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던 프랑스가 이런 나라야?

영화 <글로리아를 위하여>를 보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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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구멍으로 폐쇄된 공간 안쪽이 보이고, 노년을 바라보는 희끗희끗한 머리의 사내가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열쇠 구멍 이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남자. 묵직하고 강인해 보이는 얼굴의 굳게 다물려 있는 입술과 깊은 주름살, 완강한 두 눈이 인상적이다. 무념무상으로 세상과 절연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표정이다.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의 로베르 게디기앙은 우리에겐 낯선 영화감독이다. 차라리 그는 카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영화 <청년 마르크스>의 제작자로 친숙한 편이다. 그래서일까? <글로리아를 위하여>는 수다스럽고 소소하며 시끌벅적한 여느 프랑스 영화들과 결이 다르다. 뭔가 무겁고 뒷맛이 고약한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다.

영화의 원제는 <세상의 영광 ‘Gloria Mundi’>다. 2011년 리비아의 절대 권력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사망한 뒤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소환한 라틴어 구절에서 나왔다. “세상의 영광은 이렇게 지나간다.(Sic transit gloria mundi)” 게디기앙 감독이 의도했던 대목을 영화 수입사가 슬쩍 바꾼 것은 분명 상업주의와 관련돼 있을 터다.

복잡한 가족관계

옷가게 임시직원 마틸드와 우버 택시기사 니콜라 사이에 여자아이가 태어나 축복을 받는다. 아이 이름은 마틸드가 영화에서 보았다고 지은 글로리아다. 그들을 축복하는 어머니 실비와 아버지 리샤르, 여동생 오로르와 그녀의 남편 브뤼노의 얼굴이 화면 가득하다. 온 가족의 축복 속에 태어난 글로리아의 장밋빛 미래가 보이는 듯하다.

화목하고 행복해 보이는 이들 가족에도 남모를 아픔은 있다. 리샤르가 실비에게 나직하게 말한다. “그 사람한테 편지해. 안 그러면 나중에 후회할 거야.”

관객은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대서양과 가깝고, 파리 서쪽에 자리한 소도시 렌의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실비의 전남편 다니엘이 편지의 수취인이다. 다니엘은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실비의 편지를 받은 다니엘은 발신지가 모나코와 칸에서 멀지 않은 프랑스 제2의 도시 마르세유임을 확인한다.

“당신한테 오래도록 연락하지 못해 미안해. 마틸드가 딸을 낳았는데, 당신 눈을 닮았어. 그래도 좋은 소식 전하게 돼서 좋아!”

무너지는 가족과 관계

<글로리아를 위하여>는 이렇게 얽힌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갈등과 사건을 축으로 진행된다. 인구 160만의 대도시 마르세유의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도회지의 삶이 화면을 채운다. ‘돈’으로 무너지는 가족과 관계가 영화의 고갱이다. 브뤼노와 오로르는 이민자들이 몰려 사는 구역에서 중고물품을 구매하여 수리해서 되파는 일을 한다.

물건 값을 멋대로 후려치는 오로르는 신분의 수직상승을 위해 아이 갖는 것도 포기한 여성이다. 브뤼노 역시 인색하기 그지없는 바람둥이이자 수완 좋은 사업가다. 반면에 마틸드와 니콜라는 형편이 좋지 않다. 우버 택시를 운전하다가 일반 택시기사들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니콜라. 영화는 여기서 세계의 보편적인 문제를 건드린다.

게디기앙 감독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켄 로치 감독처럼 계속 밀고 나간다. 우리는 실비가 일상으로 대면하는 외주청소 노동자의 고단한 일상과 노조 총파업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의 목격자가 된다. 임시직 노동자 마틸드의 상황은 날로 악화하고, 버스기사 리샤르 역시 악화하는 상황을 경험해야 한다.

