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시험 수험 수기

0
46
  1. 나는 왜 공시판에 뛰어들었는가?

나는 우스갯소리로 우리 학교를 ‘공무원대학교’라고 불렀다. 취업 시기에 들어선 선배들이나 동기, 후배들 중 공무원을 지망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문사철(文史哲)은 지성인들의 기본적 소양이다. 그러나 문사철을 포함한 인문계열을 전공한 학생들은 취업전쟁 시대에 총알받이로 출전하는 군인일 뿐이다. 현실에서의 문사철은 ‘문송합니다’의 주체로 대표된다. 한시라도 빨리 버리고 도망가야 할 학문이 된 것이다. 전쟁 통인 취업시장에서 뒤처지거나 실패를 겪은 청년들은 공무원 시험으로 몰려들었다. 일찍이 취업 전선에 발을 들이지 않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의 대다수는 그렇게 공시생이 되었다. 비단 우리 학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공시생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꿈을 잃은 낭인들이라 여겼다.

나는 학교를 다닐 적에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언론사에 취업해 세상살이를 사회에 알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다. 그렇기에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접근하지 못했다. 단지 꿈으로 두고 그 꿈을 위해서라면 온갖 것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도리어 꿈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내게 필요한 건 현실감각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정량적이고 눈길을 끌 만한 스펙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꿈속에 파묻혀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장님이었다.

그런 상태로 나는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현실은 전쟁이었다. 현실감각이 없어 어떤 스펙도 갖추지 못한 나는 총알 없이 전장으로 뛰어든 군인이었다. 전쟁터에 들어서자마자 코로나19라는 커다란 폭격이 쏟아졌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총알 없이도 살아남아보려 계획했던 나의 전략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형국에 빠진 나는 그대로 쓰러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취업 전선에서 나는 부상병이었다.

회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공무원 시험. 공시생이 되는 길이었다. 공무원 시험은 일반적인 기업 취업과는 달랐다. 정해진 교과목이 있었고 공부를 한 만큼 성적이 나왔다. 전쟁터에 나가 싸우기 위한 총알이 필요하지 않았다. 맨몸으로도 시작할 수 있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그렇기에 경쟁은 치열했다. 취업 준비생의 10명 중 3명이 공시생이다. 20대, 30대뿐만 아니라 40대, 50대도 공무원 시험에 뛰어들었다. 또 이직을 위해 뛰어든 이들도 많았다. 저마다 버거운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나 또한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공시생을 아니꼽게 보던 내가 생각났다. 공시생이 되기로 마음먹고 나서 생각을 해보니, 얼마나 주제넘은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다들 살아가기 위해 공시생이 되었던 것이다.

생각을 고쳐먹은 직후 곧바로 동영상 강의 1년 수강권을 끊었다. 수험서도 주문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공무원 시험 준비하려고.” 엄마는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절대 공무원은 안 할 거라더니…… 왜?” 나는 순간 머쓱해졌다. “그냥 취업도 어렵고, 코로나도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엄마의 대답은 숙연했다. “…그래, 열심히 해봐.”

가진 것이 없는 나에 대한 깨달음, 취업난 시대에 갑자기 덮친 코로나, 살아갈 길을 모색하며 느낀 막막함. 그 밖의 상념과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나를 훑고 지나간 뒤에야 나는 공시생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이 길이 탁월한 선택인지, 패잔병의 감정을 공유하며 별 수 없이 한 선택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그저 눈앞에 닥친 현실을 목도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발을 옮겼을 뿐이다. 이렇게 나는 메마른 공시판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반드시 1년 안에 합격하리라.’

  1. 공시생의 수험생활

배송된 공무원 수험서를 펼쳤다. 기계적으로 강의를 들었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던 나에게, 정답과 길이 보이는 공무원 시험공부는 어렵지 않았다. 강의를 듣고 이해하고 외우면 됐다. 문제는 취업에 대한 조급함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공부법이 쉬우니 적당히 하면 될 것 같았다.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며 나는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험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한 나는 아르바이트를 내려놓지 않았다. 용돈을 받아 생활할 여력이 없었다. 길게 보면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합격권의 점수를 맞을 수 있도록 실력을 갈고 닦아야 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쉽다고 느꼈던 공부를 하며 점점 깨달았다. 나는 이제 막 바다로 향하기 시작했을 뿐이라는 걸. 공부를 하면 할수록 망망대해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돌아보니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멀리 향해왔다. 앞을 쳐다봐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나아가야 바다의 끝을 볼 수 있을지 몰랐다. 공무원 시험이란 이러했다. 마치 태평양 한 가운데에 떨어진 초보 항해사가 된 기분이었다. 돌아가기엔 이미 멀리 왔고, 나아가기엔 끝을 알 수 없으니 두려웠다.

