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 사이에서 (내가 나를 부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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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힘이 세다. 잘 만들어진 영화는 객석을 쥐락펴락한다. 눈물과 웃음, 흐느낌과 박장대소가 공존하는 폐쇄된 공간. 거기서 인간의 운명과 고단한 팔고(八苦)의 생을 돌이키는 관객. 놀라운 상상력이나 장쾌한 대작 영화가 아님에도 관객을 휘어잡는 영화가 있다. 그것도 우리처럼 소소한 인간들의 일상을 촘촘하게 들여다보는 영화.

관객이 거의 들지 않는 중국 영화 <내가 날 부를 때>를 보다가 눈물이 난다. 어린 시절 4남매를 건사해야 했던 나의 아버지 어머니의 휘청거렸을 삶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김치나 감자조림 아니면 튀각이 전부였던 도시락 반찬. 드물게 모습을 보였던 달걀 부침개. 나중에 알게 됐지만, 계란말이는 오직 둘째 아들한테만 싸주셨던 엄마.

요즘 한국인들은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에는 관심 없다. 그 시절 이야기는 ‘꼰대’들이나 하는 너스레 정도로 생각한다. 문제는 경험의 공유 여부가 아니라, 공감에 있다. 각자의 관심이 다른 곳에 있을 때, 대화는 일방통행이다. 모두가 지구는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세상. 그렇게 21세기 20년대가 쏜살같이 흘러간다.

안란의 꿈

간호사로 일하는 20대 초반의 안란은 꿈이 있다. 북경의 의과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다. 지방 도시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그녀는 지방도 싫고 간호사 직책도 싫다. 어릴 적부터 꿈꾸었던 북경과 의사 직분을 오래도록 열망하는 안란. 고등학교 시절부터 부모에게 독립하여 제 앞길을 꾸려왔던 당찬 소녀 안란. 그녀에게 가혹한 시련이 닥친다.

어느 날 문득 찾아든 부모의 사고사. 일하느라 받지 못한 전화에 자책하는 그녀.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부모가 남긴 일점혈육이 그녀에게 덤으로 남는다. 유치원에 다니는 코흘리개 남동생이다. 죽음이 무엇인지, 왜 엄마와 아빠가 집에 없는지 모르는 철부지 동생. <내가 날 부를 때>는 이런 상황과 마주해야 하는 청춘의 이야기다.

적어도 5년 넘게 마음속으로 품어왔던 북경과 대학원 그리고 의사의 삶. 그 모든 것이 불현듯 들이닥친 사고로 물거품으로 돌아갈 지경이다. 당신이라면 어린 동생을 맡아 기르겠는가, 아니면 동생을 버리고 학업과 미래가 보장된 북경으로 떠나겠는가. 여기까지만 보면 영화는 20대 청춘의 꿈과 시련을 다룬 성장영화처럼 보인다.

안란과 남동생

안란은 동생을 맡아서 기를 생각이 전혀 없다. 동생을 기른다는 것은 자신의 꿈과 미래를 송두리째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녀에게 동생은 친숙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안란에게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아픈 추억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내가 날 부를 때>에서 잘 만들어진 장면 가운데 하나가 이 지점이다.

작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소녀가 진홍색 치마를 입고 해맑게 뛰놀고 있다. 아파트 문이 급히 열리고 여성이 들이닥치더니 말한다. “절름발이가 아니잖아요?!” 문을 박차고 나가는 여성과 뒤를 따라가며 통사정하는 안란의 아빠. 낭패한 표정이 역력하다.

“왜 치마를 입고 있는 거야? 치마를?!” 아빠가 회초리를 가져와 그녀의 볼기짝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한다. 보다 못한 엄마가 아빠를 가로막는다. “난 절름발이가 아니에요!” 매를 맞던 안란이 고개를 빳빳이 들면서 아빠한테 당차게 대든다. 1가구 1자녀 시대의 가슴 아픈 풍경이다. 아들 보려고 안란을 장애인으로 둔갑시킨 아버지.

