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누군가를 기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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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누군가를 기다리는가?!

프랑스 영화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를 보고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대단한 고역이다.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일까. 황지우는 기다리는 아픔을 절절하게 토로한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타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일부)

문 열리는 소리 들리면 자동으로 눈과 마음이 문으로 향하고, 그나 그녀가 아니면 한숨 토하며 허망한 눈길 돌리던 시절. 그러기를 몇 번 되풀이하면 시간은 훌쩍 달아나고, 찻집의 일하는 처녀애의 안쓰럽고 동정하는 눈빛에 고개를 떨구고.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는 이런 기대와 거리가 먼 작품이다. 당신이 잔잔한 멜로드라마나 삼각관계를 기대했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영화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뭘까, 뭐지, 뭘 말하려는 거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게 영화는 그렇게 다가왔다.

예기치 못한 전화 그리고 추억

만일 당신에게 잃어버린 첫사랑의 연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면 어떤 마음일 것 같은가?! 설렘일까, 당혹스러움일까, 애틋함일까. 혹은 이런 감정이 뒤죽박죽 뒤섞인 섞어찌개일까. 중년의 성공한 세일즈맨 장피에르는 어느 날 연극배우 헬레나의 전화를 받고 일순 망연해진다. 지나가 버린 세월과 추억이 한순간에 그를 엄습한 까닭이다.

젊은 시절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에서 남녀 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장피에르와 헬레나. 연극의 줄거리와 달리 그들은 깊은 사랑을 매개로 단단히 결박당한 운명이었다. 하지만 헬레나의 임신을 둘러싼 갈등으로 그들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 반대편으로 갈라선다. 그랬던 헬레나가 장피에르에게 전화했으니, 그 심사가 어떠하겠는가!

그들이 재회하여 <갈매기>의 트레플료프와 니나의 대사를 나직하게 주고받는 장면은 지금과 여기에서 그들이 대면하고 있는 운명과 교묘하게 겹친다. 자신에게 허여된 소명(천직)을 찾아낸 헬레나와 가족의 장남으로 의무를 다하고 있던 장피에르. 촉망받던 연극배우를 내던지고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던 청년 장피에르.

하지만 그들 두 사람은 인생의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판단과 주변의 시선과 달리 깊은 위기와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흉중의 아픔과 상처를 교환하는 그들의 길지 않은 재회는 관객에게 사랑과 인생의 의미를 묻는다. “그대는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진정으로 행복한가.”

장피에르와 가족 이야기

한국의 허다한 장남들처럼 장피에르 역시 가족의 생계와 일상을 도맡는다. 가족의 평안과 번영을 위해 자신의 꿈과 기획은 뒤로 물린다. 작가 지망생 쥘리에트는 늦은 나이에 임신하여 엄청난 행복에 휩싸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한바탕 회오리가 그녀를 감싼다. 남편은 런던 출장을 핑계로 그녀를 떠나고, 장피에르가 그녀를 위로한다.

남동생 마티유는 자신의 남성성과 남성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소심남이다. 직장동료 사라를 사랑하면서도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마티유. 그에게 훈계를 늘어놓다가 말다툼을 벌이는 형제. 막내 여동생 마고는 사진작가를 꿈꾸는 여성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큰오빠가 희생해도 된다는 편리한 사고방식의 소유자 마고.

이쯤이면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의 서사가 이해되리라 생각한다. 특별한 사건 없이 일상의 소소한 흐름과 자잘한 대화로 촘촘히 짜인 프랑스 영화문법에 충실한 작품.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다. 영화는 놀라운 반전을 준비한다. 마치 <갈매기>에서 트레플료프의 선택이 느닷없는 것처럼 장피에르의 선택 역시 그러하다.

장피에르의 영성체 사진을 찾았노라 기뻐하는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그는 헬레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잔소리와 나무람으로 대화는 종결된다. 세면대에서 정갈하게 손을 씻는 장피에르. 거울을 보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갈매기> 마지막 장면에서 트레플료프가 엄마 걱정을 하는 장면이 연상될 따름이다.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쥘리에트 앞에 열여섯 살 소년이 앉아있다. 랭보의 초기 시를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시인에게 있지만, 자신에게 결석한 용기와 천재성을 조심스럽지만 열렬하게 토로한다. 감동한 기색이 역력한 쥘리에트. 소년의 앞날을 축복하면서 그녀는 글쓰기에 골몰한다.

직장 근처로 이사한 마티유에게 사라가 다가온다. 집들이를 핑계로 가까워지는 두 사람. 그들이 부르고뉴에 있는 마티유 모친을 방문한다. 아들과 너무도 달리 활달하고 꾸밈없는 사라에게 놀라는 어머니. 마티유는 그들과 떨어져 흘러간 엘피판을 틀어놓고 온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땀과 눈물과 고함으로 뒤범벅되는 마티유.

호텔 앞에서 장피에르와 대면한 마고는 일행과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오빠의 소식을 듣는다. 그녀의 삶에 전환점이 마련되고 그녀는 홀로서기에 나선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툴툴대는 차에 들려오는 주인의 말이 그녀를 붙잡는다.

“나도 사진작가야. 넌 생계를 벌고 있잖아.”

소설가로 성공하려는 쥘리에트와 사진작가가 되려는 마고의 꿈이 이루어질 것인지는 여러분이 직접 확인하시라. 다만, 그것이 그들이 진정 기다리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마치 장피에르가 정말로 실현하려던 꿈이 연극배우였는지가 불분명한 것처럼. 다만, 우리를 기다리는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왜, 무엇을 기다리는가

영화는 시종일관 장피에르를 둘러싼 소소한 갈등과 화해와 크고 작은 실망과 기쁨의 교차를 보여준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돈을 둘러싼 마고와 장피에르의 갈등, 그 돈 때문에 발생하는 아내와 장피에르의 논쟁, 여친 여부 때문에 말다툼을 벌이는 장피에르와 마티유.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 매제에게 실망하는 장피에르.

우리 삶의 많은 여백은 사소하고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체호프의 드라마에서 등장인물들은 작은 실망의 누적으로 인해 절망하고 한숨짓는다.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에서도 이런 양상은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그들은 각자의 바람과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장피에르에게 의지한다. 그러다가 깨닫는다.

자기네의 삶은 오직 자들의 손으로, 의지로, 열망으로 유지되어야 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마치 헬레나가 그녀에게 주어진 소명을 깨달은 것처럼. 하지만 장피에르는 그런 깨달음을 끝내 얻지 못한다. 누군가 어디에서 그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독은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왜 기다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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