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애독한 책’, <구소수간>이 번역되다

'글을 지도한 사람' 구양수와 '글을 사랑한 사람' 소동파의 편지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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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작품, 편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이다. 김정희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문인화의 진수이다. 문인화는 간결한 필법으로 화가의 마음을 담아내는 그림이다. <세한도>의 구도는 매우 간결하다. 화면 중앙에는 둥근 창이 나 있는 집 한 채가 있고, 집 주변에는 잎이 성근 늙은 소나무 한 그루와 푸르른 잎을 간직한 곰솔 세 그루가 있을 뿐이다. 몹시 추운 때를 의미하는 ‘세한(歲寒)’의 황량한 모습을 보여주는 간결한 구도의 그림이다.

<세한도>를 그릴 당시 김정희는 제주에서 유배 중이었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1840년에 유배되었는데, 1844년에 <세한도>를 그렸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세한도>는 김정희가 자신의 처지와 심경을 표현한 그림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세한도> 옆에 추사체로 쓴 글에서 그림을 그린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글을 읽어보면, 김정희가 이상적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상적은 통역관으로 중국을 가장 많이 왕래한 인물이었다. 27살 때 처음 중국을 왕래한 이후 12차례나 중국에 다녀왔다고 한다. 이상적은 김정희에게 배웠다. 그 인연을 잊지 않고 중국을 왕래하며 구한 책을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어렵게 구한 책을 유배 중인 사람에게 보내주니, 김정희는 이상적에게 감동했다. 그 감동을 <세한도>에 표현했다.

<세한도>의 중심 제재는 공자의 말이다. 공자는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라고 했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나무이지만, 사람들은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정희는 이상적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빗대어, 변함없는 마음과 자세를 칭찬했다.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린 이유를 알려주는 그 글은 편지글이다. <세한도>를 포함한 그 글 전체가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에는 안부, 알림, 부탁, 초청, 축하, 생각, 바람, 감사, 사과, 기쁨, 슬픔 등등 수많은 내용이 간략하면서도 진솔하게 담긴다. 말의 장점과 글의 장점이 있는데, 김정희가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에는 글이 가진 장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진솔함과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옛 선조들은 편지를 소중히 여겼다. 직접 만나지 못하는 사람과 통신하는 수단으로 편지가 거의 유일했다. 우편 제도가 없던 시절이므로 사람을 시켜 편지를 전달했다. 옛 선인들은 편지 쓰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초안을 잡은 후 편지를 썼고, 보낸 편지를 베껴서 보관했다. 보관했던 편지는 나중에 문집을 편찬할 때 문집에 넣었다. 옛 선인들에게 편지는 소중한 작품이었다.
글을 지도한 사람, 구양수

<구소수간(歐蘇手簡)>은 편지 모음집이다. ‘인문연구원 동고송’의 연구원 유미정은 이 편지 모음집을 번역하고 상세하게 주석을 달아 세상에 내놓았다. 유미정은 7년간 <구소수간>을 추적했다. 처음에는 <구소수간>의 원본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으나 한국과 중국은 물론, 일본과 미국까지 샅샅이 뒤져 조선본, 교감본, 주해서를 찾아냈다. ‘구소’의 문집을 뒤지며 편지글에 담긴 한 자 한 자의 의미를 밝혀냈고, 마침내 <구소수간>을 생동감 넘치게 번역하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달았다.

책 표지에는 ‘구소수간’이라는 제목과 함께, ‘중국의 대문호 구양수와 소동파의 편지글’, ‘세종이 애독한 책’이라는 설명이 있다. <구소수간>은 구양수와 소동파의 편지글이고, 조선의 4대 임금 세종이 즐겨 읽은 책이라는 의미이다. 세종은 왜 이 책을 애독했을까?

조선 시대의 최고 화가인 김홍도의 마지막 작품은 <추성부도>이다. 집안에서는 한 선비가 창밖의 둥근달을 바라보며 시를 읊는다. 집 밖에서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이 가을바람에 흔들린다. 가을 소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명작이다. 김홍도는 그림 옆에 정갈한 필체로 <추성부(秋聲賦)>를 썼다. <추성부>는 가을 소리를 듣고 느끼는 감회를 쓴 글로, 구양수가 썼다.

김홍도가 죽음을 예감하며 <추성부도>를 그렸다면, 구양수가 <추성부>를 썼을 때 입장은 달랐다. 구양수(1007년~1072년)는 52살 때 <추성부>를 썼다. 나이로는 인생의 말년인 듯하나, 이때가 구양수의 전성기였다. 구양수는 23살 때 과거 급제를 했고,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관직 생활을 했다. 47살 때 중앙 관직을 맡은 이후 10여 년 동안, 지공거를 맡아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등 황제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며 높은 관직을 맡았다. <추성부>는 지공거를 맡았을 때의 작품이다.

구양수는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에서 ‘문체 혁신’을 이룬 인물로 평가받는다. 구양수 이전에는 수식이 많은 화려한 문체가 유행했으나, 구양수는 수식 없는 간결한 문체를 주장했다. 지공거가 되면서 문장을 평가하는 기준을 바꾸자, 이후 화려한 문체가 사라지고 간결한 문체가 자리 잡게 되었다.