중국에서 두 자녀 출산이 전면 허용된 것은 2016년의 일이다. 유치원 다니는 남동생과 간호사로 일하는 안란의 나이 차가 그토록 큰 까닭이 여기 있다. 어려서부터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안란이 늦둥이로 태어난 동생을 서먹서먹하게 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 각자는 자신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누나와 여성의 이중고

고모가 경영하는 가게의 2층 내실. 두 딸의 어머니이자 위중한 산모 때문에 사람들과 한바탕 야단법석을 벌인 안란과 고모가 마주 앉아 있다. 수박화채가 담긴 그릇을 앞에 둔 안란. 고모는 자른 수박을 우걱우걱 먹는다. 장식장 선반에 마트료시카 인형이 몇 개 있다. 고모가 자신의 남동생이자 안란의 아버지와 얽혔던 지난날을 돌아본다.

“어릴 적에 모기 때문에 잠에서 깼는데, 너희 할머니가 네 아빠에게 수박을 주면서 누나 몰래 빨리 먹으라고 하더라. 나는 러시아어과에, 네 아빠는 전문대에 같은 해에 합격했어. 할머니는 가정형편 때문에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고 하셨지. 나는 한 달에 50위안을 벌어서 네 아빠 학비에 보태라고 15위안을 매달 내놓았다. 내가 누나니까!”

안란이 수박을 쑤셔 넣듯이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몇 입이나 먹었을까, 고개를 처박고 울기 시작하는 안란. 여자니까, 누나니까 아주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고모의 신산한 인생. 그래서 그런지 고모는 안란이 동생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안란은 고모의 그런 삶에 동의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 “난 고모처럼 살기 싫어요!”

자본주의 첨단을 걷는 21세기 20년대 중국에 담겨있는 지난날의 상처가 맨살을 드러낸다. 공산당의 섣부른 산아제한정책과 왕자병에 걸린 사내아이들, 의료사고를 돈으로 보상받으려는 환자와 과다처방을 전혀 반성하지 않는 의사, 관계를 통해서 입신출세를 보장받으려는 청춘.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안란은 꿈의 도시 북경으로 가고 싶은 것이다.

동생을 어찌할 것인가?!

안란이 샤워하다 말고 흐느껴 운다. 목욕물과 눈물로 범벅되는 안란, 그녀는 아까 있던 일을 기억하며 숨죽여 운다. 말썽이나 피우고, 제멋대로이며, 하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은 끝까지 관철하려는 개차반 어린 동생. 그를 차마 놓아버리고 싶었던 안란. 목놓아 누나를 부르며 지하철 구내를 뛰어다니는 동생. 숨어서 동생을 바라보는 안란.

안란의 손에 들려있는 아버지의 청원서에 적힌 글귀는 처절하다.
“제 딸은 장애인입니다. 두 번째 출산을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바람 몰아치는 공원묘지에서 청원서를 발기발기 찢어버리는 안란.
“나는 엄마 아버지에게 잘했다는 얘기를 듣고 싶었어요! 정말 보고 싶어요!”

안란이 합의서를 앞에 두고 앉아 있다. 그녀가 찢어버린 청원서에 아버지의 서명이 적혀 있는 것처럼 그녀가 서명하면 상황은 종료된다. 베란다에서 누나를 흘깃 바라보는 동생, 과연 안란은 저녁 비행기 편으로 북경으로 날아갈 것인가?! 그리하여 다시는 동생과 만나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것인가?! 동생의 팔을 놓을 것인가, 끝까지 붙들 것인가!

글을 마치면서

오전 10시 15분에 시작한 영화가 순식간에 작별을 고한다. 127분의 상영시간이 전혀 길지 않게 느껴진 게 나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몹시 가난했던 우리나라의 1960-70년대가 자꾸 겹쳐져서 더욱 몰입했는지도 모르겠다. ‘우골탑’ 신화가 일반화되어 장남에게 모든 걸 몰아주었던 시간대. 산업화 시대가 불러온 구슬픈 세태풍경이 중국에서 재연되다니!

여성이라는 이유로, 누나이자 여동생이기에 온갖 불이익과 불평등을 참아야 했던 지난 세기의 누이들과 누나들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제 그들의 머리에도 하얗게 서리가 내리고,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공순이와 식모와 안내양의 고단한 일상과 사라진 꿈과 염원은 어디서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가?!

오빠이자 남동생이라는 이유로 우선권을 부여받았던 남성들은 영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그래서 조금은 아쉽고 허탈했다. ‘이대남’과 ‘이대녀’ 갈등을 조장하고 부추기는 언론들의 행태가 더욱 괘씸하게 다가온다. 남성과 여성은 갈등과 대결이 아니라,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운명 공동체다. <내가 나를 부를 때>를 보면서 떠오른 소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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