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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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추위가 제법 차갑게 느껴지던 지난 해 2020년 11월 7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105번지에 있는 전태일기념관에서는 한 작고 아름다운 합창이 이뤄졌다.
1970년대 민주노조의 상징이던 청계노조 조합원들의 친목회인 청우회가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가진 모임이었다. 적게는 16살부터, 많아야 20대 중반의 나이에 청계노조 조합원이 되어 엄혹한 군사독재와 싸우느라 수도 없이 연행되고 감옥살이를 하던 그들은 이제 대부분 6,70대 노년이 되어 있었다.
추위보다 더 매서운 코로나의 위협 속에 마스크를 쓰고 모인 40여 명의 청우회원들은 간소한 기념식을 마친 후 윗층에 마련된 전시장에서 청계노조 관련 자료들을 둘러 보며 옛날을 회상했다.
이때 문득, 벽에 걸린 청계노보 앞에 선 여성 회원들이 노보에 적힌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가하던 대중가요에 가사만 바꿔 만든 ‘노동소녀’라는 제목이었다.

공기 탁한 평화시장 누가 누가 일하나
샛별같이 아름다운 노동소녀 일하지

억압받고 착취받는 우리 우리 노동자
기업주는 회개해서 노동조건 개선해

경찰관은 하루 속히 우리 교실 내놓고
죄 없는 우리 동지 어서 어서 석방해

샛별같은 소녀들이 노동교실에서 공부하며 불렀던 노래였다. 긴 세월이 지나 다시 부르건만 그때의 감성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두세 명이 시작한 노래는 네 명, 다섯 명으로 늘어나, 이윽고 전시장의 여성조합원들 모두가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는 이들도, 듣는 이들도, 눈물을 감출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합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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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팔순으로, 이날의 참석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박명옥 씨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에 충격을 받고 자기 발로 노동조합을 찾아가 노동운동을 시작한 여성노동자의 한 명이다.
청계천이 복개되기도 전인 14살 때부터 미싱사로 일해온 박명옥 씨는 6년만에 폐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평화시장을 떠나지 못하고 일주일에 100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하고 있었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970년 11월 13일 오후, 작업장의 라디오를 통해서였다. 하루종일 켜놓는 조그만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뉴스 시간에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나온 것이다. 소문을 듣고 온 미싱사들도 말했다.
“어떤 깡패가 환경도 안 좋고 그래서 고쳐달라고 하다가 죽었대.” “누구랑 싸운 것도 아니고, 혼자 불에 타서 죽어 버렸대. 아휴, 무서워!”
다들 깡패가 불타 죽었다며 무서워 했다. 박명옥은 그러나 전태일이라는 사람에게 도리어 호감이 가는 것이었다. 청계천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15년째, 사장들의 횡포를 사무치게 겪어온 그녀였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오죽했으면 죽었을까,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며칠 후였다. 점심을 먹고 온 미싱사들이 죽은 이의 엄마가 평화시장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에 앉아 있더라는 말을 했다. 죽은 이의 친구들과 엄마가 시장 옥상에 무슨 사무실을 차리려는 데 잘 안 된다는 것이었다. 타고나기를 인정이 많은 박명옥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그렇게 죽었다면 우리 엄마가 얼마나 슬퍼할까?’
혼자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정말로 검은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쪽진 머리를 한 자그마한 40대 여인이 계단에 앉아 무릎에 머리를 박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이소선 어머니였다. 박명옥 씨는 조용이 곁에 앉아 여인의 등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드님을 그렇게 잃으셔서 얼마나 기가 막히세요?”
어머니의 울음 소리는 더 커졌다. 박명옥도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위로하려 애썼다.
“어머니, 그만 우시고 힘을 내세요.”
말하는데 기어이 엉엉 울음이 나왔다. 그렇게 한참이나 울다가 현장에 돌아와 일을 하고 있으려니 처음 보는 잘 생긴 청년이 찾아왔다. 박명옥이 이소선 어머니를 위로하는 장면을 지켜보다가 공장까지 따라왔다는 것이었다. 최종인이었다.
