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높은 문화의 꽃을 피운 북송의 시대, 그 한가운데 구양수와 소동파가 있었다. 구양수는 북송의 정치와 학술 두 분야에서 영향력을 크게 발휘한 인물이다. 소동파는 중국에서 ‘공자 이래로 가장 인상적인 기억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는 문단의 독보적인 존재이자, 문예의 천재였다. ‘당송팔대가’는 누구인가? 당나라의 한유와 유종원에 이어 나머지 6인이 모두 송나라의 문인이다. 송의 6대가로 손꼽히는 인물이 구양수와 소동파요, 증공과 소순, 왕안석과 소철이다. 그런데 구양수는 자신을 제외한 이 다섯 명의 문인들을 모두 발굴한 북송 문단의 영수이자, 북송 문학의 거장이었다. 「적벽부(赤壁賦)」로 유명한 소동파 역시 구양수가 발굴하고 키운, 구양수의 제자였다. 『구소수간』은 중국의 대문장가로 불린 구양수와 소동파의 편지 모음집이다.
조선의 세종이 『구소수간』을 많이 읽었다는 일화는『조선왕조실록』뿐만 아니라, 『연려실기술』과 『필원잡기』 등에도 보인다. 세종은 공부를 좋아하여, 병중에도 책을 놓지 않았다. 태종이 책을 읽느라 건강을 해친 아들을 위해 서책을 다 치우게 하였는데 한 권의 책만 곁에 두게 하였다. 그 한 권의 책이 『구소수간』이다.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자.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잠저에 있을 때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아서, 일찍이 경미한 병환이 있어도 독서를 그치지 않았다. 태종께서 환관을 시켜 서책들을 다 감추게 했는데, 『구소수간』 만을 곁에 두게 하여 드디어 이 책을 다 보시었다.”[上自在潛邸, 好學不倦, 嘗有微恙, 猶且讀書不已. 太宗使小宦盡取書帙, 唯歐蘇手簡在側, 乃取盡閱.]
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구소수간』을 애독하였다. 왕이 되기 전 사가에 머물던 잠저의 시기, 청년 세종이 병석에서도 『구소수간』만은 옆에 두고 읽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청년 세종은 왜 『구소수간』을 수십 번이나 탐독하였을까? 『구소수간』은 고려시대부터 유학자들에겐 필수 교양서나 다름없었다. 당시의 문인 학자라면 대부분 그랬듯이 세종은 먼저 중국의 대문호 구양수와 소동파의 뛰어난 문장에 심취했을 것이다. 더구나 구양수와 소동파의 청신하고 활달한 문장은 당시에는 너무나 유명한 것이었다.
구양수와 소동파는 물 흐르는 듯 시원스럽게 글을 썼으며 짧게 쓴 문장이더라도 뜻과 이치를 담았다. 때로는 늙어 병드는 것을 탄식하였고, 때로는 유배지의 외로움을 토로하였으나, 언제나 그들의 글은 진솔하고 간명하였다.
예컨대 구양수는 ‘매성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차하게 살지 않는 친구 매성유의 고아한 인품을 흠모하여 이렇게 칭송하였다. “성유의 출중한 문장은 아무도 따라올 수 없지요. 옛날 죽림칠현은 고매한 행동으로 자부심이 높았습니다만, 성유의 삶은 죽림칠현의 황음(荒淫)에는 미치지 못하여도 그대의 문아(文雅)는 죽림칠현보다 더 나은 듯합니다.” 이 문장은 ‘황음’과 ‘문아’ 두 글자로 매성유의 성취를 평한 구양수의 글의 본보기이다. 이에 소동파는 “만물을 끌어와 문장을 지어, 사람들을 감복시켰다”면서 구양수의 글을 예찬하였다. 늘 후학을 키우고자 열과 성을 다하였던 구양수 역시 소동파의 재능에 대해서는 “소식의 글을 읽으니 나도 모르게 진땀이 흐릅니다. 참으로 통쾌합니다. 늙은이는 마땅히 길을 비켜 젊은이가 한걸음 앞서가도록 물러설 줄 알아야 하겠지요. 몹시 기쁘고 기쁩니다.” 이렇게 경탄하였다.
또한 구소수간에는 구양수와 소동파 인생의 희로애락이 들어 있어 독서광인 세종은 여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수와 마찬가지로 소동파 역시 정치의 화를 피하지 못했다. ‘오대시안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파란만장한 유배의 길을 겪기 시작한 유랑생활은 머나먼 남쪽, 바다 건너 해남에서 사면을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동파’라는 호를 짓고 직접 농부가 되어 땅을 일구던 황주는 소동파의 첫 유배지였다. 자신 때문에 고초를 당하는 동료들을 보고 있기에 너무 괴로워 소동파는 “죄를 얻은 이래 혼자 유폐된 생활을 하고 있소. 홀로 조각배를 타거나 짚신을 신고 산수를 유랑한다오. 나무꾼과 어부들과 섞여 지낸다오.”라고 하면서 붓을 태워버리고 벼루를 던져버렸다.
