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事大)’와 21세기 한반도 책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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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중국에 대한 공세와 이로 인한 미중의 대결이 날로 가팔라지고 있다. 급기야 미국은 22일 중국과 수교 이후 처음으로 휴스턴 중국 총영사관을 폐쇄했다. 이에 맞서 중국도 27일 청두의 미국 영사관을 폐쇄했다.

이에 앞서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중국에 대한 군사적 포위를 강화했다. 지난 6일 항공모함 니미츠호와 로널드 레이건호를 이곳으로 보내 대규모 무력시위를 했다. 그동안 미국이 이곳에서 군사적 긴장을 높여오긴 했지만, 두 개의 항공모함 전단을 파견한 것은 처음이다. 중국은 대항모 훈련으로 맞섰다. 13일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남중국해 해상자원에 대한 중국의 권리 주장을 ‘완전한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의 ‘불법 규정’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의 화춘잉 외교부 대변인은 이렇게 맞받았다. “70여 년 전 (2차 세계대전 직후) 중국이 합법적으로 난사(파라셀)군도와 시사(스프래틀리)군도를 일본으로부터 회수할 때 미국은 군함까지 제공하며 지원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대통령선거에 유리하다면 국지적 분쟁까지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관측하고 있다.

동북아에서 양국의 대결만으로도 한반도에는 중대한 위협이지만, 더 큰 문제는 미국이 한국을 대중 봉쇄에 끌어들이려 압박한다는 사실이다. 스티브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지난 7~9일 방한 때 반공개적으로 한국이 반중 전선에서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요청에 즈음해 미국에선 주한미군 철수 혹은 감축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 흘러나왔다. 주한미군 철수를 무기로 한국의 선택을 압박하는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28일 ‘중국 공산당의 해로운 활동’을 막는데 협력할 국가로 인도 일본 호주 아세안과 함께 한국을 콕 집어 서너 차례 언급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주변의 세력교체기 때마다 격동에 휘말리곤 했다. 그 불행했던 역사가 지금 재현할 조짐인 것이다. 17세기 초 명과 청의 세력교체기 조선은 두 나라로부터 선택을 강요받던 끝에 양대 호란으로 국토와 민생이 황폐화됐다. 19세기 중후반 서구 제국주의가 침략하던 시기, 청과 일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조선은 두 나라가 제 땅에서 전쟁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명이나 청, 일본이 요구한 것은 정치적 선택만이 아니었다. 군사기지, 병력, 전함, 군량, 무기까지 요구했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 최대의 해외 미군 주둔기지를 제공받는 것도 모자라 미군 운용비용까지 요구하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다. 미국이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역 등 비군사 부분에서까지 중국 봉쇄에 나설 것을 압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요구에 직면할 때마다 조선으로선 생존의 문제였으니 고민이 깊었다. 하지만 논의는 있었지만 결론은 매번 ‘사대’였다. 큰 나라를 더 열심히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자강을 위한 대책도, 교린(선린우호 관계)을 위한 노력도 없이 대국에 대한 의존이 결론이었다. 이른바 지배층이자 여론 주도층인 사대부들은 이판사판 ‘사대’였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흐름도 마찬가지다. 섬김의 대상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후금(후에 청)이 부상하던 17세기 초, 조선 인조는 대책 없이 ‘무찌르자 오랑캐’만 외쳤다. 믿는 것은 명나라뿐이었다. 1627년 1월 중순 후금의 정예 3만여 명이 압록강을 넘어왔다. 조선 조정은 개전 후 불과 10여 일만인 1월25일 강화도로 줄행랑을 쳤다. 그로부터 9년 뒤 조선 조정은 또다시 대책 없이 ‘무찌르자 오랑캐’를 외치고 있었다. 1636년 2월24일 한양에 온 용골대 마부대 등 청 사신을 서대문 밖 숙소에 사실상 감금했다. 청 사신은 29일 말을 훔쳐 도망쳤다. 인조는 이튿날 유시문을 발표했다. “오랑캐와 모든 관계를 끊는다.” “8도 관찰사들은 죽기를 맹서하고 싸워 원수를 갚자.” 믿는 것은 명뿐이었다.

4월11일 청의 홍타이지는 전쟁이냐 화친이냐 택일을 통첩하는 국서를 조선에 보낸다.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책은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 모르며 허언만 일삼는 소인배”라며 조선을 힐책했다. 6월17일 인조는 답서를 보냈다. “군사도 재물도 없는 우리는 오로지 대의와 하늘만 믿는다. 과거 조선을 침략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말로를 볼 것이며, 조선과 우호를 유지하고 있는 도쿠가와의 태평성대를 보라.” 조선을 침략할 경우 도요토미처럼 비명횡사할 것이라는 대꾸였다. 여기서 ‘대의’와 ‘하늘’이란 ‘사대’와 ‘명’이었다.