공무원 시험공부의 커리큘럼은 정해져있었다. 기본 강의를 듣고 수험서를 읽고, 문제를 계속 풀면 된다. 하지만 범위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넓은 범위 중 어느 곳에서 문제가 출제될지 알 수 없었다. 아는 문제만 나오면 좋은 점수를 받고, 두세 문제 헷갈린다면 그대로 고꾸라진다. 현실적으로 수험서에 나온 모든 지식들을 일 년 안에 익히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인 셈이다. 이걸 깨닫고서, 나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그저 적당히 해서 될 시험이 아니었다.

일주일 모든 날을 시험공부에 쏟기로 결심했다. 내 직업은 공시생이고, 직장은 도서관이라 생각했다. 업무가 많은 직장인이 되었다 생각했다. 오전 8시 30분까지 도서관으로 출근했고, 저녁 10시까지 공부를 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기에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생활해야 했다. 통장 잔고를 보니 6월에 있을 지방직 시험일까지 얼추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신 한 끼를 줄였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점심을 학생식당에서 든든히 먹기로 했다. 저녁은 거르고 공부했다. 저녁식사를 하지 않으니 생활비를 줄이고 공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평일 내내 공부했다. 토요일은 출근시간은 같되, 오후 6시까지만 공부했다. 토요일 저녁은 특식이었다. 일주일을 잘 지낸 보상으로 맛난 걸 먹으며 TV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보았다. 그렇게 웃고 즐기며 주말 저녁을 보냈다. 일요일은 일주일 중 늦잠을 잘 수 있는 날이었다. 10시 정도까지 잠을 푹 자고 일어나 방 청소와 빨래를 했다. 출근하느라 신경 쓰지 못한 집을 돌보았다. 그러고 오후 2시쯤 공부를 하러 갔다. 일요일은 그래도 주말이라 출근하는 느낌이 덜 했다. 주말 기분으로 저녁 10시까지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쌀쌀한 밤공기는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또 한 주가 흘렀구나.’ 다음 한 주를 또 열심히 보내리라 다짐했다. 현재에 충실한 삶을 체험했다.

시험 합격의 문으로 들어서는 데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루틴을 잘 지키는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일주일 루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오전에는 무조건 영어와 국어 문제를 풀었다. 또 영어, 국어 단어는 아침, 점심, 저녁, 퇴근 전 이렇게 네 차례 보았다. 점심을 먹을 땐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들었다. 언론사 시험을 준비했던지라, 세상 돌아가는 일도 관심을 두고 싶었다. 또한 공무원이란 직업도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세상의 흐름을 지켜보면 훗날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클래식 라디오를 꼭 들었다. 내가 좋아했던 건 KBS클래식의 ‘당신의 밤과 음악’이란 프로그램이었다. 노랫말이 들어간 중독성 있는 음악은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아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클래식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클래식은 익숙했다. 집에 도착해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홈트레이닝을 하거나 밖으로 나가 뛰었다. 몸을 풀어주는 시간도 필요했다. 이처럼 기본적인 루틴에 따라 생활을 했다. 심지어 ‘토요일 특식에는 지코바 치킨을 먹는다.’는 루틴을 두어 달 지키기도 했다. 루틴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는 소모를 발생시키지 않았다. 그 결과 익숙함에 더 익숙해져 공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6월 지방직 시험 이전에 국가직 시험이 4월에 있었다. 국가직 시험 직전까지는 수험서를 1회 훑어본 것이 전부였다. 시험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조급해졌다. 마음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국가직은 진짜 시험을 위한 모의고사라 생각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국가직 시험은 약간 어려웠다고 평가되었다. 그리고 나는 300점대 초반 점수를 받았다. 합격 점수엔 많이 부족하지만 수험서 1회독치고는 점수가 잘 나왔다. 합격컷 점수는 지역마다 다르지만 대략 300점 중후반이었다. 지방직 시험까진 두 달 조금 안 남은 시간이었다. 좀 더 몰입하고 몰두해야만 했다. 출근 시간을 8시로 앞당겼다. 그리고 퇴근 시간도 11시로 늦추었다. 이전보다 두 시간가량 시간을 벌었다. 물론 주말도 공부 시간을 더 확보했다.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공부에 덤볐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저 수험서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시간이 이때처럼 빨리 갔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루가 갈 때마다 마음은 조급했고 공부 속도를 높였다. 몰입에 몰입을 더한, 무아지경에 이른 듯했다. 순식간에 시험일은 다가왔다. 시험일만 넘기면 어떻게든 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버텼다. 기분 좋게 쉬든, 다시 또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고통 속에 쉬든 쉴 수 있을 터였다.

