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왜 도망치는가? (도망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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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에서 사건의 인과성이나 명확한 갈등, 인물의 명징한 성격 부여를 기대하는 것은 ‘한강에서 바늘 찾기’다. 영화가 끝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특별하거나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으며, 기막힌 상상력이나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어디서든 마주칠 법한 평범한 사건과 인물이 영화가 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이는 ‘이게 영화야?’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럴 만하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기대하는 수준은 홍상수 영화와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현대의 관객은 일상 혹은 일상성과 거리를 둔 ‘영화다운’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영화는 두 시간 남짓의 놀랍고도 기이한 가상여행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가지 않은 길이 있고, 살지 못한 인생이 있다.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와 시간과 관계에 대한 향수(享受)를 영화에서 찾는 것이다. 그것이 상상이나 공상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해도 출구가 봉쇄된 21세기 관객은 도피처가 필요하다. 질식할 것 같은 현실과 잠시나마 작별하려는 꿈을 아작 내는 것이 홍상수의 특출한 재능이다.

반복의 변주

<도망친 여자>는 결혼 5년 만에 남편에게서 ‘놓여난’ 여자 감희의 사흘 여정을 다룬 영화다. 사실 ‘여정’이라야 아주 빈약하다. 나이 먹은 아는 언니들을 방문하고, 혼자 영화관에 들르는 것이 고작이다. 영화는 정확히 사흘 동안 감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시공간과 관계의 서사에 주목한다. 그렇다고 해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들처럼 <도망친 여자>에서도 반복은 예외 없이 얼굴을 내민다. 영순을 찾아간 날에는 쇠고기 구워 막걸리와 함께 먹고, 수영의 집에서는 파스타와 포도주를 곁들인다. 그것이 우진의 공간에서는 사과로 단출하게 바뀔 뿐 변화는 그것이 전부다. 감희가 찾았거나 우연히 만난 사람은 그녀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눈다.

그녀들과 대면하면서 감희는 무려 세 번이나 남편의 말을 되풀이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거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5년 동안 단 하루도 떨어진 적 없는 감희 부부 이야기는 그녀들에게 생뚱맞게 들린다. 특히 결혼하지 않은 수영은 화들짝 놀라기까지 한다. 경험 이전의 세계가 생경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영화의 남자들은 건축가, 번역가, 극작가, 시인처럼 홍상수 영화의 판박이들이다. 그들과 엮인 그녀들의 관계도 반복 수준을 넘지 않는다. 순영의 전남편은 닭장의 수탉처럼 영역 밖의 순영에게 무심하다. 자유로운 삶과 섹스를 즐기는 수영은 나쁜 소문을 걱정하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우진은 남편의 유명세를 질투하면서 그의 진심을 의심한다.

등 돌린 남자들

순영의 집 초인종이 울린다. 낯선 남자가 찾아온 것이다. 그의 용건은 단출하다. 순영이 거두는 길냥이를 치워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고양이를 둘러싼 그들 사이의 아웅다웅을 여자들의 말과 표정으로 수용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남자는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다. 얼굴도 없이 등 돌린 남자.

스물 대여섯 된 열혈시인이 수영의 집 벨을 울린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수영이 자신을 모욕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은 생경하게 다가온다. “나한테 수치를 주셨잖아요.” ‘수치를 주었다’는 표현이 가슴에 걸린다. 그도 등을 돌리고 항의한다. 핑하니 사라지는 시인의 모습이 잠시 보일 뿐 우리는 그의 표정을 모른다.

복합문화공간 지하에서 북 콘서트를 진행하려는 정 선생과 우연히 마주친 감희. 그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기에 남자는 등만 보인다. 언젠가 애인 관계였다는 두 사람의 어색한 조우와 아무 색깔도 생기도 의미도 없이 진행되는 대화. 담배를 피우면서 지난 시절의 낡아빠진 유성기처럼 “근데 여긴 왜 왔어?”를 되풀이하는 남자.

등 돌린 남자들의 공통점은 소심하고 ‘찌질하다’는 것이다. 아내의 대변인 노릇을 자처하면서 무슨 위원회를 말하는 남편. 거의 울먹거리며 사랑을 애걸하는 시인. 유명 작가이면서도 스스로 겸연쩍어하는 정 선생. 이 지점에서 감희가 감히 말한다. “그렇게 말을 많이 하시면 누가 그걸 믿겠어요? 왜 그렇게 말을 많이 하세요?”