7월 명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로에 가도를 방문한 김육 일행에게 가도의 총병 심세괴는 이렇게 충고했다. “오랑캐와의 절화는 쾌거이지만 청의 예봉을 피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7월27일 가도의 부총병 백등용이 한양에 왔다. 인조가 직접 맞았다. “비록 절교하기로 했다 하더라도, 저들을 기미 하는 차원에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야 한다.” 이조판서 최명길 등 소수 신료가 ‘역관을 보내 대화를 재개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가 몰매를 맞았다.

1636년 9월1일 명의 감군(오늘의 국방차관) 황손무가 황제의 칙서를 들고 한양에 왔다. 조선은 청의 요동 진출을 막는데 협력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선) 국왕은 더욱 충직하고 양순한 마음을 돈독히 하고 무략을 드날리어 함께 협력하여 큰 공을 세워 요해의 파도를 맑게 하고 번병의 공렬을 세워 나라를 빛내고 훌륭한 포상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라.”

황손무가 한 달 보름여 동안 머물며 조선의 대비태세를 파악해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명은 중원을 압박해오는 후금(청)에 밀려 북경까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배후에 조선이 있어 청의 진군은 지체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알고 보니 일격에도 무너질 만큼 허약했다.

황손무는 10월24일 귀로에 이런 편지를 인조에게 전했다. “청천강과 압록강 그리고 평안도의 험준한 지형을 잘 이용하고 병사들을 조련하여 화약과 총포를 제대로 갖추면 적을 막을 수 있다.” “대체로 경학을 연구하는 것은 장차 이용(이용)을 제공하기 위한 것인데 나는 귀국의 학사와 대부들이 읽는 것이 무슨 책이며, 경제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다. 뜻도 모른 채 웅얼거리고 의관이나 갖추고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국도를 건설하고 군현을 구획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세금을 경리하는 것은 과연 누가 담당한단 말인가.” “귀국의 인심과 군비를 볼 때 저 강한 도적들을 감당하기란 결단코 어렵다. 일시적인 장유에 이끌려 그들과의 화친을 끊지 마라.”

인조는 겁이 났다. 11월 역관을 보내 청의 의중을 탐색했다. 용골대는 역관 박인범에게 ‘왕자와 대신 그리고 척화론자를 압송하라’고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다시 들끓었다. 항전의 결의를 보여주자며 주화파의 숙청을 주장했다. 11월6일 최명길이 파직됐다.

11월25일 홍타이지는 환구단에 나아가 조선 정벌을 고했다. 12월2일 홍타이지의 12만 대군은 심양을 출발했다. 본대는 10일 압록강을 건넜다. 마부대의 선발대는 그 즈음 안주를 지나 개성으로 내달렸다. 13일 오후 홍제원에 이르렀다. 강화도로 내빼려던 인조는 길이 막히자 발길을 돌려 14일 새벽 남한산성으로 도피했다.

19세기 동북아시아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함포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었다. 1839년 영국이 막무가내로 도발한 아편전쟁은 중국의 허약성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중국은 홍콩을 영국에 내줬다. 1850년대엔 일본이 미국의 무력에 굴복해 개항했다. 1860년대 조선은 미국과 프랑스 함대의 공격을 받았으며, 1876년엔 일본의 무력시위에 밀려 수교통상조약을 맺었다. 1879년 일본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류큐 왕국을 병합했다.

그제야 조선은 국제정세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1880년 김홍집을 대표로 한 2차 수신사를 일본에 보냈다. 고종의 관심사 중엔 일본의 ‘정한론’도 포함돼 있었다. 김홍집이 귀국하자 고종은 물었다.

“몇 해 전 살마주 사람(큐슈 가고시마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는 것을 그 나라 대신 이와쿠라 도모미가 막아서 오지 못하게 했다는데 사실인가?” “이와쿠라에게 물어보니 그런 사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악의는 없었는가?” “가까운 시일 내에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수신사는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처럼 헛다리만 집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김홍집은 하여장 공사 등 청국 관리로부터 정보와 판단을 구했다. 이들과 나눈 6차례의 필담을 정리하고 청국의 의견을 담은 것이 황준헌의 <조선책략>이었다. 조선의 최대위협은 러시아이며,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선 ‘친중’ ‘결일’ ‘연미’를 해야 한다는 것이 책략의 뼈대였다.

당시 러시아는 중국, 일본과 충돌하던 사이였다. 중국은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밀리고, 흑룡강 동쪽과 두만강 입구까지 영토를 러시아에 빼앗긴 상태였다. 일본은 러시아에 사할린을 넘겼다. 중국으로선 최대위협이 러시아였다. 황준헌이 내놓은 대책, 즉 ‘친중, 결일, 연미’는 중국의 국익을 지키는 반러 전선에 조선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중국이 사랑하는 나라로는 조선 만한 나라가 없다. 중국은 조선을 은혜로써 품어 줄 뿐, 한 번도 그 토지와 인민을 탐낸 적이 없었다. ~조선에서 전쟁(임진왜란)이 났을 때 중국은 어김없이 천하의 양식을 소비하고 천하의 힘을 다하여 싸웠다.” 조선은 중국 섬기기를 더욱 힘써서 조선과 중국이 한 가족과 같음을 천하가 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제 논에 물대기식 논리였다.