시험은 충남 천안여상에서 보게 되었다. 시험 전날 오전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오후에 본가로 돌아갔다. 마지막 공부로 한국사 책을 훑었다. 밤 12시까지 공부를 하고서, 12시가 조금 넘어서야 잠자리에 누웠다. 기분이 묘했다. ‘내일이 시험이구나.’ ‘눈을 감고 뜨면 시험을 보게 되겠구나.’ 갖은 생각 속에 잠이 들었다. 그리고 6월 5일, 지방직 시험일의 아침이 밝았다.

  1. 공시의 끝

시험장으로 가는 길에 형과 엄마가 함께 동행해주었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 공부 내용을 복기했다. 차 밖 풍경을 누릴 여유는 없었다. 시험이 끝나면 얼마나 몸이 가벼울지 상상했다. 기분은 좋을지 좋지 않을지. 세 시간가량 후면 시험이 끝난 상황일 텐데, 나에겐 그 상황이 이상처럼 느껴졌다. 시험이라는 이름의 다가올 현실은 보이지 않는 옹벽이었다.

막상 시험장에 앉아있으니 긴장감은 덜했다. ‘시험 끝’이라는 이상이 현실이 되는 과정 속에 있으니 안정된 기분이었다. 재밌는 건, 국가직도 지방직도 맨 앞자리였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중요한 시험을 볼 때 맨 앞자리를 선호했다. 주변에 거슬리는 움직임이 없어 집중하기에 용이해서 좋다. 좋은 기분이 샘솟았다. 마치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집중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곧이어 시험지를 받았다.

시험을 보고 나서 든 느낌은 이러했다. ‘쉬웠다. 그러나 애먹었다.’ 쉽게 푼 문제들은 보자마자 답을 찍었다. 그러나 나를 애먹게 한 문제들은 불합격의 두려움을 동반하게 했다. 시험 직전까지 복기했던 과목이 한국사라 그런지, 한국사 문제는 말 그대로 술술 풀었다. 시험공부를 하며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인 영어는 난감했다. 시험 중 가장 마지막에 푼 과목이라 그런지 긴장이 배가 되었다. 긴장감에 문장 해석이 되고 있는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간신히 시험 시간에 맞추어 답 마킹을 끝냈다. 시험 중 내쉬고 싶었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목표로 삼고 달려온 시험이 드디어 끝났구나.’ 그저 후련했다.

시험장을 나서는 중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고향 친구였다. 몇 해 전, 녀석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는 이야길 들었었다. 나보다 시험 선배인 셈이다. 오랜만에 보았지만 시험과 관련된 궁금증이 더 많았다. 시험과 관련해서 이것저것 묻다가 교문 앞을 나서며 헤어졌다. ‘몇 년 만에 만나서는 고작 시험에 대한 이야기만 하다가 헤어지는구나.’ 이런 게 현실이었다.

시험이 끝나니 막상 식욕이 생기질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펜을 내려놓을 땐 후련했던 마음이 엄마의 모습을 보자 답답해졌다. 엄마에게 시험을 잘 봐서 들뜬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없었다. 시험을 치를 때 어려워했던 문제들이 계속 떠올라 아쉬움이 더 커졌다.

시험이 끝나고 한 시간 후 시험 가답안이 나왔다. 점수를 맞춰보고 인터넷 강의 사이트에 내 점수를 입력하면 나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시험 발표일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합격 불합격 여부를 대강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두려웠다. 나의 위치를 알게 되면, 혹시나 불합격권이면 절망에서 헤어날 수 없을 거 같았다. 나는 우선 쉬기로 했다. 읽고 싶었던 책을 읽었다.

본가에서 다시 광주광역시 원룸으로 돌아왔다. 시험은 끝났지만 전과 같이 도서관에 출근했다. 실직한 직장인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도서관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7급 시험 과목인 헌법을 공부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이 심란했다. 한 달여 기간 동안 시험 결과를 기다려야만 하는 게 곤욕스러웠다. 시험지를 펼치고 채점을 해볼까 말까는 수십 번 고민했다. 고작 시험 채점일 뿐인데 왜 이리 좀스러운 듯 굴게 되는 건지. 고민스러운 마음이 불편해 결국 시험지를 펼치고 말았다. 동그라미, 엑스를 번갈아가며 채점을 했다.

