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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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궂은 나날이 가고, 10월의 화려한 가을날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축복처럼 보태진 11월의 며칠 동안 화사하고 기막힌 가을의 끝이 신속하게 사라진다. 입동(立冬)이 지나고 불어오는 찬 바람 속에서 첫눈의 기억이 아련하게 찾아든다. 첫눈은 언제나 무한한 설렘과 기대와 함께 찾아온다. 어느 날 홀연히 첫눈은 갑작스레 환한 얼굴로 지상으로 하강한다.

아주 어렸을 때 첫눈이 오면 마구 뛰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동네방네 뛰어다니곤 했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누가 시키는 게 아니라, 내면의 어느 깊은 곳에서 그렇게 하도록 인도하는 어떤 힘이 있었을 터였다. 그런 시절이 아스라히 사라진 지금도 그 시절은 언제나 그리워진다.

얼마 전에 폴란드 영화 <첫눈이 사라졌다>를 보면서 기억에서 떠나보냈던 첫눈이 새삼스레 떠오는 것이었다. 1986년 4월 26일 일어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를 소재로 만든 영화 <첫눈이 사라졌다>. 영화는 우리를 낭만과 기대로 가득한 환희의 시공간이 아니라, 인류가 맞닥뜨린 재앙의 과거과 현재를 돌이키도록 한다.

1945년 8월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 앞으로도 이런 가공할 재앙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음은 자명한 사실 아닌가?! 그런데 영화의 끝은 아주 아름답고 풍성하다. 하얀 폭설로 작은 도시 하나가 완전히 뒤덮여가는 환상적인 장면으로 가득하다.

첫눈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요, 하는 물음에 예기치 않음, 기다림, 설렘이라 답하는 사람에게 에일리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는 노래를 들려줬다. 사실 이 노래를 들은 것은 나도 이번이 처음이다. 노래를 듣지 않고 지나간 세월이 제법 길다. 엔진 오일 교환하러 들른 정비공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시디에 실려있던 노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아, 이런 노래가 있었구나, 하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찾아들었다. 노랫말도 곡도 대단한 노래를 여태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집으로 오는 길에 자꾸만 들어도 질리지 않는 절창(絶唱). 4년 전이라는 노래의 생성연대를 돌이키노라니, 세월이 참 무상하게 흘러가는구나, 그런 생각이 떠온다.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에는 떠나가거나 찾아오는 주체는 언제나 남성이었는데, 이번 노래에서는 노래하는 여성이 연인을 찾겠다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21세기 변해버린 세상과 인연과 관계를 잠시 떠올린다. 남성에게 의지하는 나약하고 순종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찾아 담대하게 나아가는 신여성의 모습이 듣기에도 좋았다.

그래서 올해 첫눈이 언제 내릴 것인지, 내기를 걸었다. 학부 다닐 때 무려 3년 연속 첫눈 오는 날을 맞췄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술 한잔 내기로 했다. 첫눈이 내리는 그날이 오면 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하얀 보도를 오래도록 걷고 싶다. 첫눈이 오면!..

<경북매일신문>, 2021년 11월 10일자 칼럼 ‘파안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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