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홍 선생을 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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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孤)’라는 것은 도와줄 사람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것을 말한다. ‘분(憤)’이라는 것은 기뻐하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천하에 지극히 적막하고 쓸쓸한 말이다. 그런데 왜 나의 집을 ‘고분당’이라 부르는가?
슬프다. 천지가 생긴 지 오래되었다. 동서를 둘러보고 양단(兩段)을 판단하건대 쇠약에 길들어 멸망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동양 문명, 곧 중화의 옛 문물이인데 우리 조선도 그 하나이다. 호시탐탐 동쪽으로 진출하여 세계의 패권을 잡은 것은 서양 문명, 곧 유럽의 신학술이요, 일본도 그 하나이다.

孤者, 曰若無援無倚, 憤者, 曰若不悅不樂, 天下之至寥寥冷冷語, 吾何以名吾堂?
鳴乎! 天地之生, 久矣. 環視東西, 判爲兩段, 馴之以衰弱, 垂之以滅亡者, 東洋文明, 卽中華之舊文明, 而我朝鮮, 亦其一也. 耽耽乎東進 執世界之牛耳者 西洋文明 卽歐洲之新學術 而日本, 亦其一也.

이번에 찾아뵐 분은 운인 송 홍(宋鴻) 선생이다. 송 홍 선생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다. 1967년 광주일고 동문들은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조그만 흉상을 만들어 학교 정문 입구에 세웠다.

1974년 광주제일고에 입학한 나는 광주일고의 교문을 들어설 때마다 교문 입구에 안치된 송 홍 선생의 흉상을 볼 수 있었다. 나는 1975년 봄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시위를 모의하다 퇴학을 당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입학에서 퇴학에 이르기까지 송 홍 선생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분이 없었다. 근자에 ‘의향 광주’의 뿌리 찾기를 시도하고 있는 나는 최근《雲人遺稿》를 접하게 되었다. 유고집을 통해서 나는 마침내 송 홍 선생의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

선생은 1872년 화순군 도암면 운월리에서 태어났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은 태어난 때라고 한다. 선생이 태어난 해가 1872년이었으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력한 삶은 의병이었을 것이다. 보자.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 김태원은 1870년생이다. 광주 신안동에서 태어나 김태원의 의진을 물려받은 의병장 조경환은 1876년생이다. 보성 동소산에서 거의하여 왜놈들을 벌벌 떨게 한 머슴 의병장 안규홍은 어떤가? 그는 1879년생이었다. 송 홍 선생이 1872년에 태어났다는 것은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07년의 군대해산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역시 젊은이 송 홍도 이 시기, 집에서 가만히 눌러 앉을 순 없었다. 젊은 날 “조선이 멸망하기 직전, 곧 일본이 러시아를 이긴 직후, 나는 산림천택(山林川澤)과 원야진황지(原野陳荒地)를 50년간 빌려달라는 일본인에 반대한 사건으로 경성(京城)의 일본 헌병 사령부에서 욕을 당하곤 열흘 여 만에 풀려나왔다.”고 선생은 술회하였다. 당시 혈기 왕성한 대다수의 조선 청년들은 의기(義旗)를 들고 왜놈들과 한 판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선생은 달랐다.

곧바로 중국의 천진과 북경 등지를 돌아다녔다. 왕왕 정치가와 학사를 따라 각국의 정세를 검토했다. 옛것에 의지한 나라는 쇠망했고 새로운 것을 따르는 나라는 융성했다. 일본이 입헌제도로 승리했고 러시아는 전제제도로 패했다. 이는 손금을 가리키는 것처럼 역력하다. 이에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세계는 바야흐로 개조되고 있다. 만약에 망함을 피하고 보존을 도모하고자 하면 비록 백 사람의 관중과 천 명의 제갈량이라도 유럽의 신학술을 채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도와 안남의 전감(前鑑)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까 선생은 대안을 찾아 나선 것이다. 중국의 천진, 북경, 상해 등지를 전전하면서 구국의 길을 모색하였다. 선생이 찾은 길은 새로운 학문과 문명을 도입하는 것에 있었다. 이 점이 달랐다. 송 홍은 연재 송병선의 제자였다. 송병선과 그의 제자들 모두가 위정척사의 순정한 길을 갔지만, 송 홍이 간 길은 달랐다. 유럽의 신문명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망하지 않으려면 관중과 제갈량이라도 유럽의 신 학술을 채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선생의 현실적 판단이었다. 사서오경을 암송하며 자란 선비가 ‘서구문명 수입 불가피론’을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깊은 고뇌가 깔려 있었을 것인지, 나는 가슴이 저린다.

마침내 귀국하였다. 장문의 글을 써서 요로에 올렸다. 사회 각 방면에 글을 보내어 새것을 채용하고 옛것을 개혁하는 것은 반드시 교육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하였다. ‘교육입국’의 원조였던 셈이다. 선생은 각 군의 향교를 신학교의 교사(校舍)로 사용하자는 대담한 기획을 제시하였다. 과연 들어줄 자가 있었을까? 선생은 “월나라의 개가 눈(雪)을 보고 짖는 것처럼 촉나라의 개가 해를 보고 짖는 것처럼 볼 뿐이었다.”(徒見其越吠雪蜀吠日而已)고 자탄하였다.

