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지구에 눈이 오지 않는다면?!

첫눈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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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앞으로 지구에 눈이 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도 있고, 어린애처럼 서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첫눈에 대한 찬란한 기억은 있을 것이다. 첫눈 오는 날이면 강아지처럼 뛰어다니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던 시절. 시간이 흘러 누군가와 더불어 카페에서 주점에서 하염없는 이야기꽃을 피웠던!..

그런 꿈같은 사건과 이야기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난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첫눈이 사라졌다>는 영화는 더는 오지 않을 눈에 관한 아름다운 서사다. 우리에게는 낯선 폴란드어와 러시아어 그리고 프랑스어가 혼재하는 이국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을 매개하는 주인공 제냐 덕분에 관객은 가슴 따뜻한 이야기와 대면하게 된다.

제냐는 누구인가

제냐는 구소련에 속한 나라 우크라이나 사람이다. 제냐는 ‘알렉산드르’라는 이름을 줄여서 만든 애칭이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는 사고지점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일곱 살 소년 제냐는 사랑했던 엄마를 원전 사고로 잃는다. 아버지 없이 자라던 제냐가 엄마마저 떠나보내야 했던 체르노빌 사고.

제냐는 지금 폴란드의 아담한 계획 소도시에 산다. 그는 전문적인 마사지사다. 날마다 제냐는 정해진 시각에 고객을 방문한다. 언제나 큼지막한 가방을 메고 다니는 제냐. 영화는 그의 단조롭고 반복되는 일상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제냐는 어디서나 크게 환영받는다. 그것은 그의 뛰어난 마사지 솜씨와 너그럽고 따사로운 인품 때문이다.

주민들은 자신의 내면을 제냐에게 털어놓는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부대끼는 주부, 병치레하면서 이런저런 요법을 시도하는 남정네, 과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의 엄마, 사람 대신 개와 함께 사는 여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소소하고 평범하며 시끌벅적한 삶의 내면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그들과 대화하며 가족처럼 살아가는 제냐.

제냐의 최면술

어떤 사람들은 제냐를 평범한 마사지사가 아니라 구원자로 생각한다. 그들을 내리누르는 일상과 관계와 과거의 하중이 너무 무겁고 가혹하기 때문이다. 제냐는 최면으로 그들을 전혀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그곳은 그들이 두고 왔거나 망각한 자연 생태계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숲이다. 하지만 숲은 매양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온다.

홀로 버려졌거나, 민들레가 하염없이 홀씨를 날리거나, 누군가 다가오는 숲 한복판에 서 있거나. 그것은 분명 그들이 언젠가 경험했거나 혹은 그들 내면 깊숙한 곳에 은폐된 아픈 자아의 잔영이다.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잠재의식’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본원적인 자아의 실체와 대면하여 병든 내면을 치유 받는 사람들.

하지만 정작 제냐는 자신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 그토록 사랑했던 엄마를 잃어버리고 홀로 방치된 채 30년 넘는 세월을 떠돌이로 살아야 했던 제냐. 그는 꿈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본다. 죽어가는 엄마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했던 제냐. 숲을 마주한 지붕 위에서 홀로 햇살을 받으며 쓸쓸하게 앉아있던 고독한 소년 제냐.

슈퍼히어로 제냐?!

제냐가 날마다 지나가는 길목을 지키는 문지기 영감이 귀가하는 제냐를 한사코 붙잡는다. 경비실에서 흔쾌하게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두 사람. 술 취한 제냐가 이륜 전동차를 차고 거리를 누빈다. 그의 입에서 자신만만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온다.

“내가 당신들 모두 구해줄게요!”

이 장면에서 그는 스스로 슈퍼히어로가 되었음을 느낀다. 정작 엄마를 구하지 못했지만, 이제 소도시 거주민 모두를 구해주겠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엄마를 살리지 못했다는 아픈 기억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제냐. 하지만 제냐는 잠시 취해 있을 뿐 아니던가?! 진정한 슈퍼히어로는 말짱한 정신으로 자신의 초능력을 실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관객은 제냐가 오랜 세월 품어왔던 진실한 열망을 확인한다. ‘취중진담(醉中眞談)’이라는 말처럼 누구나 대취하면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제냐가 열망했던 꿈은 엄마 대신 지금 함께 하는 사람들을 구해주는 것이다. 제2 제3의 체르노빌에 노출돼있는 사람들을 초능력으로 살리는 것이 그의 잠재적인 열망이다.

제냐, 놀라운 마술을 선보이다

소도시 아이들의 연말 학예회가 다가온다. 아이와 학부모들을 위해 연극을 준비했던 사람이 세상과 작별하고, 제냐가 대역을 맡는다. 제냐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마술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상자 속에 사람을 집어넣고 자물쇠로 잠근 다음, 그 사람을 상자 밖으로 꺼내는 마술. 긴장된 음악과 연기 속에서 기막히게 마술을 구현하는 제냐.

하지만 잠시 후 사람들이 크게 당황하기 시작한다. 제냐가 사라진 것이다. 방금까지 화려한 의상을 입고 놀라운 마술 연기를 펼쳤던 제냐가 느닷없이 자취를 감춘 게다. 무슨 까닭인가?! 그는 어디로 갔으며, 무엇 때문에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소리도 없이 자신의 흔적을 지웠는가?! 슈퍼히어로 제냐는 사람들을 구했다고 생각하는가?!

낯선 사내 둘이 제냐를 찾아다닌다. 아닌 게 아니라 제냐는 언제부턴가 아파트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어왔다. 누군가 그를 추적하고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왜 제냐는 그들을 피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꼬마 여자애의 말에서 단서를 유추할 수 있을 듯하다.

“제냐의 슈퍼히어로 능력을 빼앗으려는 거죠?!”

<첫눈이 사라졌다>가 전하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기억방식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고 타자와 소통하는 수많은 방식이 있는 것처럼, 기억은 각자에게 고유하다. 기억은 언제나 두 갈래 길을 간다. 슬픔과 기쁨, 패배와 승리, 절망과 환희 그리고 흑과 백. 중간지대에서 우리는 평화롭지만, 우리는 중간지대에 무심하거나 그냥 지나친다.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35년 전 일어난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주 머나먼 지난날의 일로 생각한다. 그것의 가까운 과거형이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참사라는 사실을 서로 연관 짓는 사람도 많지 않다. 하지만 감독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의 견고한 실로 꿰어져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 1987년 4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예고된 참사다. 인류의 욕망이 스스로 멈추지 않는 한, 이런 참사는 미래 진행형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참사가 되풀이된다면 미래 어느 날에는 눈이 오지 않을 날이 반드시 오리라.

폴란드의 마우고슈카 슈모프스카 감독과 미할 엔글레르트 감독은 <첫눈이 사라졌다>에서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위로받는 대목은 첫눈이 폭설로 내리면서 소도시 전체가 하얀 눈으로 뒤덮이는 장면이다. 그래, 아직 우리 지구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감독들의 따사로운 눈길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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