경순 교수의 제언이었다. 임철우가 동행했다면 바로 단편 소설 한 편이 나왔을 터인데, 임철우는 완도의 비극을 기록한 탁월한 소설가인데, 임철우는 지금 제주에서 유배하고 있는데, 말끝마다 임철우 타령이었다. 임철우를 향한 이 교수의 사랑이 진하게 배어나왔다.

 

“황 작가, 요즘 쓰는 글이 뭐요?”

 

툭 던지는 교수의 물음은 그냥 던진 물음이 아니다.

 

“저는 요…”

 

더듬거렸다. 더듬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질문은 작가의 모든 것을 뽑아내려는 고단수의 심문임을 직감했다. 독립투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뽑아내는 고등계형사의 취조와 맞먹는 질문이었다.

 

“그냥 놀고 있습니다.”

 

라고 하려다, 내숭으로 넘어가자니 교수의 진정성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여

 

“<윤상원평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나는 미적거렸다.

 

“지난 6일 원경 스님이 입적하셨어요.”

 

나는 얼른 화제를 바꾸어 버렸다.

 

“평택 만기사 주지 스님, 박헌영 선생의 둘째 부인 정순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원경스님의 족보를 보고하는 이는 역시 암기의 천재, 박동기 선배였다. 평생 동안 독립투사의 뿌리를 탐구해 온 분, 모든 독립투사의 족보를 빠짐없이 암기하는 이 시대의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아니던가?

 

“지난 11월 코로나가 풀리면서 원경 스님이 저를 보재요. 내 년 꽃피는 봄날, 광주에 오시어 시민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자리를 갖기로 했는디…그만“

 

나는 느닷없는 스님의 입적을 한탄하였다.

 

“나이 열 살 때, 리현상 선생의 손을 잡고 지리산을 뛰어다녔대요. 그렁께 최연소 빨치산이었던 거죠. 나이 팔십에도 식탐이 있는 까닭은, 그때 산에서 너무 굶었던 거라네요. 밤이 되면 혼자 남아 짐승 울음소리에 벌벌 떨고 지낸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대요. 제가 원경 스님 일대기를 써 드리기로 했어요. 12월이 되면 인터뷰에 들어가려고 맘 묵고 있었는디……”

 

차는 달리고 달려 천안 근처까지 왔다.

 

“밥 묵고 갑시다.”

 

“황 선생이 아침을 안 묵었구만…”

 

역시 상황 파악이 빠른 교수님이었다. 나는 왕갈비탕을 주문했고, 세 분은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교수님은 김치찌개를 먹어 보라며 나에게 한 사라 담아주었다. 나는 박동기 선배께 갈비 한 대를 드렸다. 우리들의 화기애애한 나들이는 커피 타임으로까지 이어졌다.

차가 서울 교외에 가까이 다가오면서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끝없이 늘어선 차들이 전진할 줄 몰랐다. 1차 선 버스 전용 노선에선 버스들이 씽씽 달리고 있건만 우리 차는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다. 나는 4인이 타고 있으므로 버스전용노선으로 타고 가자고 하였으나, 박동기 선배는 한사코 반대하였다.

 

“그라믄 딱지가 왕창 날라와부러…”

 

그러니까 애시당초 KTX에 몸을 실어야 했다.

 

“오매, 3시 30분에 임경석 교수를 만나기로 했는디…..”

 

시계는 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거북이걸음이 다시 속보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은 양재동에서부터였다.

 

“휴, 살았다….”

 

강남터미널을 지나 반포대교를 지나 남산터널을 지나면 퇴계로가 나온다.

 

“지가, 요, 서울 거리를 잘 알아요. 서울 전역에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거든요.”

 

하지 않아도 될 무용담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도 차는 남산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통과의례로 동전을 던지려고 500원 짜리를 쥐고 있었는데 4인 합승 승용차는 그냥 통과하란다.

 

“아가씨, 잘 살아, 잉”

 

박동기 선배의 유쾌한 인사였다. 예전엔 퇴계로에서 진화위 사무실을 찾느라 고생을 하였으나 오늘은 쉽게 찾았다.

 

“형, 저기서 유턴하면 돼.”

 

경험자의 안내대로 차는 마침내 진화위 주차장에 멈추었다. 1층 로비에서 약속대로 임경석 교수를 만났다. 임경석 교수는 성균관대 역사학과 교수인데, 일제하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에서 단연 국내 1인자이다. 바쁠 터인데 이렇게 합석하여 주어 그 뜻이 정말 고마웠다. 이리하여 5인의 원정대는 보무도 당당하게 진화위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탔다.

 

“위원장님, 그간 진화위 끌고 나가느라 고생이 많으시죠?”

 

그냥 던진 인사말이었는데, 우리는 이후 한 시간 동안 원장의 긴 푸념을 들어야 했다.

 

“아이고, 이상한 놈이 들어와 건건이 훼방을 놓는디 미치겠어어어.”

 

고향이 전주인 친구들로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끝이 약간 가라앉는 전주 말투 그대로였다.