도망치는 여자들

영화 제목이 흥미롭다. <도망친 여자>라니? 도망친다는 것은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 싫거나 무서워서 그 자리나 대상을 피해서 장소를 이동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싫은 내색과 서두는 기색이 역력한 경우에, 도망친다는 어휘를 쓴다. 그런데 보라! 영화의 여자들 가운데 누가 도망쳤는가? 누가 어디로 어떻게 왜 도망쳤다는 말인가?

남편이 자리를 비운 고작 며칠 동안 감희는 그와 함께했던 집을 떠난다. 남편의 지극한 사랑에서 일탈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혼한 전남편의 삶을 짧게 반추하면서 순영은 “왜 연락해? 잘살고 있는데!” 하면서 확연한 별리(別離)를 확인한다. 수영은 대놓고 “너 스토커야?!” 하면서 남자를 훈계하고 닦달한다.

우진은 한술 더 뜬다. “방송에 나가서 지난번에 했던 얘기하고, 또 하고. 아니, 거기에 무슨 진정성이 있겠니? 그게 진실일까?!” 하면서 남편의 다변에 정떨어진다는 표정으로 감희에게 동조를 구한다. 북 콘서트를 찾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서 묻어나오는 짙은 피로와 짜증의 그림자는 그녀 삶의 현주소를 웅변한다.

왜 그녀들은 전남편이나, 전 애인이나, 현재의 남편이나, 출장 나간 남편에게서 도망치는 것일까. 삶의 피로와 권태 때문일까 (순영), 순간의 일탈로 인한 자기변명일까 (수영), 다변의 공허함에 대한 저항이나 역겨움일까 (우진), 사랑을 입에 달고 사는 남편에 대한 거리 때문일까 (감희)? 이런 문제를 툭, 던지는 영화가 <도망친 여자>다.

영화의 구조와 미덕

감희의 동선을 따라가면 동심원 구조가 나온다. 서울 외곽(순영)에서 인왕산이 보이는 공간(수영)으로, 다시 도심(우진)으로 장소가 옮겨진다. 거기 개입하는 인물들도 낯선 남자에서 하룻밤 사랑의 대상을 거쳐 감희의 옛 애인으로 점점 구체화한다. 동심원 외곽에서 시작하여 중간지대를 거쳐 마지막에는 원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감희는 그들 집에 설치된 화면으로 그들을 보거나, 실물을 확인한다. 그녀가 틈입할 위치도 그럴 상황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떠나온 남자 정 선생과 정면으로 마주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방문객의 관점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대화의 중심인물로 전환하는 지점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 배치된다. 그리고 바다가 나온다.

바다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결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몰려오나 싶더니, 이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몰려간다. 파도의 움직임을 정확히 가늠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바닷물의 본원적인 운동은 변하지 않는다. 현상의 배면에서 저류(底流)가 흐르기 때문이다. 일상은 본질의 투영이고, 본질은 현상에 현현(顯現)한다.

그렇고 그런 장삼이사들이 시시콜콜한 일상과 서사를 가지고 77분을 버티는 영화 <도망친 여자>는 21세기 우리의 삶과 풍경이다. 우리 일상의 풍경과 사건은 저런 자잘한 소품과 알량한 지식과 인격과 대화와 관계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가. 하루하루 주어진 시공간에 충실하면서 생의 마지막 날까지 허우적대는 것은 아닌가?!

글을 마치면서

<도망친 여자>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인 감독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린다. 좋은 일이다. 작년에 칸영화제와 오스카 영화제에서 봉준호의 <기생충>이 전한 쾌거만큼은 아니라도 한국영화의 저력을 보여준 유쾌한 전갈이다. 하지만 이런 소식은 작은 단신 정도로 전해질 뿐이다. 우리 뛰어난 기자들의 도덕적 청교도주의 덕분이다.

나는 홍상수 영화를 좋아하거나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에는 허다한 사람들의 노고와 눈물과 땀이 배어있다. 그런 노력으로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면 마땅히 축하하고 함께 즐거워할 일이다. 뭐 그리 대단한 도덕성과 남다른 미학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홍상수와 김민희를 아직도 욕하는지, 모르겠다.

로버트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배우면서 아쉬움의 서정과 안타까움의 미학을 배운다. 하지만 그것은 시적 화자의 목소리에 공감할 때만 가능하다. 살지 못한 삶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을 늦게까지 가지고 있음은 병적인 징후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 바를 타인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은 만고(萬古)의 진리다! 이제는 수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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