한때 수도 개봉에서 천하의 명사들과 교류했던 소동파는 “내가 가는 길은 왜 이다지도 험난하여 거처할 곳도 없는가?” 탄식하며, 유배지에서 나무꾼과 어부들과 어울리며 외로운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소동파의 자유로운 정신은 삶의 고초를 넘어 해학과 달관의 경지로 나아갔다. “천지 가운데 있는 산천과 초목, 벌레와 물고기와 같은 것들도 모두 내가 만드는 즐거운 일이야.”라고 하면서 절망적 삶 속에서도 정신의 자유를 구가하였다. “문을 닫고 외부와의 만남을 끊은 채, 엎드려 깊이 생각하며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러한 사정들은 모두 『구소수간』에 담겨 있다. 구소 양인은 인간이 겪는 고통과 회한, 기쁨과 슬픔을 짧은 편지글 속에 담아 벗들과 교유하였다. 종이도 귀한 시절에 심부름꾼을 앞세워 편지를 전하고 안부를 물으며 마음속 심정을 토로하였던 것이다.
이런 인생 역경의 정회가 담긴 『구소수간』을 보면 어느 누구라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세종 역시 불후의 작품을 남긴 두 거장의 창조적 정신과 고난 속에서도 생의 활력을 벗들과 나눈 인간적 정감에 감동하여 『구소수간』을 되풀이하여 읽었을 것이다.
천년 세월을 간직한 서책 『구소수간』이었다. 하지만 국내에 『구소수간』의 번역본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구소수간』의 원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행이 한국에는 조선본 『구소수간』(歐蘇手簡)』이 있었고, 중국에는 하한녕(夏漢寧) 교수가 펴낸 『구소수간교감(校勘)』이 있었으며, 일본에는 서천문중(西川文中)이 주해한 『구소수간주해(註解)』(1881)가 있었다.
옛 편지글을 풀이하다 보면 여러 난관에 봉착한다. 첫 번째 어려움은 상대에게서 온 편지가 없다는 것이다. 보낸 편지는 있는데 상대방에게서 온 편지가 없다. 그래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여 망연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구소수간』의 편지들이 어느 시기 어떠한 사정에서 작성되었을까 알아내기 위해 골몰하고 있을 때, 구양수와 소동파의 교주 문집(『歐陽修集編年箋注』, 『蘇軾全集校註』)을 구할 수 있었다. 교주에 적힌 조그마한 단서 하나는 나에게 망망대해에서 만나는 등대의 불빛이 되어주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전고(典故)를 찾지 못하여 단어의 뜻을 잘못 풀이한 데서 발생하였다. 구양수 편지에서 ‘평산(平山)’이라는 말이 그랬다. 평평한 산인가? 『구양수문집』의 다른 작품에서 보니 ‘평산’은 구양수가 지은 정자 ‘평산당(平山堂)’이었다. ‘불의(不疑)’라는 말도 그랬다. ‘의심이 없다’는 말인가? 찾고 보니 ‘불의’는 고을군수 ‘이불의’였다. 또 소동파의 편지에 나온 ‘능취(凌翠)’도 풀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능취’의 ‘능’(凌)은 여인의 장신구로 쓰이는 마름 열매이고 ‘취’(翠)는 비취새의 깃털이다. 소동파는 아름다운 시첩을 ‘능취’로 표현하였다.
『구소수간』을 풀이하는 내내 나는 발견의 기쁨을 누렸으며, 두 대가가 발하는 문학의 향기 속에 살았다. 『구소수간』에서 구양수와 교유한 문인은 매성유와 왕안석, 유원보와 채군모, 소순과 서무당 등 58인이다. 또한 소동파가 교유한 문인은 사마온공과 이방숙, 황노직과 전제명, 등달도와 미불 등 85인이다. 구양수와 소동파는 이들과 인생의 실의와 환희, 고요하고 장중한 자연의 소리를 주고받았으며, 해학과 풍자로 세상사를 논하였다. 교유한 이들 문인도 북송시대를 빛낸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구소 양인뿐 아니라 『구소수간』의 수신인으로 나오는 이들의 문학적 자취를 찾으면서 나는 또 다른 즐거움을 가질 수 있었다.
선학(先學)의 지도와 안내를 받아 『구소수간』의 풀이를 이나마 하게 되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정성을 다해 지도해 주신 전남대학교 장춘석 교수와 오만종 교수께 감사를 드린다. 특히 장춘석 교수의 ‘당송팔대가’ 수업에 참여하면서 나는 구양수와 소동파 양인의 작품을 풍부하게 연구할 수 있었고, 덕분에 『구소수간』의 편지글을 깊이 있게 파고들 수 있었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의 부족한 점을 지적해 주신 전남대학교 김대현 교수와 전북대학교 김병기 교수, 단국대학교 안희진 교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난해한 곳마다 전거(典據)를 찾아주면서 나의 연구를 이끌어준 위당 김재희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2021년 9월
무등산 아래에서
역자 유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