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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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고 지는 계절에 길나서는 일은 축복이다. 울산 친구가 잠시 기거하는 순천을 목적지로 길 떠난다. 서울에서 오는 친구를 순천역에서 마중하여 상사면으로 동행한다. 그 좋던 날이 연이틀 비와 구름과 습기로 촉촉하다. 상사호(上沙湖) 벚꽃길에 넘치게 떨어진 희고 분홍의 이파리들이 우리 발목을 잡는다. 낙환들 꽃이 아니겠느냐, 하는 심정으로 녀석들을 본다.

여정은 선암사로 이어진다. 태고종 본산으로 승선교(昇仙橋)로 유명한 선암사.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승선교는 언제 보아도 아름다움과 온유함으로 질리는 법이 없다. 반원형의 원만한 모습은 태생적으로 날카로운 나의 부족한 면모를 여지없이 일깨운다. 비는 혹은 굵게 혹은 가늘게 내리기를 되풀이하면서도 멈추는 법이 없다. 그래도 어이 하랴, 이 좋은 봄날의 향연을!

절집을 돌다가 각황전 마루에 앉아 농반진반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데, 방문이 스스륵 열리더니 노스님이 나오신다. “소란 피워 죄송합니다.” 하는데, 온화한 낯빛의 스님은 싫은 기척이 없다. 그래서 “이런 고적함을 어찌 견디십니까?” 하고 여쭈었다. “그저 인내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지요.”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단양 사인암에서 만난 젊은 납자(衲子)의 대답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고독이란 수행자의 도반인 모양이다.

우리는 순천만 갯벌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주말이지만 코로나와 봄비로 습지를 찾은 사람은 많지 않다. 고요함과 넉넉함을 누릴 수 있는 행운에 감사드리며 뻘밭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칠게와 짱뚱어가 돌아다니는 회색의 두툼한 뻘밭에 뿌리를 내린 갈대는 아직도 지난 계절의 호흡으로 살고 있다. 숱한 생명이 영역을 구획하여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장면은 평화롭고 여유로운 것이었다.

친구가 낙조를 완상한다는 해변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런 날에 낙조는 불가능하지만, 분위기는 느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썰물로 드러난 작은 섬 좌우로 비어버린 바다는 적막하고 쓸쓸했다. 하지만 비어있음과 적요로 인한 처연한 아름다움은 상념을 일으켰다 무너뜨리기를 반복한다. 그래, 망상과 몽상으로 점철된 일평생과 어찌 쉽게 작별할 수 있겠는가?

귀로에 들른 한식당의 은성(殷盛)한 실내등과 화사한 분위기는 술과 음식을 구하는 길손에게 오아시스처럼 느껴진다. 아, 그런데 희한한 녀석이 시중드는 아주머니와 함께 오는 게 아닌가! ‘아니, 저 녀석은 뭐지?’ 말끔하게 생긴 인공지능 로봇이 반찬이며 술병과 그릇을 빼곡하게 담고 아주머니를 따라오는 것이다. “저,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나의 부탁으로 로봇은 오던 길 돌리더니 다시 우리 곁을 찾는다.

인구 28만의 순천에서 진귀한 구경을 한 게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변화의 실마리를 500리 너머에서 찾았으니, 멀리 와서 답을 찾은 셈이다. 지엄 화상을 만난 의상의 처지라고나 할까? 봄날의 순천 기행은 이렇게 깊어만 간다.

<경북매일신문>, 2021년 4월 7일자 칼럼 ‘파안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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