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찮은 기회에 접했던 <화엄일승법계도>. 의상(義湘)은 화엄종의 대가이자 스승인 지엄(智嚴)스님의 지시에 따라 <화엄경> 80권을 줄여서 <대승장>을 저술한다. 하지만 지엄은 각고의 노력으로 의상이 지은 <대승장>을 화로에 던져 불살라버린다. 하지만 화로에는 210글자가 불타지 않고 남는다. 지엄이 그것을 의상에게 주어 문리(文理)가 통하도록 한 것이 7언 30행 210자로 전해지는 <화엄일승법계도> 혹은 <법성게(法性偈)>다.
얼마 전에 210자 전체의 뜻을 이해하고, 모든 문장을 한문으로 기억하여 쓸 수 있게 되었다. 아침에 15분 내외의 시간을 들여 <화엄일승법계도>를 써보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블로그에도 ‘법성원융무이상’으로 시작하는 <법성게>를 소재로 글을 남기기 시작한다. 그것을 마무리한 것이 어저께 일이다. 마지막 문장은 ‘구래부동명위불’이다.
좋은 글이나 시구 혹은 표현은 기억해야 제맛이 나는 모양이다. <화엄일승법계도>를 통째로 기억하기 전에도 몇몇 문장은 기억한 일이 있다. ‘일중일체다중일’이나 ‘일미진중함시방’ 같은 구절이 그렇다. ‘하나에 전부가 들어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들어있다’는 것과 ‘티끌 하나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표현이 그러하다. 하나와 전체, 티끌과 우주를 관통하는 지적 통찰!
분별이 심해지는 탓에 분별하되, 차별하지 말자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나이 먹는다는 일은 이래서 우울하다. 대상을 시시콜콜 따지고 분류하면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선과 악을 분별한다.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마음이 그리로 향한다. 공자가 ‘이순(耳順)’을 설파한 것에는 까닭이 있는 게다.
<화엄일승법계도> 가운데 특히 마음에 와닿는 글은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본성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 따라 이룬다는 의미다. 누구나 타고난 저마다의 본성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한사코 지키려고 하거나, 그것에 의지하고자 한다. 왜냐면 타고난 본성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며,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의상은 그 반대를 설파한 것이다. 타고난 본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연이라는 말이다. 인연을 다른 말로 풀면 연기(緣起)가 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기에 저것도 소멸한다는 인과율이다. 우리의 생성 원인도 인연이자 연기이며 인과율이다. 부모님의 인연 따라 우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자신의 의지와 욕망으로 대상이나 관계를 결정하려고 한다. 강력한 본성이나 특출한 능력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볼멘소리와 투쟁과 아수라판이 벌어진다. 성취되지 못한 욕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어리석음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핵심은 본성을 누르고 인연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사랑이든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욕심을 내려놓고 인연이 오기를 차분히 기다려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창밖 천둥소리가 비구름 부른다.
<경북매일신문>, 2021년 7월 14일자 칼럼 ‘파안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