최종인은 전태일과 함께 청계천 일대 봉제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자 재단사 모임인 삼동회를 만들어 활동했던 한 사람이었다. 전태일을 비롯해 최종인, 이승철, 임현재, 김영문, 신승철, 김태원 등 삼동회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등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두 차례 시위를 주도했으나 경찰의 방해로 거듭 실패하자 끝내 전태일이 분신, 사망한 것이다.
이소선 어머니는 아들이 생명을 바쳐 요구한 노동조합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장례에 응했으나 정부와 평화시장 업주들은 장례식이 끝나자 사사건건 방해를 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이란 조합원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업주들은 노동조합을 깡패들이 하는 거라는 악선전하고 근처에도 못 가게 막으니 결성식에 필요한 최소인원도 모으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차에 자기 발로 이소선 어머니를 찾아와 위로하는 박명옥이 삼동회원들의 눈에 띈 것이다.
최종인은 자신을 전태일의 친구라고 소개하고 평화시장 옥상에 사무실을 열었으니 놀러오라고 부탁했다. 박명옥은 한가하게 놀러다닐 시간이 없다며 거절해 보냈으나, 최종인은 다음날 다시 찾아와 중요힌 행사를 하니 자리만 채워달라고 부탁을 했다. 최종인의 정중한 태도에 마음이 흔들린 박명옥은 무슨 행사인가도 모르는 채 행사에 참가하겠다고 약속했다.
행사에 가고서야 청계노조 결성식임을 알았다. 전태일 분신 2주일만인 1970년 11월 27일이었다. 노조가 뭔지도 전혀 모르는 채 운영위원을 맡은 박명옥 씨는 결혼을 하게 되는 1977년까지 부지부장 등으로 활동했으며 건강이 허락한 70대 나이까지 봉제노동자로 일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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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청계노조가 자리잡는 과정에는 박명옥 씨와 같이 자발적으로 노조에 가입해 활동한 여성 노동자들이 큰 힘이 되었다. 살아생전 전태일과 함께 일했거나 같은 동네에 살아 잘 알고 지내던 임영란, 황명옥, 이정희, 김명례 등과 자기 발로 노동조합 사무실에 찾아온 임금자, 유정숙, 정선희, 이숙희 같은 여성 노동자가 그들이었다.
전태일 분신 당시 임금자는 16살이었다. 동문시장에서 미싱을 하고 있던 그녀는 점심 시간에 식당에서 칼국수를 사먹으려고 줄을 서 있다가 사람이 불길에 휩싸인채 뛰어다니며 소리치는 장면을 목격했다. 놀라서 달려가 보니 불에 타 쓰러진 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았고 왜 그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며칠 후, 임금자는 죽은 이의 친구라는 한 남자가 벽보를 붙이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먼저 다가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물어보았다. 삼동회원 임현재였다. 임현재는 16살밖에 안된 임금자에게 친절한 존댓말로 전태일이 나쁜 사람이 아니며, 청계천 근로자들을 위해 죽었다고 설명해주며 노동조합 결성식을 하니 꼭 와 달라고 부탁했다. 임금자는 평화시장 옥상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열린 결성식에 자진해서 참석했다. 그리고 1970년대 내내 노조에 빠놓을 수 없는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김명례는 전태일의 이웃집에 살던 당시 20대 후반의 미싱사였다. 인사성 밝은 전태일은 김명례를 누나라 부르며 잘 따랐지만,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가를 정확히 말해주지는 않았다. 분신 사건이 난 후에야 그 착하디 착한 전태일이 남을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명례는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회사도 나가지 않고 명동 성모병원으로 달려갔다.
요즘과 달리 병원 안에 장례식을 치를 공간이 없던 시절이었다. 병원에서 사망할 경우, 영안실에서 시신을 찾아 집이나 교회에 가서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김명례가 달려갔을 때, 영안실 접수대 앞의 조그만 공간과 통로에는 동네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있을 뿐, 먹을 것 하나 없었다. 병원에서는 장례를 치르지 않으니 식당도, 음식 배달도 없었다.
무엇을 도울 것인가 생각하던 김명례는 집에 가서 들통으로 가득 팥죽을 끓였다. 그리고 무거운 들통을 들고 버스를 타고 와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다음날에도 회사에 나가지 않고 다시 팥죽을 끓여 와서 나눠주는 등 영안실을 지켰다. 그리고 조합이 결성된 후에는 부녀부장을 맡아 활동하게 된다.