 

“이게 말이여. 좌익 인사들만 많이 죽은 게 아녀어. 전라도에선 우익 인사들도 많이 죽었시유. 이거 우떡 해?“

 

그러고 보니 정근식 원장의 머리가 1년 사이에 많이 샜다. 나는 더는 강의를 들을 수 없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긍께요. 지난 9월 진화위의 조사결정통보를 받았는디요, 친일혐의, 이것은 사실 확인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감옥에 갔다 온 기록은 다 있는 거구요, 중요한 것은 친일혐의에 대한 해석의 문제 아닙니까?“

 

오늘 원정투쟁의 본론에 들어가려고 할 찰라, 그때, 정 원장은 일어섰다. 조금 있으니 독립운동 담당 1과장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김범수 선생의 경우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실습한 것을 놓고 친일이라는디요….”

 

라고 꺼내자마자, 성미 급한 정근식 원장이 거들었다.

 

“그라제. 그라믄 일제강점기 의사들 전원이 친일이라는 거 아녀어?”

 

정 원장 특유의 냉소적 어투가 오늘은 무척 친근하게 들렸다.

 

“이기홍 선생의 경우 대화숙 강제 가입을 놓고 친일이라는디요….”

 

이때 이경순 교수가 한마디 거들었다.

 

“대화숙에 가입한 7천명의 독립투사들 중 전향을 거부한 5천명의 독립투사들이 거주제한을 당했어요. 어버지는 유동에서 거주제한을 당했구요.“

 

“정해두 선생의 경우 면서기를 한 적이 없는데 면서기를 했다고 해요. 면서기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을 면서기를 했다고 서훈을 거부한다면 국가보훈처 측에서 면서기를 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하지 않는가요?“

 

그때 임경석 교수가 끼어들었다.

 

“면서기를 했건 하지 않았건, 그것은 상관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정부의 지침을 따르면 되는 거요. 정부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1000여 명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것이 불만이라면 민간인이 작성한 <친일인명사전>에 준하면 되는 거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 인사가 4389명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정부 법률이 정하는 기준 밖에 있는 분들, <친일인명사전>에도 오르지 않는 분들에게까지 국가보훈처가 친일혐의를 둔다는 것은 공적 기준을 무시하고 개인의 사견을 앞세운 심사위원의 월권행위이지요. 친일혐의에 관한 해석은 공적 기준을 따르면 된다고 봐요.“

 

이때 정 원장이 마무리를 하였다.

 

“명확하네. 이거면 끝났네.”

 

그때 조사1과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국가보훈처 분들을 만나 보니 이런 거예요. 문재인 정부 들어와 과거 사회주의 경력에 대해선 많이 관대해졌어요. 하지만 총독부의 녹을 먹은 친일 행위에 대해선 여전히 꺼리는 거요. 어떻게 총독부의 녹을 먹은 자들에게 서훈을 줄 수 있느냐는 거죠.“

 

다시 한 번 임경석 교수가 말을 이었다.

 

“친일에 대한 기준은 정부 방침을 따라야 합니다. 잣대가 다르면 안 되지요. 정부의 기준이 있는데 보훈처의 심사위원들이 사견을 앞세우면 안 되는 거요.“

 

오늘은 논란을 벌이는 자리가 아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것이 홍길동의 한이었다면 독립유공자를 독립유공자라 부르지 못한 것이 유족의 한이란다. 이 한 맺힌 소리를 들려주려고 온 것이다. 좀체 감정에 흔들림 없던 이 교수, 홍길동 은유를 발언할 때만큼은 목이 메어 있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 약칭: 친일재산귀속법 )
[시행 2011. 5. 19.] [법률 제10646호, 2011. 5. 19., 일부개정] 법무부(법무심의관실), 02-2110-3164
제1조(목적) 이 법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협력하고 우리 민족을 탄압한 반민족행위자가 그 당시 친일반민족행위로 축재한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하여 거래의 안전을 도모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며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3. 1운동의 헌법이념을 구현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개정 2006. 9. 22., 2011. 5. 19.>
  1.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는 대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하 “친일반민족행위자”라 한다)”라 함은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를 말한다.
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제6호ㆍ제8호ㆍ제9호의 행위를 한 자(제9호에 규정된 참의에는 찬의와 부찬의를 포함한다). 다만, 이에 해당하는 자라 하더라도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 등으로 제4조의 규정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결정한 자는 예외로 한다.
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3조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결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일제로부터 작위(爵位)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자. 다만, 이에 해당하는 자라 하더라도 작위를 거부ㆍ반납하거나 후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자 등으로 제4조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결정한 자는 예외로 한다.
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의 규정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자 중 제4조의 규정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ㆍ처형ㆍ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자 등 친일의 정도가 지극히 중대하다고 인정된 자.
  1.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이하 “친일재산”이라 한다)”이라 함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ㆍ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거나 이를 상속받은 재산 또는 친일재산임을 알면서 유증ㆍ증여를 받은 재산을 말한다. 이 경우 러ㆍ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취득한 재산은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으로 추정한다.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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