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왜 300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는가?! (아버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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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바꾼 것들 가운데 하나가 영화 상영목록이다. 예전에는 충무로와 할리우드 영화가 압도적이었는데, 요즘엔 국적이 상당히 다채롭다. 슬로단 고르보비치 감독의 <아버지의 길>도 그렇다. 세르비아 영화를 국내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선지 관객은 별로 들지 않았지만, 영화를 실제로 본 느낌은 강렬했다.

1972년에 유고슬라비아에서 출생한 고르보비치 감독은 <빗나간 과녁> (2002), <트랩> (2008), <써클즈> (2013) 같은 영화를 연출했다. 특히 <트랩>으로 ‘충무로 국제영화제’ 대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각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들의 수술비를 위해 청부살인을 고민하는 지극히 도덕적인 인간 믈라덴의 내적 갈등을 다룬 영화다.

<아버지의 길 Put otca> 원제는 그냥 <아버지 Otac>다. 수입사에서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고 제목을 바꾼 듯하다. 장자이 데뷔작인 <집으로 가는 길>의 원제는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였다. 그런 제목으로는 까다로운 한국 관객의 취향을 맞출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제목을 바꾼 게다. 이런 개명(改名)이 성공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가장 니콜라의 선택

얼룩덜룩한 옷을 걸친 아낙이 딸의 손을 잡고 아들과 함께 공장으로 들어선다. 수위에게 제지당한 여인이 큰소리로 외친다. 남편의 밀린 2년 치 임금 체불(滯拂) 때문에 온 가족이 굶주리고 있다. 배가 너무 고프다. 돈을 주지 않으면 분신하겠다고 절박하게 외친다. 하지만 쏟아지는 햇빛 아래 들려오는 대답은 메아리밖에 없다.

같은 시각 그녀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 니콜라 스토이코비치는 벌목 현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그에게 무엇인가 알려주는 동료. 니콜라가 일손을 내려놓고 달리기 시작한다. 그가 도착한 곳은 병원. 화상을 입은 아내가 붕대로 몸을 감싼 채 누워 있다. 영화 <아버지의 길>은 이렇게 우울하고 참혹하게 시작한다.

세르비아의 후미진 농촌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이 외연을 넓혀간다. 그것은 니콜라가 경험하는 세르비아의 지방관리인 사회복지과 센터장의 부당함 때문이다. 엄마의 분신 현장에 있던 아이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센터장은 아이들을 위탁 부모에게 넘긴다. 그리고 니콜라에게 까다로운 양육조건을 제시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빠듯한 니콜라가 무슨 수로 센터장의 조건을 충족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니콜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아버지로서 니콜라는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센터장은 이런저런 구실로 아이들을 넘겨주지 않는다. 니콜라의 선택은 단순하다. 사회복지부 장관을 직접 만나는 것이다.

아버지 니콜라의 여정

세르비아의 오지에서 수도인 베오그라드까지 300Km의 길을 걸어가기로 마음먹은 니콜라. 영화가 보여주는 상당 부분은 니콜라가 그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과 풍경이다. 그래서 영화는 로드무비의 성격을 동반한다. 니콜라가 산에서 들개들과 마주치는 살 떨리는 장면은 장발장이 디뉴의 거리에서 경험하는 장면과 비슷하다.

‘석방된 죄수, 절도죄 5년, 탈옥기도 14년, 매우 위험한 자’라는 내용이 적힌 통행증을 소지한 장발장. 술집과 여관, 식당에서 외면당하는 장발장의 바지를 한사코 물고 늘어지는 개. 장관에게 전할 이의신청서를 소지하고 무작정 길을 나선 세르비아의 니콜라. 니콜라는 돌아갈 수도, 미리엘 주교처럼 거둬주는 사람도 없다.

병원에서 니콜라가 마주친 60대 사내의 사연은 기막힌 것이다. 아들이 넷이나 되지만, 그들은 병든 아버지를 입원시켜놓고 행방이 묘연하다. 말세인 세상을 한탄하는 세르비아 노인.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병원 마당에서 흥겨운 음악이 들린다. 신혼부부를 위한 결혼피로연이 벌어지고 있다. 삶은 그래도 계속된다.

피어린 5박 6일의 강행군으로 니콜라는 베오그라드에 도달한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관료주의는 지방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쩔 도리없이 노숙을 이어가야 하는 니콜라.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누군가 그에게 따뜻한 식사를 건네고 사라진다. 허겁지겁 퍼먹다가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통곡하는 니콜라. 아버지의 신산한 길이다.

인간 니콜라의 의지

<아버지의 길>은 니콜라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세르비아의 현저한 빈부격차를 보여준다. 아름답고 풍요로워 보이는 시골 마을의 이면에 자리한 처절한 빈곤과 베오그라드의 마천루가 대비된다. 남루한 행색의 니콜라와 그의 구식 휴대전화와 우아한 자태의 고위관리와 그의 스마트폰이 대조를 이룬다. 그렇게 세상은 굴러간다.

니콜라가 아내의 손을 맞잡고 위로한다. 모든 게 잘 되리라는 남편의 확신에 아내는 감격한다. 하지만 그들은 관료주의의 벽을 아직도 모른다. 영화에서 백미는 니콜라가 아이들과 작별하는 장면이다. 아버지가 자기네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아들 밀로스는 아버지의 품을 한사코 외면한다.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고 다짐하는 니콜라.

“아이한테 손대지 마!”

사회복지과 직원들이 아들을 강제로 차에 태우려 하자 니콜라가 소리친 말이다. 심중의 크나큰 분노와 절망, 한탄과 슬픔을 오래도록 간직했으나, 꾹 참아왔던 니콜라가 한순간 폭발한 것이다. 밀로스가 직원들을 뿌리치고 달려와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여기서 영화는 니콜라가 걸었던 아버지의 길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보여준다.

니콜라가 네 개의 의자가 놓인 식탁에서 빵을 잘라 먹는다. 혼자 마른 빵을 씹는 니콜라. 그의 눈빛에 결연한 의지와 자부심 그리고 앞날의 희망이 빛난다. 언젠가 식탁에 네 사람이 앉아서 먹을 것을 나누며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날이 꼭 오리라!

글을 마치면서

<아버지의 길>을 보면서 낯설게 다가온 풍경은 니콜라가 돌아온 다음이다. 두 사람을 제외한 마을 사람 전원이 니콜라의 남루하고 보잘것없는 가재도구를 가져가 버린 상황이다. 설령 그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렇게 함부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댄다니,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나 니콜라나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가고 가져온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오르탕스 부인이 죽어가는 장면과 유사하다. 그녀가 살아있는데도 크레타 사람들은 스멀스멀 그녀의 집으로 기어든다. 그들은 하나같이 가재도구를 탐한다. 그녀가 죽자마자 그들은 승냥이처럼 괴성을 지르며 물건을 둘러싸고 아귀다툼을 벌인다. 저것이 글들의 풍습인가?!

세르비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아버지의 길>은 우리나라 아버지를 생각하게 한다. 경제권과 의사 결정권을 잃고, 서열마저 강아지나 고양이에 밀리는 아버지.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다는 나라의 무기력한 아버지와 달리 가난한 나라의 강인하고 당당한 아버지가 멋지고 부럽게 다가온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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