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를 빛낸 의인들(17) 빛고을의 의사(醫師) 김범수, 의인(義人) 김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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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수

김범수는 어려서부터 광주의 수재로 소문이 났다. 1917년 18세의 어린 나이로 경성의학전문대학을 합격하였다. 전남 출신 학생으론 유일하였다. 현실의 모순을 눈감으면 평탄한 삶이 보장되는 의사의 길이었다. 김범수는 민족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고난 받는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더 큰 사명감을 지니며 살았다.

3·1 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었는데, 1920년 9월 형무소의 문을 나올 수 있었다. 김범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어렵지 않게 학업을 마쳤고, 1923년 총독부의원(서울대병원의 전신)에서 인턴을 수료하고 바로 고향 광주로 내려와 개업하였다. 1924년 남선의원을 열었다. “일반 환자만 아니라 무산환자를 위하여 실비 혹은 무료 진료에 응하겠다고 한다.”고 동아일보(1924.11.27)는 보도하였다.

 

3·1운동으로 대구현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날. 왼쪽 세번째가 김범수.

김범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을 의원의 경영 원칙으로 삼았다. ‘신발에 흙이 묻어 있는 환자를 내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병원 지침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수재 의사가 고향에 돌아와 인술(仁術)을 베풀었으니 김범수의 인품에 대한 입소문은 빛고을 사람들에게 퍼져 갔을 것이다.

인술의 의사, 게다가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김범수였다. 교과서에 올려 그 인품을 선양해도 아무 부족함이 없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진정 빛고을의 의인(義人)이었다. 그런데 국가보훈처는 김범수 선생에게 서훈을 하지 않기로 작심을 하였나 보다. 김범수가 총독부의원에서 실습한 것을 두고 ‘친일의사’의 딱지를 붙이고 있다.

총독부의원은 다름 아닌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실습병원이었다. 김범수가 총독부의원에서 인턴과정을 이수한 것은 의사가 되는 필수 과정이었다. 총독부의원에서 근무한 사실을 가지고 김범수를 친일분자라고 규정하려면 차라리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일본인들로부터 의학을 배웠다는 것을 가지고 친일의 죄를 묻는 편이 낫지 않을까?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고 1949년 김구마저 암살되었다. 통일된 나라의 건설은 그 시절 모든 양식 있는 이들의 공통된 바람이었다. 그런데 민족의 역사가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고 미국과 소련 외세에 의해 좌우되었다. 민족의 불행한 비극으로부터 김범수의 삶은 벗어날 수 없었다. 김범수는 평범한 의사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1949년 10월 신문 지면을 빌어 의사 김범수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의업에 충실하겠다는 자신의 의사를 공개하였다.

하지만 1949년 6월 5일 이승만 정부는 독립운동가들을 보도연맹으로 몰아넣었다. 1950년 7월 4일 인민군이 남하하자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을 모조리 수감하였다. 영문도 모른 채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김범수와 보도연맹원들은 매일 밤 끌려가 총살을 당하였다. 오늘 밤엔 누가 끌려가는가… 처참한 시간이었다. 김범수가 이때 살아남은 것은 천행이었다.

1950년 7월 23일 인민군이 광주를 점령하면서 광주형무소를 빠져나온 김범수는 화순 백아산 근처의 마을로 피신하였다. 이승만에게는 ‘좌익’으로 낙인찍혀 보도연맹에 가입한 김범수, 김일성에게는 ‘이승만 정부의 협조자’, ‘혁명의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김범수는 한적한 곳 백아산 인근으로 피신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피신한 김범수를 또 불러내었다. 하필이면 빨치산 도당 사령부가 백아산으로 들어온 것이다. 사령관 김선우는 김범수를 차출하여 부상당한 빨치산들을 치료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화순 백아산의 빨치산 사령부는 미군의 집중 공습을 당하였고 광양 백운산으로 거점을 옮겼다. 1951년 8월이었다. 그런데 김범수는 백운산에서 보이지 않았다. 백아산의 환자 아지트에서 총살당한 것이다.

김범수의 비극에 대해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다. 이 슬픈 과거는 역사에 맡기자. 하지만 김범수의 목에 걸려 있는 친일의 주홍글씨만큼은 우리가 거두어 드려야 하지 않을까? 민족을 위해 평생 의로운 길을 걸은 어른에게 친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우다니…. 독립운동가를 친일파로 단죄하는 행위야말로 시급히 청산되어야 할 친일 잔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황광우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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