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악한 패륜의 인종청소를 고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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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정치와 역사, 사회와 문화를 폭넓고 깊이 있게 알고 있다면 그만큼 영화를 올바르게 수용할 수 있다.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의 신작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복잡다단한 유고연방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유고연방과 정치 지도자 요시프 티토를 알아야 한다.

유고연방은 2차 대전 당시 유고의 전설적인 레지스탕스 요시프 티토의 주도로 창설되었다. 유고연방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의 6개 공화국과 코소보 및 보이보디나 2개 자치주로 구성됐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하고,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진 1980년대 말부터 연방해체가 가속화된다.

무슬림 43%, 가톨릭을 믿는 코로아티아계 18%,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계 35%로 구성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2월 29일 연방에서 독립을 선언한다. 세르비아계가 이에 반대하여 4월 1일부터 내전의 길로 들어선다. ‘보스니아 내전’이라 불리는 전쟁이 3년 8개월 이어지면서 25만의 사망자를 비롯한 잔인한 인종청소가 자행되었다.

영화의 시공간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보스니아 내전이 3년을 넘어선 시점인 1995년 7월 11일에 시작한다. 지긋지긋한 전쟁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보스니아의 마을 스레브레니차가 공간적 배경이다. 여기 주둔하고 있는 유엔 평화유지군 사령관은 네덜란드 출신 카레만스 대령이다. 그는 마을 주민들의 안전과 스릅스카 군대를 향한 유엔의 포격을 확약한다.

세르비아계 자치공화국인 스릅스카의 부대 지휘관 라트코 믈라디치는 스레브레니차 마을 입성을 눈앞에 두고 협상을 원한다. 보스니아의 무슬림들을 철저하게 짓밟으려는 야심을 감춘 채 그는 카레만스에게 마을의 협상 대표 3인을 보내라고 통지한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약속한 스릅스카 부대를 겨냥한 공습도 마을의 안전도 사라져버린 상황.

스릅스카 민병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마을로 진군하자 사람들은 혼비백산 탈출을 감행한다. 그들의 목적지는 당연히 유엔 평화유지군 영내다. 무려 2만 5천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얻고자 유엔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영화의 주인공 아이다는 교사 출신 여성으로 평화유지군 통역으로 일하고 있다. 수많은 난민 대열에서 가족을 찾아 헤매는 아이다.

아이다의 가족사

고상하되 주름진 얼굴의 여성이 낡은 공동주택의 계단을 오른다. 초인종이 울리고 젊은 여성이 나온다. 자신의 이름 아이다 셀마나기치를 말하는 여인. 젊은 여성이 화들짝 놀란다. 이윽고 그녀가 건네는 여성용 가방 하나. 우리는 그 지점에서 집주인이 오랜 세월 집을 비웠음을 알게 된다. 세월의 공백을 딛고 귀환한 여인 아이다.

아이다의 남편 니하드 셀마나기치는 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인물로 독일어까지 구사한다. 조용하고 나약한 성품의 니하드와 적극적이고 활달한 아이다. 그들 사이에는 음악도가 꿈인 20대 초반의 장남 함디야와 전쟁으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17세의 차남 세요가 있다. 영화는 이들 가족의 삶이 겪어야 하는 변화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믈라디치의 거침없는 진격과 무차별적인 폭력에 사람들이 몰려든 평화유지군 사령부의 수용 가능 인원은 제한적이다. 철조망과 차단봉 사이를 두고 갈라지는 사람들. 아이다는 남편과 함디야를 가까스로 영내로 데려온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긴급상황에서 아이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가족의 생사에 개입한다.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여성이자 어머니 그리고 아내의 눈으로 본 전쟁을 들여다본다.

수용소 안팎의 풍경

만삭의 여인이 배를 어루만지고 있다. 출산이 임박해 보인다. 모두가 걱정 근심으로 밤을 지새우는 판국에 여인의 자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양수가 터졌어요!” 하는 다급한 목소리. 우리가 바라지 않는 돌발상황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왜 하필이면 어려운 조건에서 아기는 세상으로 나오려 했을까. 그런 의문을 해결하기 전에 아기가 나온다.