구양수가 지공거를 할 때 대 문장가들이 등장했다. 소식, 소철, 증공, 소순, 왕안석 등이 그때 과거 급제했는데, 훗날 그 다섯 사람과 구양수를 송나라의 6대 문장가라고 했다. 구양수는 후배 양성에 힘썼고, 문체 혁신을 위한 글쓰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구소수간>에 담긴 구양수의 편지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양수는 젊은 사람들이 인재로 성장하게 돕는 일에 열성이었다. 함께 과거 시험을 관장하던 매성유에게는 편지를 보내, “늙은이는 마땅히 길을 비켜 젊은이가 한 걸음 앞서가도록 물러설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46쪽)라며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하자고 했다. 증공이 과거에 낙제하자 편지를 보내, “올해 과정이 열렸는데 듯하지 않게 높이 뛰어오르는 것이 지체되었을 뿐이니 덕을 쌓고 뜻을 길러 더욱 큰일에 이르기를 기약하십시오”(112쪽)라며 위로와 격려를 했다. 구양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젊은이들을 이끌며 추천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구양수는 “많은 것을 보면서, 자주 글을 짓고, 깊게 생각하라”(524쪽) 라고 했다. 구양수의 글쓰기 이론이다. 글이란 “마음속이 충실히 채워져 발휘되면 지은 글이 환히 빛난다”(558쪽)라고 해서, 좋은 글은 기교가 아니라 내용에 달려 있다고 했다. 구양수는 후학들의 글을 읽고 글쓰기를 지도했다. 서무당이 보낸 글을 읽은 후, “작문의 체제란 처음엔 치달리듯 글을 짓고자 하나 오랜 후에는 마땅히 수렴하고 절제하여 간략하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네”(184쪽)라고 편지를 보냈다. 절제된 표현으로 간략하게 서술하라는 조언이었다.

글을 사랑한 사람, 소동파

소동파(1036년~1101년)는 46살 되던 해에 유명한 <적벽부>를 지었다. 소동파는 <적벽부>에서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생각하며 인생의 허무함을 말했다. 당시 소동파는 황주에 유배되어 있었다. 조정을 비방하는 시를 지었다는 죄목이었다(‘오대시안 사건’). ‘오대시안 사건’은 소동파에게 충격이었다. 한 벗에게 보낸 편지에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글을 쓰다 보면, 나를 증오한 자들에게 해석 거리나 될 것입니다”(462쪽)라고 했다. 글로써 명예를 얻었는데 글로써 화를 입었다.

소동파는 구양수에게서 배웠다. 22살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왕안석 등이 추진한 신법을 둘러싼 당쟁이 심했다. 소동파는 신법에 반대했고, 신법 추진 세력이 권력을 잡자 정치적 고초를 겪었다. 두 차례에 걸쳐 16년 동안 유배되었고, 유배에서 풀려 귀향하던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유배 생활은 쉽지 않았다. 홀로 외롭게 살며 스스로 농사를 지어 생활해야 했다. 벗들에게서는 편지조차 끊어졌다. 마지막 유배지인 해남에 가면서는, “이제 해남에 당도하면, 먼저 관을 만들고, 다음으로 곧 묘를 만들게 하고, 이어 여러 아들에게 줄 편지를 남기려 합니다”(493쪽)라고 편지를 썼다.

글로써 화를 입었으니 글을 멀리해야 한다. 한 벗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붓을 잡지 않아야 거의 화를 면할 것이라고 여깁니다”(462쪽)라고 했다. 진태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다시는 문자를 짓지 않고 스스로 몸가짐을 엄격히 했다”(449쪽)라고 했다. 그러면 무엇을 할까? “문을 닫고 외부와의 만남도 끊은 채, 놀란 혼백을 거두고, 물러나 엎드려 깊이 생각하며 스스로 새롭게 하는 방법을 찾겠다”(575쪽)라고 했다.

소동파가 글을 멀리할 수 있을까? 소동파는 글을 떠날 수 없었다. 많은 문인이 자신의 글을 평가해달라고 글을 보내왔다. 새로운 방법을 찾겠다는 결심도 잠시, 소동파는 글을 읽고 평가하고 썼다. 글은 소동파가 어려운 유배 생활을 견디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소동파는 글을 사랑하고 글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글의 보물상자, <구소수간>

세종대왕은 <구소수간>을 애독했다고 한다. <세종실록>의 기록을 보자.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하지 않아서, 일찍이 경미한 병환이 있을 때도 오히려 독서를 그치지 아니하므로, 태종께서 작은 환관을 시켜서 그 서책을 다 가져다가 감추게 하고 다만 <구소수간>만을 곁에 두었더니, 드디어 이 책을 다 보시었다. (<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2월 23일)

세종대왕은 대제학 윤형과 대화하며, <구소수간>을 30번 읽었다고 했다(<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6월 13일). 세종대왕이 <구소수간>을 애독한 이유에 대해, 유미정은 “불후의 작품을 남긴 두 거장의 창조적 정신과 고난 속에서도 생의 활력을 벗들과 나눈 인간적 정감에 감동”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구소수간>에서 창조적 정신, 생의 활력, 인간적 정감을 만날 수 있으나, 편지글이란 점에서 내용 이해가 쉽지 않다. 편지는 주고받기 마련이다. 상대가 보내온 편지글이 없다면, 그 편지에 답장으로 보낸 편지글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유미정은 구양수와 소동파의 문집을 파헤치며 그 어려운 작업을 해냈다. 상세한 설명으로 두 거장의 정신과 인간적 정감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구양수와 소동파는 최고의 문장가였다. 그런 문장가들의 문체를 살려서 번역하는 작업은 더더욱 어렵다. 유미정은 그 작업에도 성공했다. 생생한 문체로 두 거장의 글을 살려냈다. <구소수간>에는 글쓰기 선생 구양수의 진솔하면서 간결한 글이 있다. <구소수간>에서 글을 사랑한 사람 소동파의 공정하고 조화로운 글을 만날 수 있다. <구소수간>은 글의 보물상자다. 유미정의 역주 덕분에 보물상자를 열 수 있게 되었다.

 

출처프레시안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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