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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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룁니다. 보통 책의 세 배나 되는 두께에, 압도적인 무게, 그리고 빼곡한 한자…. 그대가 보내온 ‘구소수간’을 마주한 순간, 놀라움을 뭐라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해 내셨구나!’ 감탄하면서도 슬그머니 책을 한쪽으로 밀어놓으며, 후일 언젠가 자유인으로 한가로이 한없는 시간을 누릴 수 있을 때 꼼꼼히 읽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출간례에서 저의 소회를 발표하라는 무거운 과제를 주시니, 이는 읽기를 미루는 저의 얄팍한 속내를 꿰뚫어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감히 고사하지 못하고 그러마고 수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생업에 바쁜 저를 배려하여 앞부분만 조금 읽고 오라고 하셨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그리하여 저는 낮에는 아이들과 분주하게 지내고, 밤이면 고적한 관사 방에 앉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즐겨 듣던 FM 라디오도 끄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손에 연필을 들고 추천사 머리말부터 차례로 책에 빠져들었죠. 독서라기보다는 공부였습니다. 가을밤의 고요와 적막에 기대어 옛 님 두 분의 나직한 서간체에 정밀하고 오묘한 주석까지, 행간에 감추어진 의미는 없는지 문장 사이에 묵향이라도 나는지 깊은 숨을 쉬며 공부하였습니다.

구양수라는 인물이 간결하고 곡진한 문체로 심금을 울립니다.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시인이 곤궁해진 연후에 시가 좋아진다.’
시의 궁극을 말하며, 역시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는 물질의 폐해를 부정할 근거가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모든 물건은 다 진실로 볼만한 것과 즐거워할 만한 것이 있으니, 물건이 반드시 괴이하고 장엄하고 화려해야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소동파는 생애 후반기에 장자의 제물론에 달했다는데 저도 이제 그 경지를 알 듯도 합니다.
유사 이래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시기가 그렇지만, 두 분 다 어려운 시기 감당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향기로 뜻이 맞는 사람들과 교유하며, 고졸한 글을 남겨 읽는 이의 마음이 절로 맑아짐을 경험하게 하시니 문장의 힘에 감복하게 됩니다.
세종임금이 일찍이 이런 책을 읽으셨기에 자애롭고 타인과의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 그리고 편지마다 안부를 묻고 안녕을 기원하며 한세상 살다 간 사람들, 지금은 다 어디에 있을까요?
천년의 세월을 털고 그대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난 두 분이 현대 한국의 팬들을 갖게 되니 이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어지러운 세상을 환히 비추는 등대 같고 가로등 같은 책이 되기를 기원 드립니다.

머리를 조아려 다시 아룁니다. 천 년 전 선인들의 향기로운 서간을 읽다보니, 작금의 사람들이 인터넷 뉴스에 마구잡이로 다는 댓글과 생각 없이 주고받는 천하고 박한 말을 내뱉는 행태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의가 깃든 말, 서로 높이는 말, 비유가 담긴 말, 얇은 비단과 얌전한 한지에 감싼 듯 은은한 마음을 적은 문장을 주고받는다면 우리네 삶도 한층 우아해질 텐데요, 이런 격 있는 글을 잃어버린 세상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범인이 읽어내기도 어려운 책을, 7년여 성상을 매달려 번역하신 그대의 노고에 감탄하다가 문득 측은한 생각이 들었답니다. 눈이 아프게 자료를 찾고, 자나 깨나 구절 하나 글자 하나를 붙들고 궁리를 하고, 쓴 글을 이리 고치고 저리 다듬고…. 무릇 ‘사람의 생이란 흰 망아지가 지나가는 것을 문틈으로 보듯 너무도 빨리 지나가는 것’이라는데, 그대는 그 짧은 생애의 한 순간에 이런 장대한 발자국 하나를 새기셨습니다. 부디 다시금 통찰하여 장차 이 책에 이어 세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좋은 결실을 내십시오.

다가오는 추위에 몸을 보중하세요. 분명 이 서간의 번역에 몰두하느라 몸에 탈이 나지 않았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만 접습니다.

2021년 가을에 ‘구소수간’ 출간을 기념하여
강정희 드림

 

안녕하세요. 사단법인 인문연구원의 웹진 동고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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