신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일하던 당시 22살의 유정숙도 전태일이 분신한 날을 인상 깊게 기억하는 한 사람이었다. 그날 오후, 우연히 신평화시장에 전기가 나갔다. 전등도 꺼지고 재봉틀을 돌릴 수도 없어, 어두컴컴한 공장 안에서 전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밖에 다녀온 누군가 사람이 자살했다는 불길한 소식을 전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현장 분위기가 뒤숭숭해져 다들 작업을 하지 않고 퇴근했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보다 구체적인 소식을 들은 유정숙은 전태일이란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반독재운동을 하느라 가난해진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가, 평소부터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던 유정숙이었다. 어느 날, 평화시장 옥상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노조사무실을 기웃거리다가 누군가 노동자가 찾아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이소선 어머니의 눈에 띄었다. 이소선 어머니는 얼른 문을 열고 나와 반갑게 그녀의 손을 잡아 사무실로 이끌었다.
이소선 어머니는 유정숙의 손을 잡은 채, 자기 아들 전태일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오래도록 말해주었다. 초창기 조합 사무실에는 삼동회원을 비롯한 10여 명의 남자들이 돈 한 푼 받지 않고 상근을 하고 있었는데 조합원이 없어 조합비가 걷히지 않으니 점심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이소선 어머니가 노점에서 중고옷을 팔아 번 푼돈으로 라면과 국수를 사먹기도 벅찼다. 전태일과 그 친구들, 그리고 어머니에게 감동한 유정숙은 무엇을 도울까 생각한 끝에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팔기로 했다. 식비라도 대주자는 마음이었다. 유정숙은 매일 점심 때마다 조합 사무실에 찾아가 한쪽 구석에 앉아 말없이 성탄절 카드를 그린 다음, 아침 저녁으로 시장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조합은 결성했으나 조합원은 늘지 않았다. 집행부가 조합원 가입원서를 들고 공장을 방문하면 사장들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밀어내거나 대놓고 욕설을 퍼부으며 내쫓았다. 재수없다고 소금을 뿌려대는 사장까지 있었다. 그래도 다시 찾아가 공손하게 부탁하면 어쩔 수 없이 노동자들에게 이야기를 할 기회를 주기도 했으나 노동자들도 노조를 외면했다. 조합은 깡패들이 조합비 거두어 놀고 먹으려고 하는 단체라느니, 조합원이 되면 조합비를 떼이고 갑근세도 내야 한다는 사장들의 악선전 때문이었다.
성탄절 주간이 시작될 무렵, 집행부는 좀 더 효과적으로 조합원을 모집하기 위해 평화시장 옥상에 빨간 글씨로 ‘분신으로 쌓은 터전, 단결하여 주권 찾자’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파란 글씨로 조합에 가입하라는 현수막도 여러 장 써서 시장 곳곳의 전봇대 사이에 걸었다.
그런데 마침 승용차를 타고 평화시장 앞 고가도로를 지나던 정부의 고위관료가 이를 보고 난리를 쳤다. 공산당처럼 붉은 글씨로 현수막을 걸었다는 것이었다. 형사들이 노조 사무실로 몰려와 당장 떼어내라고 고함을 쳐댔다. 울분을 참지 못한 이소선 어머니와 조합 간부들은 소리쳤다.
“조합원 모집 현수막 하나 걸지 못하는 노조가 무슨 노조냐?”
조합 간부들은 노조 집기를 닥치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 화분이 날아가 깨지고, 서류철이며 사무 집기들이 바닥에 나뒹굴렀다. 나중에는 책상과 의자로 노조 사무실 문을 막고 12명이 모두 집단 분신을 결의하고 몸에 석유를 끼얹은 채 농성에 들어갔다.
결국 경찰은 창문을 깨뜨리고 소화기로 물을 뿌려 분신을 막으며 조합 간부들을 전원 연행해 버렸다. 조합 간부들은 경찰서에 가서도 배식 나온 밥을 집어던지며 싸움을 계속한 끝에 상급단체이던 한국노총 사무총장과 연합노조 간부들이 보증을 서서 풀려날 수 있었으나 몰골은 엉망이었다.