점수는 애매했다. 합격과 불합격 그 사이에 있는 점수였다. 합격을 한다면 가까스로 할 것이고, 불합격한다면 아깝게 떨어질 터였다. 채점을 할지 고민하던 마음이 불편해서 채점을 한 것이었는데, 아뿔싸, 더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날 이후로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시험을 보기 전날에도 잠을 잘 잤던 나였는데, 점수를 확인한 후에는 여러 날 동안 잠을 못 이뤘다. 날마다 꿈을 꾸었다. 어떤 날은 합격했고, 어떤 날은 떨어졌다.

어떤 누리꾼은 공무원 시험이 피를 말리는 시험이라 했다. 시험 준비 과정이 혹독해서가 아니라, 1점 차이로도 합격과 불합격을 오가기 때문에. 또 그 1점 때문에 불편한 마음을 안고 지내길 수개월이 걸리기 때문이라 했다. 최종합격 여부는 시험 후 대략 삼 개월 후에나 알 수 있었다.

필기합격 발표는 시험 후 한 달이 지난 7월 9일에 이루어졌다. 필기시험은 통과였다. 하지만 불안감은 계속됐다. 공무원 시험에서 면접은 큰 변별력이 없다. 면접관이 모두 ‘우수’를 주거나 ‘미흡’을 주지 않는 이상 ‘보통’이다. 큰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대개 ‘보통’을 받는다. 면접대상자는 최종합격자의 1.2배수로 뽑는다. 나는 나의 점수가 끝자락에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면접에서 승부를 걸어야만 했다.

도서관을 날마다 출근해서는 면접을 위한 책들을 뒤적였다. 행정, 지역 발전, 지방 소멸 대책 등에 대한 책을 읽었다. 공무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익히고, 지역 살리기와 관련된 사례를 살폈다. 50여 가지 질문을 만들고 거기에 답변을 쭉 쓰는 작업을 계속했다. 이렇게 하길 반복하니, 답변에 대한 얼개가 잡혔다.

필기합격으로부터 또 한 달이 지난 8월 12일에 홍성 내포에 위치한 충남도청에서 면접을 보았다. 신도시로 지정된 곳이었으나 주변은 황량했다. 아파트 단지가 곳곳에 들어서 있었지만, 거리엔 차도 사람도 없었다. 도청 부근에만 단정한 차림의 사람들이 조금 있을 뿐이었다. 면접을 보는 현실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면접을 후딱 보고 가자는 생각이었다. 웬걸, 내가 맨 마지막 순서였다. 조용한 대기실에서 세 시간가량 앉아있었다. 머릿속으로 복기를 수차례 하니 오후의 졸음이 밀려들기도 했다. 긴장은 되지 않았다. 내가 준비한 것을 토대로 대화를 하자고 생각했다.

내 차례가 되고 면접실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는 긴장감이 맴돌기도 했다. 시원했던 에어컨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면접실엔 면접관 두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분은 딱딱한 얼굴이었고, 다른 한 분은 푸근한 인상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질문이 이어졌다. 충남 북부와 남부의 발전 격차를 어떻게 극복할 건지, 자주 재원은 어떻게 확보할 건지 등등. 내가 준비한 질문들이었다. 답변을 하는 데에 막힘없었다.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좋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들어오기 전까진 그랬다. 면접관 한 명이 물었다. “국가배상법 2조와 5조의 차이가 뭔지 아시나요?” 실무와 관련된 질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답변하지 못했다. 예상을 벗어난 질문이라 당황했다. 사실 국가배상법에 대해 잊어가는 듯했다. 단기 암기의 폐해였다. 이후에 계속된 답변엔 잘 대답했지만, 대답을 하면서도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 것에 못내 아쉬웠다. 좋았지만 아쉬운 면접은 이렇게 끝이 났다.

면접이 끝나고서 도청을 돌아보았다. 내가 마지막 차례였던지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화창한 날씨에 햇볕은 강하게 내리쬐었다. 이번 면접이 마지막일지, 내년에 또 보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미묘한 감정이 돌면서 허기를 느꼈다. 면접장소 근처에서 엄마가 기다리고 계셨다. 필기시험 때도, 면접 때도 엄마는 동행했다. 면접까지 치르고 나니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엄마의 존재가 보였다. ‘엄마도 배고프시겠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강하지만 무적은 아니었다. 내가 고생한 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고생하셨을 엄마였다. 면접에서 떨어지더라도 당신은 기분이 좋다고 나에게 말해주던 엄마였다. 엄마와 함께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둘이서는 오랜만에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밥이 참 따듯했다.