일본에 대해서는 동맹 수준의 관계를 맺도록 했다. “그들은 대대로 맡은 바 일에 충실하였다. 조선과 일본은 수레의 바퀴와 축처럼 서로 의지해야 할 형세에 있으니, 작은 거리낌을 없애고 큰 계획을 도모하라.” 결정적 오판이었다. 14년 뒤 일본은 청에 전쟁을 건다.

미국은 선린우호 관계의 대상이었다. “(미국은) 예의로써 나라를 세우고 토지와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고, 굳이 남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항상 약소한 자를 부조하고 공의를 유지하여, 유럽인이 함부로 악을 행할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20여 년 뒤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조선에 대한 일본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대신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 지배를 용인 받았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엉터리였다. 조선의 생존전략이 아니라 중국의 대러 봉쇄 전략에 조선을 활용하는 것이었으니 잘못될 수밖에 없었다. 하긴 한 나라의 생존을 어떻게 다른 나라에 의지할 수 있을까. 조선은 이 책략에 따라 1884년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에는 조선 땅을 제 앞마당처럼 내줬다. 중국에 군사적으로 의지하다가, 일본군까지 진주하게끔 했다. 결국 두 나라는 1894년 조선을 속국으로 삼기 위해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을 벌였다.

조선 5백 년 변함없이 내건 외교정책은 사대교린이었다. 큰 나라를 섬기고, 다른 이웃과는 우호관계를 맺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린은 외면하고, 오로지 ‘사대’에 전념했다. 그러다보니 이웃 나라들로부터 ‘나를 섬기라’는 압박에 직면했고, 다른 나라에 대한 봉쇄나 공격을 요구받기도 했다. ‘중화 이데올로기’뿐인 조선은 대책 없이 전통적 사대만을 고집했다.

해방 후엔 ‘친미(親美)’ 일색이었다. 사대가 ‘조선의 중국’이 ‘대한민국의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북한과는 열전이고, 중국과 러시아와는 냉전이었으며, 일본은 숙적이었으니 교린의 대상이 없었다. 여기서 ‘친(親)’은 단순히 ‘친하다’라는 뜻이 아니다. ‘아버지(가친 家親)’를 뜻한다. 親을 파자하면 ‘나무에 올라 멀리 자식이 간 곳을 바라본다.’는 것으로 집 떠난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를 표현한다. 따라서 ‘친미’란 미국을 가친으로 모시는 자세다. 일제 병탄기 ‘친일’도, 조선의 친중도 내용은 같았다.

옛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나서야 한국은 ‘교린’을 비로소 추진할 수 있었다. 미국이 앞장서 탈냉전을 주도했으니, 한국이 중국이나 러시아와 수교하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사대’의 틀 안에서 ‘교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과 30여 년 만에 ‘교린’이 ‘사대’에 의해 뒤틀리고 있다. 미국의 중국 봉쇄에 가담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17세기 명이 조선에 후금(청)을 공격하도록 하고, 19세기 말 청이 러시아를 주적으로 삼도록 한 것과 판박이다.

미국의 반중국 공세에 발맞춰 국내에서도 ‘반중’의 목소리가 커졌다. 미래통합당과 개신교계는 과거 ‘반공’ 혹은 ‘반북’을 외치던 수준으로 ‘반중’을 외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엔 아예 중국 봉쇄를 주장하기도 했다. 중국과의 교역량이 전체의 25%를 차지하고, 홍콩을 통한 간접무역까지 합치면 40%에 이르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단절을 요구했다. 친미 사대를 위해 나라 살림이 거덜 나도 좋다는 것일까? 19세기 말엔 ‘중화’를 앞세워 개혁 개방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위정척사론자들이 있었고, 17세기 초엔 화친은 반역이라며 피를 토하던 자들이 있었다. 인조의 ‘친명 반청’, 고종의 ‘친청 반러’의 결과는 참담했다. 조선에는 비극이었고, 명과 청에게는 불행이었다.

조선과 달리 대한민국이 ‘사대’에 매달리는 원인은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 상태 때문이다. 조선의 병인이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였다면, 대한민국의 병인은 해소되지 않은 전쟁 상태다. 한국은 그로 말미암아 군사주권까지 미군에 넘겨주고 있다. 군사적 대치가 심해질수록 미국에 대한 의존은 더 커진다. 중국은 북에 대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한반도 정치에 개입하고, 일본은 북한을 핑계로 군비 증강에 열중하고 있다. 남북관계를 정상화하지 않고는, 극복하기 힘든 벽들이다.

이수혁 주미대사는 지난 6월3일 “대한민국은 이제 선택을 강요받는 나라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나라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미 국무부는 이례적일 정도로 강하게 경고했다. “한국은 이미 동맹을 선택했다.” 23일 국방연구소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한반도 평화는 우리 손으로 이뤄야 한다. 반드시 이루겠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과연 그 ‘손’에 무엇이 들려 있을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그 손은 미국에 맡겨져 있었다.

곽병찬
전 한겨레신문 대기자. 이 시대 인문의 승묵(繩墨), '향원익청(香遠益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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