간부들이 돌아와 보니 조합 사무실은 깨진 화분이며 집기들이 널려 폐허 같았다. 다들 맥이 풀려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서성일 때였다.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얌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나요?”
낯 익은 얼굴, 유정숙이었다. 수줍게 웃으며 들어온 그녀는 그동안 만든 카드를 팔아 마련한 돈 만 원을 이소선 어머니에게 건네왔다. 보통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이 넘는 큰 돈이었다. 그리고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빗자루를 들고 부지런히 청소를 하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남자들도 기운이 나서 청소를 시작했다.
스스로 조합에 찾아오는 여성 노동자는 하나둘씩 늘어났다. 조합 간부들이 발에 물집이 가실 날 없이 상가를 돌아다니며 노조에 대해 선전하고, 이소선 어머니는 누군가 찾아올까 기대하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노라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따뜻한 풀빵이나 호떡을 봉지채 놓고 달아나는 나이 어린 시다들이 있었다.
16살 동갑 친구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하던 정선희와 임금자도 그랬다. 고된 노동과 가난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면서도 명랑한 성격을 잃지 않은 두 소녀는 자진해서 노조사무실에 찾아가 이소선 어머니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조합 사무실의 분위기를 밝게 해주었다. 두 사람은 70년대 말까지, 조합의 모든 싸움에 빠지지 않는다.
17살의 미싱사 이숙희도 자발적으로 조합을 찾아온 한 명이었다. 이숙희는 공장에 다니는 게 창피해 친구들도 안 만나고 오로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전태일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된 것은 사장들의 악선전과 달리 그 사람들이 매일 옥상에서 찬송가를 부른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장례식 날은 시장 전체가 임시휴일이어서 마석 모란공원 장지까지 따라갈 수 있었다. 호기심과 동정심으로 따라갔던 이숙희는 그곳에서 전태일이 왜 자기 목숨을 바쳤는가를 확실히 알게 되었고, 노조를 결성할 때 대의원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렇듯 자발적으로 노조에 찾아온 여성 노동자의 존재는 너무나 소중했다. 그들은 친구의 죽음으로 격앙되어 충동적으로 분노를 폭발시키곤 하던 삼동회원들이 하기 어려웠던 현장 조직을 대신했다. 사장들의 악선전으로 조합을 무서워하던 여성 노동자들은 자기들과 다름없이 어리고 예쁜 여성들이 조합 사무실에 드나드는 것을 보면서 조합에 대한 편견을 줄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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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5월, 김명례의 후임으로 정인숙이 부녀부장에 임명되었다. 정인숙은 봉제 노동자 출신으로,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노동운동을 배운 후 청계노조에서 부녀부장을 영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한 것이었다.
정인숙이 들어왔을 때도 집행부 간부들은 매일 두 명씩 조를 짜서 공장을 순회하며 조합원 가입원서를 받고 있었으나 조직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조합에 가입을 하더라도 의식 수준을 높이거나 단결력을 높일 만한 단체 활동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인숙은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배운 다양한 조직 방식을 적용해 나갔다. 먼저 유정숙을 통해 현장 노동자 친목 모임을 만들었다. 부녀부장이 나서면 노조활동이라는 부담감을 줄 수 있으므로 다정한 성품으로 널리 사랑을 받는 유정숙이 주도하도록 하니 친목회는 금방 만들어졌다.
아카시아가 한창 꽃을 피우던 6월 초였다. 구리시 동구릉에서 연 이름 없는 친목회의 야유회에는 11명의 여성 노동자가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각자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으며 놀다가 그 자리에서 ‘아카시아회’를 결성했다. 아카시아처럼 왕성하게 성장하며 온세상에 좋은 향기를 풍기자는 뜻이었다. 초대 회장은 유정숙이 맡았다.
아카시아회는 이름 그대로 빠르게 성장했다. 매주 월요일 점심시간에 노조사무실에서 가진 모임에서는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을 키우고, 현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개선해 나갈 것인가 같은 토론을 벌였다. 또한 각자 자기 공장에서 한 명씩 모임에 데려오기로 약속하니 신입 회원은 포도송이처럼 금방 늘어났다.
