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나의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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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민 (사)인문연구원 동고송 회원

횃불행진을 하다!

1980년 5·16일 오후 8시경 우리 대학생들은 민주대성회가 거행되는 도청 광장을 출발했다. 횃불을 들고 행진을 하였다. 오후 8시부터 횃불시위대는 두 갈래로 흩어져 광주 시내를 행진하였다. 한 팀은 도청 광장→노동청→광주MBC→광주고등학교→무등산장→산수오거리→법원→동명로로 이동했다가 다시 도청 광장으로 돌아왔고, 또 다른 팀은 금남로→유동삼거리→광주천을 통하여 다시 금남로를 통해 밤 10시쯤 도청 광장으로 복귀했다.

횃불시위는 광주시내 전 대학생이 참가하였다. 여대생들은 횃불시위대의 가운데에서 횃불을 들었고, 남대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좌우에서 보호하면서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광주 시내의 대로를 따라 행진했는데 홍래와 나는 한 조가 되어 참가하였다. 이 횃불시위는 광주 시민 모두가 지켜본,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평화로운 시위였다.

1979년 12·12 이후 정국은 급변했고, 민주화는 멀어져갔다. 당시 신학기가 되면서 학내에서는 산발적인 시위가 시작되었다. 날마다 10시경이면 도서관 앞에서 4, 50명이 모여서 시국을 분석하고 구호를 외치고 정문으로 향했다. 많으면 1, 2백 명에 달했다. 최루탄이 터지고 전경들이 학내에 들어오고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4월이 되자 점차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나의 죽마고우 홍래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학생회장 선거에서 박관현이 압도적으로 당선되자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박관현의 연설은 누구보다도 강렬했고 민주주의와 민족의 앞날에 대한 의지는 다른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박관현의 당선으로 전남대 시위대들의 민주적 기상은 욱일승천하였다.

전남대 학생시위는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제 시위에 참석하지 않고 공부만 한다거나 취미 생활하는 자는 더 이상 전대생의 자격이 될 수가 없었다. 민주와 독재, 분단과 통일이라는 대명제가 갑자기 시대적 사명으로 우리 모든 전대생 앞에 놓이게 되었다.

박관현은 우리에게 시위에 참가해야만 전대생이고 그래야만 역사에 사는 사람이 된다는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학생들은 주로 동창회, 서클별로 무리를 지어 시위에 참여했다. 나와 홍래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시위에 참여했다. 5월이 되어서는 전교생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중에는 단과대학별로 조직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의 모든 대학생들이 참여한 횃불시위 행진을 마치고 도청에 모이자 도청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이 학생 시민들로 가득 찼다. 이미 해거름부터 많은 연사가 도청 분수대 위에서 현 시국에 대한 연설을 하고 민주주의의 성취와 독재 타도를 말했지만, 난 아직도 박관현이 했던 마지막 말, 삼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오늘 부로 오일육은 죽어부렀다!” 우리는 모두 외쳤다. “오일육은 죽어부렀다!” 또 박관현은 말했다. “오일육은 죽어부렀다!” 우리는 또 모두 외쳤다. “오일육은 죽어부렀다!” 또 박관현은 더 크게 외쳤다. “오일육은 죽어부렀다!” 우리도 더 크게 외쳤다. “오일육은 죽어부렀다!” 그날 이후로 광주에서, 내 정신에서 “오일육은 디져부렀다!”

조대 뒷산으로 피신하다.

5월 18일 일요일, 비상계엄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집에 라디오 한 대가 있어 계엄령이 내린 것을 알았고, 휴교령으로 시위를 전면 금지한다는 뉴스를 들었다. 아버지는 금서를 간추려 땅에 묻어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군에 있는 형님도 걱정된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이날 저녁 벌써 공수특전대 및 계엄군이 전대와 조대에 진입, 야영을 시작하였다고 홍래는 기억하였다.

오후에 소태동에 사는 홍래가 학운동 우리 집에 왔다. 오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잠만 잤다. 나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우리 집에 있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홍래 형이 조선대학교 임시 총학생회 소속으로 체포 대상이었는데, 그 일로 홍래는 화정동 505 보안대에 밤 12시 30분경에 잡혀가서 형 문제로 취조를 당했다. 겨우 풀려난 다음에 우리 집으로 피신해왔던 것이다. 홍래는 ‘자택감금조건으로 서약서를 쓰고 방면’되었으며, “7월 16일 전투경찰 입대영장을 소지하고 있었기에 그나마 혹독한 고문을 받지는 않았지만 당시 지하 감방에서 들려오는 고문 소리는 소름끼치는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고 회상했다.