화장실조차 사용할 수 없는 난민들의 다급한 상황이 곳곳에서 들리고 보인다. 땡볕에 노출된 2만의 바깥사람들이나, 영내로 들어온 5천 명의 조건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에게 주어진 제3의 선택지는 숲으로 도주하는 일이다. 그러나 아이다는 극구 반대한다. 세르비아 민병대에게 붙들려 절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여기저기 아이다의 이름을 부르면서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목소리를 아이다는 겨우 외면하고 통역과 가족에 몰두한다. 아이다는 믈라디치가 무슬림 인민들을 학살하고 있다는 긴급한 전갈을 카레만스 대령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그는 부하인 소령에게 가라는 말만 던질 뿐 문도 열지 않는다. 이런 처절한 상황을 영화는 가감 없이 보여준다.

믈라디치, 그는 무엇을 약속했는가

니하드와 차밀라, 무하렘 세 사람이 스레브레니차 마을 대표로 선발되어 믈라디치 진영으로 간다. 원기 왕성하고 욕망으로 그득한 믈라디치가 대표들에게 공언한다.

“남자의 이름으로, 사령관의 이름으로 주민 전원의 안전을 보장한다!”

유엔 평화 유지군의 주민 호송계획까지 동의하는 믈라디치. 그들을 안전하게 후송하는 것이 마치 하늘이 주신 과업인 것처럼 호탕하게 떠벌리는 믈라디치. 그들을 데려갈 버스가 도착하고, 무슬림들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 호송차에 오른다. 어머니와 아들, 남편과 아내, 애인들의 무차별적인 작별이 강제되고 버스가 방향을 잡는다.

우리의 아이다는 아들들과 남편을 유엔군 명단에 넣어 이동하고자 한다. 하지만 사령부는 요지부동이다. 오직 아이다만이 자기들과 함께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외도 성립하지 않는 살벌한 전쟁의 논리가 아이다를 절망으로 인도한다. 과연 믈라디치는 남자와 장군의 이름으로 내건 약속을 실천할 것인가?!

어린이 재롱잔치와 학살의 기억

오랜만에 스레브레니차 마을 사람들이 초등학교 강당에 모여든다. 어린이들의 재롱잔치 한마당이 열린 것이다. 손으로 낯을 가렸다가 얼굴을 보여주는 어린이들의 피부색과 표정과 눈빛이 얼마나 다른지, 즈바니치 감독이 말하려는 바가 드러난다. 인간들의 얼굴과 표정과 눈빛은 모두 서로 다르다. 우리 마음이 서로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학교 강당이 어딘지 모르게 친숙하게 다가온다. 무슬림 남성들이 끌려가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총탄 세례를 받고 죽어갔던 바로 그곳이다. 영화는 자막으로 그 숫자가 10대 소년들을 포함하여 8,572명이라고 알려준다. 스레브레니차 마을 한 군데서만 일어난 세르비아계의 잔악한 인종청소로 죽어갔던 사람들이 무려 8,572명이라니.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학교에 다녔으며, 같은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이 종교와 습속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학살자가 되고, 인종청소 대상이 되었던 참혹한 보스니아 전쟁. 그것이 불과 26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평화유지 임무를 맡은 유엔군의 무능과 무기력 역시 영화가 여러 차례 강조하는 대목이다.

<쿠오바디스, 아이다>가 어린이 잔치마당으로 끝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다가올 미래 세대의 주역인 어린이들의 앞날에 끔찍한 전쟁과 살육의 그림자는 지워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기획하자는 것이다. 과거를 잊지 말고 기억하여 인종청소라는 사악한 행악질과 영원히 작별하자는 것이다. 환하게 웃는 학부모 얼굴들이 화면을 채운다.

영화는 놀라운 장면으로 우리를 학살의 기억으로 데려간다. 인종청소로 죽어간 사람들의 시신을 발굴하는 현장과 해골로 남은 사람들을 안치하는 공간을 보여준다. 수습된 유골과 소지품으로 가족을 확인하려는 여성들의 조심스러운 발걸음과 통곡이 이어진다. 아이다가 오열하며 주저앉는다. ‘아이다,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쿠오바디스,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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