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 다듬어진 산

<보스턴에서 온 편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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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트마운틴스에 올라

보스턴칼리지 교수 김선호

보스턴 칼리지에서 가을학기 강의를 마칠 즈음이면 내게도 깊은 겨울이 시작된다. ‘보스톤의 겨울’ 하면 영화 러브스토리의 낭만적인 ‘눈싸움(snowball fight)’이 떠오르기도하지만 사실은 매서운 추위와 폭설이 겨울 내내 이어진다. 쏟아지는 눈과 한파로 인근의 ‘찰스강’은 꽝꽝 얼어붙고 수업은 휴강되기도 한다. 오늘도 정오부터 심한 눈보라가 몰아친다는 예보가 있었다.

어릴 적 겨울, 고향의 안마당에 눈송이가 나풀거릴 때면 “하늘나라 선녀님이 송이송이 하얀 눈을 자꾸자꾸 뿌려줍니다.”며 동심에 젖어 노래하곤 했었다. 하지만 스산하고 황량한 보스턴의 겨울은 웬지 그런 정겨움을 느낄 수가 없다. 학생들이 떠나고 없는 무용실 창밖으로 보스톤의 겨울 풍경을 바라보자니,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 덮인 하얀 산, 화이트마운틴스로 어느 새 나는 향하고 있었다.

 

– 겨울 ‘화이트 마운틴스’의 산 속 풍경

 

‘화이트 마운튼스’는 4천피트(1,219m)가 넘는 봉우리만 무려 48개가 있다. 화이트마운틴은 말 그대로 ‘하얀 산’이다. 하얀 산으로 말하자면 알프스의 몽블랑도 있고 우리의 백두산도 있다. 내가 ‘화이트 마운튼스’를 자주 찾는 이유 중 하나는 몽블랑이나 백두산(白頭山)처럼 ‘하얀 산’이라는 이름을 앞에 걸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Alps의 최고봉 몽블랑, Mont은 Mountain이고 Blanc은 White이다)

이곳의 봉우리들 중에는 미국 대통령의 이름이 명명된 산들이 많다. ‘프레지덴샬 레인지’에서 가장 높은 ‘마운틴 워싱틴’은 6,288 피트(1,916m)로 우리의 지리산 정상과 비슷하다. 겨울이면 툰드라 기후를 제대로 체험 할 수 있어 사람들은 이곳을 즐겨 찾는다. 이 산은 융기하던 당시의 날카롭던 능선을 빙하가 깎아 다듬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점차 완만해지면서 지금은 그 부드러운 능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은 꼭 학문을 연마할 때만 쓰이는 낱말은 아닐 것이다. 많은 시간을 걸려 갈고 닦아 이 아름다움이 조형되었으니 ‘화이트 마운튼스’도 절차탁마의 한 예가 되는 셈이다. 미국으로 건너와 본격적인 무용예술을 공부하고, 뉴욕에서 예술단을 이끌 때, 나는 온갖 어려운 일들을 혼자 치러야했다. 실패로 인한 좌절감도 많았지만 매번 꿋꿋하게 이겨왔던 것 같다. 대기만성, 꽃도 늦게 핀 꽃이 아름답다고 하지 않던가! 가만 생각해보니 저 산의 외형마냥 완만하고 부드러운 성취를 이루려고 나만의 길을 걸어온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프레지덴샬 레인지 (Presidential Range) 10월 중순이면 화이트 마운튼스의 고봉들은 하얗게 변한다. 이름 그대로 하얀 산이다.

 

발걸음을 떼어 산길을 따라 가다 서남쪽 루트로 올라서 마운튼 워싱턴을 바라본다. 능선의 흐름과 곡선이 내 고향 광주의 무등산과 비슷하다. 순간 학창시절 추억들이 떠오르면서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힌다. 무등산, 어머니처럼 포근하여 넉넉하던 곳, 원효사 계곡의 초입에 들어서면 졸졸 흐르던 계곡물과 계곡 위 오솔길을 찾아 오르던 토끼등과 중머리재. 장불재를 돌아서면 시원하게 펼쳐지던 저 아래 동네의 아기자기한 모습들이 보였고, 아! 세인봉의 바위와 소나무도 잘 있는지. 언제나 다시 갈 수 있으려나. 소담하고 정감어린 추억들이 떠올라 가슴 속이 다시 잔잔해졌다.