곧바로 광주보통학교(서석초)에서 교편을 잡았다. 1909년, 이곳 호남 의병은 민족의 존엄을 놓고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선생은 조용히 초등학교의 교단을 지켰다. 역시 결단하기 힘든 선택이었으리라. 주위 친구들이 보냈을 따가운 눈총, 불을 보듯 환하다. 초등학교 교사가 된 일 년 후 나라의 숨이 끓겼다. 누군들 “세상을 피하여 산으로 돌아가 몸을 깨끗이 하고 자정(自靖)하고 싶지 않았겠는가?”(豈不欲避世環山潔身自靖乎哉)라고 선생은 당시의 비통한 심정을 술회하였다.

나라는 망했다. 희망은 오직 교육에 달려 있었다. 선생은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지극한 원한을 품고도 아무 원한이 없는 듯이 하였고,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무 고통이 없는 듯이 교단에 섰다. 날마다 학생들에게 역대의 흥망성쇠를 강의하였다. 이후 농업학교와 사범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기미년 3월, 천지에 대한독립만세의 소리가 진동했다.

이후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제일고의 전신)로 옮겼다. 당시 광주고보엔 20여 명의 교사가 재직하였는데, 조선인 교사는 단 둘이었다. 외로운 교직 생활이었다. 하지만 500여 명의 학생들이 눈빛만으로도 선생의 마음을 읽어 주었다. 선생은 한문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선생은 어떻게 수업을 하였을까? 문순태의 작품 《타오르는 강》은 이 시절 선생의 한문 수업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첫 수업은 한문 시간으로 송 홍 선생이 들어왔다. 송 선생은 학생들의 경례를 받고 한참 동안 말없이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학생들은 존경하는 송 홍 선생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해 하면서 긴장했다. 필시 송 선생이 이번 동맹휴학에 대한 언급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송 선생은 흑판에 斷機之戒(단기지계)라고 썼다.
“‘단기지계’라는 이 말은 무슨 일이고 중도에 그만두면 모든 것이 쓸모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맹자가 멀리 떠나 수학하던 도중에 집에 돌아오자, 그의 어머니가 베틀에서 베를 짜다가 베를 끊어 훈계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송 선생은 잠시 후, 흑판에 다시 斷斷無他(단단무타)라고 쓰고 학생들을 보았다.
“단기지계와 연관된 말로 ‘단단무타’가 있다. 오직 한 가지 신념으로, 결코 다른 마음이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여러분들은 단단무타 정신으로, 단기지계를 지키길 바란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단기지계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조직적 구심은 주지하다시피 성진회와 독서회였다. 성진회를 창립한 왕재일이며 장재성이며 최규창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송 홍 선생의 수업을 들으며 자란, 선생의 제자들이었다. 광주고보의 독서회를 주도한 김상환과 김보섭, 김대원과 오쾌일 역시 송 홍 선생의 제자들이었다.

11월 5일 경찰은 주동 학생에 대한 대규모 검거에 착수하였다. 12일까지 72명을 검거하였는데, 그중 광주고보생이 44명이었다. 11월 12일 2차 시위가 일어났다. 일경은 배후세력을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12월 17일까지 광주고보생 247명이 검속되었다. 전교생이 500여 명이었으니 학생의 절반이 검속된 것이다.

선생은 괴로워하였다. “우리 학생은 어제도 10여명이 경찰서로 잡혀가고 오늘도 10여명이 잡혀갔다. 교실은 절반이나 비었고 감옥은 학생으로 꽉 찼다. 의지가 굳지 못하고 머리가 덜 채워진 소년들이 철창 판자 방에서 신음하고 있으니 죽지 않고 목숨만을 보전하길 바랄 뿐이다. 이것이 과연 선생과 어른이 행할 짓인가?”

선생은 사랑하는 학생을 좌시할 수 없어서 병을 핑계로 결근하였다. 선생의 결근은 왜놈들이 조장한, 조선인 교사로서 피할 수 없는, 강요된 결근이었다. 마친내 1930년 2월 8일에 면직되었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수감된 학생들이 처음으로 공판을 받는 날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한시 한 수를 남기고 학교를 떠났다. 10년 젊음을 바친 광주고보였다. 정든 교정을 떠나는 선생의 심경은 어땠을까? 《雲人遺稿》는 두 수의 시를 수록하였다. 한 수는 송별식장에서 제자들에게 준 시였고, 다른 한 수는 황현의 아우 황원에게 보낸 시였다.

경오년 봄 광주고보 교사 사표를 제출하고 송별식장에서 절구 한 수를 지어 학생들에게 주다.

敎育吾曾叫革新 교육만이 혁신이라 부르짖으며
一心二十二年春 한마음으로 스물 두 해를 보냈네
今朝說與諸君別 오늘 아침 제군들에게 고별사를 하니
毋負江湖老病人 강호의 늙고 병든 이 사람 잊지 마시게

구례 석전 황원(매천 황현의 아우)이 내가 사퇴한 소식을 듣고 시를 보내니 이에 차운하여 화답하다.

忍看移鼎卄經春 나라 망하고 인욕의 이십 년을 지냈네
希望有存敎育新 희망은 오직 신교육에 있었지
太半諸生今在絏 지금 학생들 태반이 구금되었으니
難爲天下有心人 천하의 뜻있는 사람 정말 어렵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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