이들이 부딪치는 잡다하고 소란스러우며 사람의 진을 빼는 구질구질한 일상을 다니엘은 묵묵히 들여다보고 수용한다. 20년 수형생활에서 체득한 침묵과 짧은 글쓰기 그리고 체념의 미학이 그를 단단하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젊은 날의 혈기 방장함 때문에 많은 것들을 잃어야 했던 다니엘은 가족의 또 다른 붕괴를 한사코 막고자 한다.

다니엘과 리샤르

렌에서 장거리 버스를 타고 마르세유에 도착한 다니엘은 하루에 10유로 하는 호텔에 여장을 푼다. 호텔의 장기 투숙객 대부분은 이민자들이거나 난민 출신이다. 프랑스인이라면 그런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20년 장기수로 복역한 그가 국가에서 받을 연금은 매달 600유로, 한화로 80만 원이 되지 않는다. 그의 말처럼 ‘누구 코에 붙이겠는가!’

리샤르가 다니엘에게 함께 지내자고 제안하는 대목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온다.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 <목로주점>(1877)에 나오는 제르베즈와 쿠포, 랑티에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한 다니엘은 리샤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유대는 실비와 마틸드, 글로리아를 매개로 깊어만 간다.

마틸드는 다니엘과 실비의 딸이고, 오르르는 리샤르와 실비의 소생이다. 하지만 리샤르는 늘 마틸드 편이었고, 지금도 마틸드를 편애한다. 일반적인 혈육 관념에서 벗어나 있는 리샤르와 다니엘이 부둣가에 글로리아의 유모차를 세워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따사롭다. 프랑스인들의 사고방식은 생경하지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글로리아를 위하여>는 느릿하고 여유롭게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잡아내기에 관객은 반전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의 영광’이라는 원제를 가진 영화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순 없다. 마틸드와 니콜라의 환희와 기대가 최고치로 올라갔다가, 한순간에 바닥 모를 나락으로 추락하는 순간 일어난 사건을 다니엘이 수습한다.

21세기 프랑스와 세계화

영화는 마르세유 곳곳의 마천루와 아름다운 풍경, 수많은 관광객과 다양한 피부의 이민자들을 보여준다. 그와 아울러 테러를 전담하는 중무장 경찰들과 도시 외곽지대의 빈민가, 밤이면 출몰하는 거리의 여자들까지 빼곡하게 화면에 담는다. 거기에 파업을 둘러싼 찬성파와 반대파의 대결과 충돌이라는 전통적인 갈등 도식까지 객석에 제공한다.

무엇보다 우리를 옥죄는 것은 1789년 대혁명 이후 프랑스가 선취한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으로 대표되는 사회보장이다. 돈이 없으면 잠시도 아이를 맡길 수 없는 탁아소, 의사의 진단서가 불가역적인 권위를 가지는 의료체계, 제르베즈도 넘지 못한 매춘의 굴레가 아직도 성행하는 세계 굴지의 선진국 프랑스의 민낯이 우리를 빤히 응시한다.

이주자들과 프랑스인들의 불완전한 화학적 결합과 일상화된 마약, 스마트폰 오남용이 거기 보태진다. 토스트 기기를 팔려는 이슬람 여성의 니캅을 벗겨서 신원을 확인하는 오로르에게는 인종주의 냄새가 난다. 이주자들의 천국 프랑스에 드리워진 세계화의 그림자가 짙게 드러난다. 그런 까닭에 관객은 다니엘의 짤막한 시편에 위로받아야 한다.

“지옥의 지붕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꽃을 본다.”

“내 시계의 바늘을 떼어내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마찬가지라며 스스로 수인(囚人)이 되는 다니엘의 시간에 대한 숙고는 폭력의 무의미한 대물림을 멈추려는 노력이다. 19세기 말 제르베즈에서 나나에게 이어진 매춘과 가정파괴가 실비와 마틸드를 거쳐 글로리아까지 전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어쩌면 이것이 <글로리아를 위하여>에서 감독이 전하려는 주제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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