숫자가 너무 많으면 결속력이 약해지고 각자 발언할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전체 모임의 이름은 아카시아로 유지하면서, 산하 소모임을 만들어나갔다. 맨처음 만든 모임은 ‘무궁화클럽’, 다음 모임은 ‘레몬클럽’이었는데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들은 ‘백합’,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무궁화’로 모았다. 이런 식으로 모임을 만들어나가니 불과 3개월 후인 1971년 8월 태릉에서 열린 아카시아 회의 야유회에는 90명이나 참석했다.
아카시아회는 많은 여성 노동자를 조직하고 뛰어난 여성지도자를 배출하는 주된 통로가 되었다. 산하 소모임의 숫자는 1971년 연말에는 7개로, 이듬해 봄에는 14개의 늘어났다. 봉선화, 물망초, 크로바, 장미, 태양, 세븐, 레몬, 목화, 옥자매, 스마일, 일심, 코스모스 등 이름만으로도 예쁜 여성노동자들의 모임은 노조의 든든한 바탕이 되었다.
아카시아 회는 궁극적으로 노동자 권리운동을 목표로 하되 작고 쉬운 일상 활동으로부터 훈련하고 힘을 모으는 과정을 중시한 대중조직으로, 활동은 회원들 간의 활발한 토론으로 결정되었는데 대단히 창의적이었다.
연소근로자 위안잔치, 미용 강좌, 꽃꽂이 강좌, 바자회, 수재민 돕기, 내 집 앞 쓸기, 직장에서 시다들에게 반말 하지 않기,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자는 뜻의 ‘감미천운동’, 아끼고 나눠쓰자는 뜻의 ‘아나바다 운동’을 벌였다. 은행에 입출금 전표를 쓸 때 한문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기 통장을 만들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한문 강좌를 열기도 했다.
보람 있고도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는 아카시아 회의 다양한 활동은 조합원 확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카시아를 통해 노동조합과 가까워진 여성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노조에 가입해 조합원 숫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조합원 숫자는 1년 만에 4천명을 넘어섰다.
아카시아 회는 1980년 12월 청계노조가 강제해산될 때까지 초대 회장인 유정숙부터 시작해 신방식 · 김혜숙 · 이숙희 · 이봉순 · 전덕순 · 정선희 · 신순애 · 최옥분 · 최현미 · 조미자 등이 차례로 회장을 맡아 이끄는 가운데, 너무 많아 일일이 기록할 수 없는 소중한 이름들로 이뤄진다.
청계노조가 1970년대 민주노조의 대표 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삼동회 출신들이 방패막의 역할을 하는 가운데 수백 명의 아카시아 여성들이 맹활약한 덕분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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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동회와 아카시아회 회원들의 결속력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청우회로 뭉친 이들이야말로 전태일 50주기의 주인공들이다.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민주노조운동을 이룬 초석이 된 선배들이다.
노동운동의 진정한 역사를 모르는 채, 자신만의 짧은 경험에 갇혀 사는 후배들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너무 쉽게 보는 경향이 있다. 조합주의니 개량주의라는 식의 가벼운 평가가 그것이다. 그 엄혹한 현실 속에 민주노조의 주춧돌을 놓기 위해 온몸을 던져 싸운 70년대 활동가들이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선배임을 알아야 한다.
2020년 11월 7일, 아카시아 출신들이 부른 노래 가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돈을 벌러 왔단다 평화시장에
집안이 가난해서 돈을 벌러 왔단다
그렇지만 안벌려, 뼈가 빠져도
허 하고 한숨만 절로 나온다
허 하고 한숨만 절로 나온다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착한 나지만
여럿이 단결하면 큰힘이 된다
단결해서 투쟁해 권익을 찾자
쨍하고 이길날 돌아온단다
쨍하고 이길날 돌아온단다
진정,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합창이었다.

 

우리모두 전태일 문화제 : https://www.taeil50.org/

 

대한민국 일급 평전 작가. 이재유, 이관술, 이현상 등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모두 안재성의 손에서 평전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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