5·18 기간의 10일 동안 나는 두 번 도청에 나갔다. 첫 번째는 5월 19일인 것 같다. 오전에 혼자서 나갔다. 한바탕 시위가 끝난 금남로에는 최루탄 냄새가 가득하였고 시위대는 보이지 않았다. 금남로 3가 (구) 한국은행 건물 앞을 나는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한 3, 40m 앞이든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3명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지프차 한 대가 급히 다가섰고, 사복을 입은 정장차림의 사람이 몇 명 내리더니, 3명을 사정없이 곤봉으로 내리치고 발로 차며 멱살을 잡아끌고 차에 태웠다. 불법 연행이었다. 나는 혼자라서 안 잡아간 것 같고, 앞에는 3명이니 잡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얼른 충장로로 피해 들어갔다. 평소 자주 가는 음악다방에서 한 시간을 보냈다.

다시 충장로 입구 쪽으로 나와서 도청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일반 경찰들이 방패를 들고 로마병정들처럼 늘어서 있었다. 나를 막아선 어느 중년 경찰이 말했다.

“어이, 젊은이! 어여, 빨리 집에 들어가. 지금 젊은 사람들은 다 잡아가니까. 빨리 집에 들어가!”

나는 물었다.

“왜 못 가게 해요? 무슨 일이요”

경찰은 말했다.

“방금 크게 한바탕 붙었어. 난리가 났는데,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어. 못 가!”

도청 앞은 최루탄 냄새만 나고 조용했다. 다방에 있는 동안 또 한바탕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광주 경찰은 아닌 모양새이기에, “어디서 왔소?” 하고 물었더니 지방에서 차출되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더 많은 경찰이 차출되어 광주로 올 거라고 했다.

5월 20일, 화순, 지원동쪽에서부터 보안대, 계엄군, 경찰들이 집을 뒤져 학생들은 다 체포해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묶어둔 책, 금서 뭉치를 비닐로 싸서 긴급히 석류나무 옆 땅속에 파묻었다.

홍래와 나는 도시락을 싸서 조대 뒷산으로 피신했다. 조대 뒷산에 올라온 우리는 광주 시내를 바라보았다. 조대 뒷산은 전망이 좋아 시내가 훤히 보였다. 양영학원 옆 광주지방 노동청에서 하얀 연기가 나고 있었다. 노동청은 도청과 불과 100m 거리에 있었다. 조선대 운동장은 병영처럼 계엄군 막사가 두 줄로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시내의 상공에서는 헬리콥터가 날면서 시위 해산종용 선무방송을 하고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에서 노동청이 맨 먼저 불에 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노동청은 박 정권 당시 악질 기업들의 앞잡이였기 때문이었다. 시내 곳곳에서는 하루 종일 총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MBC 방송국도 화염병 세례를 받고 불에 탔다.

5월 21일 여학생이 대형스피커로 시위 참여를 호소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날도 아침밥을 먹고 도시락을 싸들고 9시경에 조대 뒷산으로 피신하였다. 친구 홍래는 그날의 기억을 이렇게 말했다.

“9시경 조대 뒷산, 숙실마을에 올라 도청 앞 상황을 예의 주시하였는데, 11시경에 금남로에 시위관중이 구름처럼 모여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점심 무렵에 기관단총 소리와 무차별 사격 소리를 들었다.”

시내 곳곳에서 들리는 총소리, 최루탄 터지는 소리, 헬기가 조선대 운동장에서 뜨고 지는 광경, 그리고 헬기 한 대가 조종사가 보일 정도로 바로 머리 위로 바짝 달려들기에, “야, 홍래야! 우리한테 총 쏘겠다. 숨자, 숨어.”하고 얼른 뒤쪽 숲속으로 도망가 아슬아슬하게 숨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헬기는 시내를 돌아다니다 유(U)자 형태로 선회하면서 조선대 운동장으로 착륙하곤 하였다.

‘뒤주’ 속에 숨다.

그날 오후 집에 오니 아무래도 학운동 집은 위험하니 어디 다른 데, 시내 쪽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 좋겠다고 집에서 이야기하기에, 당시 내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학생의 집이 있던 학동시장 근방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지원동 쪽에서부터 계엄군이 올라오면서 학생들을 뒤져서 다 잡아간다는 것이었다. 주인아줌마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 날이 계엄군이 철수한 날이었다. 철수하면서 길 근처 집을 뒤져 젊은이들을 다 죽인다는 소문이 또 돌았다. 하필이면 피신하는 집이 길 근처의 집이었다. 이제 갈 곳은 없고 막막하였다.

