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그해 여름은 뜨거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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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사람과 사건이 있다. 그들 덕에 인생은 풍성하고 화사해진다. 나이 들어서 얘깃거리가 부족한 사람은 사건과 관계가 궁색한 때문이다. 나와 무관하고 이해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사람과 관계와 사건을 외면해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대상에 대한 지적(知的) 호기심이 태부족한 때문일 것이다. 지구별이 오직 나를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는 강박증 환자 역시 같은 결과에 도달한다.

1987년 6월 서울은 뜨거웠다. 6월에 예정된 평화 대행진은 시민들을 들뜨게 하였다. 피 끓는 열혈 청춘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는 6월 10일과 18일, 26일의 세 번에 걸친 저항운동을 뭉뚱그려 ‘6·10 민주항쟁’이라 부른다. 대학원 박사과정 중의 강사이자 러시아문화연구소 간사에 민족극연구회 회원이었던 나도 1987년 6월의 소용돌이 속으로 합류한다. 80년 5월을 되새기면서!

6월 10일 저녁 대학로에서 친구를 만난다. 그러다 불쑥 명동성당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가볼까, 한 마디로 그 자리를 뜬다. 명동성당은 넓지 않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학생들과 전투경찰로 양분되어 있었다. 평온한 분위기에서도 감촉되는 팽팽한 긴장감이 한밤중 어둠 속에서도 느껴지는 상황. 그 순간, 날카롭고 새된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전투준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고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지?! 들어가, 아니면 후퇴?!” 친구와 나는 잠시 눈빛을 교환하고 물러선다. 그는 출근해서 아이들 건사해야 할 가장이었고, 나는 시간강사이자 간사로서 직분이 있었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우리가 물러선 이유는. 28-9세의 호기로운 나이에도 우리는 쫓기듯 자리를 물러 나왔다. 살면서 지난날을 돌이키다 후회하는 일이 있기 마련인데, 그때 일이 간간이 떠오르곤 한다.

대학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매일같이 모친은 “데모하지 마라! 네가 우리 집안 기둥이다.”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모질도록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모친에게 둘째 아들은 무너진 집안을 재건하는 첨병이었다. 어떻게 해서 대학에 보낸 자식인데 데모 한 번으로 속절없이 자식을 잃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언제나 먼발치에서 시위대를 보고, 마음속으로나 동조했던 소시민의 전형으로 살았던 내가 늘 우울하고 억울했다.

80년 5월 15일 데모하다가 경동시장 부근에서 전경한테 잡혀 들어갔던 기억이 80년대의 나를 구원해준 유일한 기억이었다. 그래서인지 87년 6월의 사흘을 나는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시위대와 함께했다. 개운사 젊은 승려들과 저녁을 함께 먹고 같은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들은 모두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토록 뜨겁던 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 현대사는 다시 써졌고, 30년 넘도록 87체제는 유지되고 있다. 지금은 한낱 추억이나 영화로 반추되는 6월 민주항쟁기념일이 어제였다. 과연 나는 온전하게 사람과 사건과 대면하면서 우리의 기억과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경북매일신문>, 2020년 6월 11일자 칼럼 ‘파안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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