  1. 합격, 그 후

9월 3일자로 공무원 시험 최종결과가 나왔다. 최종합격이었다. 3개월은 아르바이트와 병행, 나머지 6개월은 오로지 시험공부만 했다. 길면서도 상대적으로 짧은 9개월로 공무원 수험은 마무리되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이라기 보단 다행스런 마음이 컸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길이 생겨서, 엄마의 무거운 짐을 덜어드릴 수 있게 돼서, 고난스러운 취업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결과를 확인할 때에 ‘최종합격’이라 적힌 단어를 보고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련함과 안심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공부하던 책상을 정리했다. 버릴 것과 남겨둘 것을 구분했다. 임용 후에도 내게 필요할 것 같은 행정법, 행정학 과목 등 기본서는 남겨두었다. 만만치 않은 무게의 책을 비워내니 책상은 채울 공간이 생겼다. 무엇이든지 비우는 일은 새로움을 동반한다. 비우는 과정에서 시원섭섭한 마음이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하고, 다시 출발하는 듯 도약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임용까지 몇 달간의 시간이 주어진 나는, 전자의 마음이 더 컸다.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막막한 기분도 들었다. 임용등록 서류를 제출할 때 담당자로부터 내년 1월 또는 3월 즈음 발령이 날 것 같다는 이야길 들었다. 적어도 세 달 동안 백수이자 임용대기자로 있을 터였다. 사람들의 꿈이 돈 많은 백수라고들 하던데, 돈이 없어도 백수로 있을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복을 받은 상황이라 여겼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 생각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이곳저곳을 다녀보고 싶었다. 책을 읽고 싶었다.

사람들을 만나기엔 저마다 바빴다. 이곳저곳 다니기엔 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으로 주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사람을 만나거나 돌아다니는 일은 간혹 하기로 하고 평일에는 도서관을 출근하기 시작했다. 짧지만 강하게 했던 공무원 수험 생활 때문인지 도서관에 머무르는 게 편했다. 조용한 환경에서 책을 읽으며 무궁무진한 생각을 했다. 본래 집중력이 좋은 편은 아닌지라, 뭔가 하고 있는 중에도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수험 생활을 하면서는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면 무시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에 대해 검색을 하고 생각을 더 넓혀갔다. 그런 생각 중에 ‘공무원의 미래’에 대한 생각도 있었다.

최근 4년간 공무원 10만 명이 증원되었다고 한다. 이런 뉴스 기사에는 우려 섞인 국민들의 댓글이 달린다. 공무원 월급과 연금 등 세금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는 우려다. 물론 부족하거나 필요로 한 영역의 공무원을 증원하는 일은 필요하다. 또 공무원 증원은 베이비붐 세대들의 퇴직으로 상쇄되므로 총 공무원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우려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공무원의 미래를 크게 보면 국가 전체의 미래와 연결되지만, 작게 보면 나의 미래와도 연결된다. 공무원하면 소위 ‘철밥통’ 이미지를 대개 떠올린다. 나는 60세까지 공무원으로서 정년퇴직하리라는 장대한 포부를 갖고 있지 않다. 인생은 어찌될지 모른다는 나의 개방적인 생각 때문이다. 생각이 열려있으므로, 당연히 정년까지 공무원 생활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주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승진욕에 불을 지피고 싶지도 않다. 나는 안정적이면서도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삶을 지향한다. 지금으로서는 공무원으로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공무원들의 매너리즘은 세계 각국의 문제이다. 내가 공무원이 된다고 해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 다만 이런 생각 또한, 내가 입직을 했을 때에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열린 생각은 때론 이처럼 답을 찾을 수 없는 생각의 늪으로 빠지게 한다.

그렇더라도 ‘괜찮아 잘 될 거야.’나 ‘꽃길만 걷자.’라는 등의 희망찬 미래를 예찬하는 식의 마무리를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임용 후 어떤 업무를 맡고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른다. 다가올 미래가 어떠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지금에 충실하자는 말을 되뇌고만 싶다. 지금 느낄 수 있는 감정과 떠오르는 생각, 겪고 있는 상황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다. 잘 될 거라는 얼버무리는 식의 마무리보단, “carpe diem!(현재에 충실하라!)”을 외치고자 한다.

2021.11.21. 임일묵

 

안녕하세요. 사단법인 인문연구원의 웹진 동고송입니다.

의견을 남겨 주세요.

Please enter your comment!
Please enter your name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