밤이 되자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주인아줌마는 우리를 어디 숨길 데가 없는가 하고 생각하더니 “헌 뒤주가 있으니 둘 다 그 속에 숨으면 돼!” 하였다. 8시경이 되니까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도청 쪽에서 의대 쪽으로 해서 학동, 화순 방면으로 철수하는 계엄군은 그냥 조용히 철수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도 겁이 나서 아무 곳에나 마구 총을 갈기면서 철수를 하였다. 총소리가 가까워지면서 예광탄이 마구 날아다녔다. 주인아줌마는 유탄이 날아오면 맞을 수도 있으니까 두꺼운 이불을 거실 유리문 앞에 걸어 널어놓아야 한다면서 겨울이불을 꺼내 함께 널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얼른 뒤주 속으로 들어가 숨으라고 하면서 나중에 나오라고 하였다.

5월 25일, 두 번째로 도청에 나갔다. 이때는 이미 시민군이 도청을 탈환하고 매일 궐기대회를 하고 시위차량에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현수막을 걸고 시내를 주행하던 때였다. 아침밥을 먹고 도청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벌떼처럼 많은 사람들을 뚫고, 상황을 알아보려 도청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당시 총을 맨 시민군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우린 어찌 되것소?” 한 아줌마가 묻자 시민군은 말했다. “지금 위에서 협상 중인디, 잘 안 되가지고 계엄군이 들어오면 다 죽어야지 별 수 있겄소. 어제도 송정리에선가 둘이나 죽었서라.”

시민군의 옷차림새는 허름했고 대학생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체계적으로 지휘를 받은 전투원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투사회보가 곳곳에 뿌려지고 있었다. 오후에 독침사건이 발생했다고 들었다. 독침 소문을 퍼트린 사람을 잡아 당국에 인수했는데 안기부 프락치라는 소문도 돌았다.

5월 27일, 새벽 “도청, 시민군을 지켜 달라!, 광주를 지켜 달라!”는 애절한 방송과 함께 콩 볶는 듯이 요란한 총소리가 멀리 도청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아침 8시경이 되자, 군용헬기가 낮게 날며 ‘거리로 나오지 말라!’, ‘폭동은 진압되었다’는 선무방송만 되풀이 되었다. 산발적인 총소리는 오전 내내 계속되었다. 10일간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5·18 이후

그 뒤로 한동안 5·18은 나에겐 없던 일이 되었다. 광주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아무리 심한 고통도 죽은 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5·18 후에 휴교령이 내리고 9월 이후에 휴교령이 풀린다고 하였다. 홍래는 전투경찰에 입대하고 난 여름 내내 집에 있으면서 농업문제에 관한 논문을 썼다. 학도호국단이 부활되고 부단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대신에 자율적인 상경학회에서 활동하였다.

5·18이 끝난 몇 년 후, 사촌동생 경원이가 시민군에 참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총을 들고 다녔다고 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랬냐. 죽을려고.”

그랬더니, 동생은 말했다.

“나 돌아다닐 때는 광주시내 조용했어라. 사람들이 밥도 주고 먹을 것도 많았 고, 재밌었는디. 위험한 외곽에는 안 갔어라. 나중에 총 반납하라고 해서 주 고 집에 왔지라.”

어렸을 때 윗집에 살던 문재학이가 죽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재학이는 동네 후배로 어렸을 때 같이 놀면서 컸다. 당시 광주상고 1학년생이던 재학이는 도청을 찾아온 어머님께 ‘친구가 죽었어요. 혼자 돌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머님을 돌려보냈다.

재학이 어머니는 이후 매스컴에 자주 나와 광주 5·18을 알리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도청 민원실 2층에서 아들하고 마주쳤어요. 가자고 해도 얼른 대답을 못해요. 한참 서 있더니 그러는 거예요. ‘엄마, 창근이가 죽었어라우. 창근이도 죽었는데 나만 혼자 집에 가면 되겠소? 친구가 죽었는데 나 혼자만 데리고 갈라우?’ 하는 거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목숨 걸고 수호하려 했던 저 아름다운 5월의 전사들을 잊지 않고 끝내 기억하면서.” 들불 열사 박효선의 말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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