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는 1919년 해남 북평면 신월리에서 태어나셨다. 1932년 전후 신월리에 야학이 개설되었고, 어머님은 이 야학에서 국문을 깨우쳤다. 야학의 서가에 꽂힌 문학 도서들은 어머니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춘향전과 심청전을 비롯하여 조웅전과 배비장전등 조선의 전래 문학 서적들을 어머니는 통째로 암송하였다.
야학의 교사들은 다수가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온 인텔리들이었다고 한다. 교사들은 독립투쟁의 일환으로 민족계몽운동을 했던 것 같다.
1930년대 완도와 해남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어머니의 자부심은 대단하였다. “덩치가 황소만 했고 눈깔이 호랭이였시야. 그분들에 비하면 김대중 씨는 암 것도 아니어.”
1977년 내가 대학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광우야, 근디 좌익 어른들의 말로가 너무 안 좋아야. 자식들 교육을 못 시켜, 지금 다 서울 달동네에 살고 있어.”
1979년 내가 김해 교도소에서 출옥하였을 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광우야, 너, 좌익이지?”
아들을 향한 어머님의 물음은 일종의 예고였다. 아들이 좌익의 길을 갈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렇게 아들을 좌익이라고 단정하던 어머님의 심정은 어땠을까?
어머님에게 좌익은 거대한 자부심이었다. 어머님에겐 산처럼 듬직한 분들이 좌익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목격한 그 좌익의 말로가 너무 참담하다는 것이었다. “엄니, 무슨 소리여? 나는 운동을 해도 행복하게 살 거여. 두고 봐.” 나는 항변했다.
그런데 최근 나는 왕재일 선생의 장례식을 보게 되었다. 왕재일 선생은 1904년 구례 태생. 조부님이 매천 황현과 막역한 사이였으니 왕 씨 집에 흘러내려온 민족정기는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광주에 올라와 흥학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공부하였고 뒤늦은 나이에 광주고보에 들어갔으나 신문팔이 소년의 고단함을 떨치지 못하였다.
1926년 11월 3일 왕재일은 장재성과 함께 ‘성진회’(醒進會)를 결성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을 맡았다. 선생은 옥고를 치르고 나와 바로 장흥에 내려가 또 농민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니까 1930년대 초반 이곳 전라도에서 들불처럼 번진 농민운동은 모두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후속편이었다. 선생은 이 일로 또다시 옥고를 치러야했다.
해방은 되었으나 선생의 가난은 여전하였다. 1960년도 선생이 거처한 동네는 산수동 산꼭대기 오막살이 집이었다. 외람되지만 내가 태어난 곳도 그곳 산수동이었다.
선생의 부인 김현식 여사는 무등산으로 나무를 하러 들어갔다고 한다. 어쩌면 좋으랴. 나의 어머님도 무등산 충장사까지 들어가 나무를 하였다. 등에 진 나무는 땔감으로 사용하고, 머리에 지고 온 나무는 나무전거리에서 팔아 생계에 보탰다고 한다.
어쩌면 좋으랴. 나의 어머님도 그렇게 무등산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다. 옥수수가루로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어쩌면 좋으랴. 나의 어린 시절에도 굶은 날이 먹는 날보다 많았다.
어쩌다 읽게 된 <호남신문> 1961년 2월 14일자의 기사가 나의 가슴을 후빈다.
이 고장에 또 하나의 큰 별이 소리 없이 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횃불이 되어 일제의 폭정에 머리를 곤두박치던 항일투사 왕재일 선생. 13일 밤 새벽 1시경 향년 57세를 일기로 마지막 숨을 거둔 시내 산수동 높다란 언덕 위 조그마한 흙담집 안에서는 슬픈 호곡 소리가 찬바람에 물결쳤다. 두 살짜리 막내둥이를 품에 안고 눈이 퉁퉁 부은 김현식 여사는 양지 바른 흙 담에 기대어 동리 부인 두어 명과 서서 눈물에 젖었다. 조객이라고는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은 14일 아침 철없는 어린애들은 영문을 모르고 노래를 부르고…찾아온 기자의 얼굴을 멀끔히 쳐다보았다. “3개월 전부터 밥 한 술 제대로 못 뜨셨어요…”
독립운동 유공자들과 그 유족들의 삶을 돌아다보면 과연 이 땅에 정의가 있는지, 대한민국은 자주독립국이 아니라 제2의 식민지 총독부가 아닌지, 생각할수록 울분이 쏟아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