‘화이트 마운틴스’는 흥미로운 역사와 위험한 날씨 이야기도 간직하고 있다. 산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山群에서 기후가 수시로 바뀐다. 여기에다 미국 서쪽과 남쪽의 기류마저 이곳을 통과하니 날씨는 변덕이 죽 끓듯 하여 짧은 시간 동안 두려운 상대로 바꾸어질 때가 많다. 정상부에는 기후 관측소가 있다. 1934년에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바람이 불었다는 기록이 있다. 최저기온이 –46C로 기록된 적도 있다. 1969년에는 하루 적설량이 49.3인치(1.25 미터)에 이르러 이곳이 ‘세계 최악의 날씨를 기록한 곳(Home of the World’s Worst Weather)’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프레지덴샬 레인지의 최남쪽 봉우리 마운트 피어스(Mt.Pierce)에서 북쪽을 향해 찍은 정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마운튼스’의 설산을 보러가는 일은 겨울이 내게 주는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이다. 보스턴을 떠나 이곳에 도착하면 먼저 하얀 산봉우리들이 빛을 발하며 나를 반긴다. 그리고 산을 오르는 순간부터 나는 설산이 들려주는 온갖 겨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곳에는 산을 오르던 사람들의 흔적이 있고, 고향산천을 그리는 내 마음이 있다. 산을 오르면 하얀 산정 위로 나의 꿈이 떠오르고, 산을 내려가면 걸음이 어느새 가벼운 춤사위가 된다. 그렇게 나의 예술 창작에 열정의 불을 지핀다.

세찬 눈보라를 맞으며 봉우리에 서면 수염은 얼어붙고 얼굴엔 아무런 감각이 없지만, 가슴은 확 트여 호연한 기운이 가득해진다. 내일 나는 또 어떤 모습일까. 새 학기에 만날 나의 학생들과 무엇을 함께 호흡해야 할까. 많은 생각과 영감이 새록새록 가슴에 차오르며 ‘절차탁마’와 ‘대기만성’의 뜻을 되새겨본다. 예술혼을 불태우는 나의 학생들에게 이 두 마디 속에 들어있는 무궁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마땅할 것 같다.

 

– 마운트 워싱턴 호텔. 이곳에서 1944년에 Bretton Woods Monetary Conference 를 통해 월드 뱅크와 IMF가 발족되었다. 산행열차의 철로가 눈에 덮여 있다,

 

겨울산행 2

일어나 보니 여명은 없더라
바람은 매서웠고
얼어붙은 천지
새벽 산을 오르며 불을 켠다
손톱처럼 걸려있던 달이 아쉽고
구름사이 껌벅이는 별

눈이 내린다
바람에 칼처럼 섰다
걸음마다 내뱉는 작은 후회
오지 말 것을 그랬나?
한 걸음씩 오르고

계속 오르고
한숨소리 섞일 쯤
눈에 들어오는 풍경
온통 안개다
뿌연 겨울 산

나는 왜 여기 와 있지?
자꾸 미끄러진다
미끄러지고 넘어질수록
마음엔 불이 붙는다.
오름이 삶이 되고
삶이 불이 되는 순간!
염원에 불을 지피고
안개를 발아래 두니
눈보라 속으로 솟아오르는 나의 팔다리가 낯설고
수염이 얼어붙고
눈꺼풀은 타는 듯한데
폭포처럼 휩쓸며 지나가는 하얀 반란
발을 헛딛는 아찔한 추락

마음이 탄다.
타다가
훨훨 타다가
집이 그립다
해가 뜨는지 지는지 분간할 수 없다
하얀 산
하얀 하늘
고향집이 그립다
하늘도 땅도 마음도 하얀 이곳
돌아 내려가니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나무 한 그루 팔 펼치고 서 있다.

 

-최고봉인 마운트 워싱턴이(Mt.Washington) 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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