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건만 봄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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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정 (초등학교 교사)

1980년 5월, 나는 교육대학 1학년 봄을 지나고 있었다. 대학생이 되면 다들 한다는 미팅도 해보고, 책 두어 권 가슴에 안고 학교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친구들과 잔디밭에 앉아 이야기하며 다녔다. 유난히도 화사한 캠퍼스의 벚꽃 아래에서 친구들과 사진도 찍었다. 생소한 대학 교육과정에 적응하며 성실하게 대학생활을 이어갔지만 세상 물정엔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였다.

나의 초등학교 생활은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여 “1968년 12월 대통령 박정희”로 끝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초등학교를 다녔다. 영문도 모른 채 우리들은 ‘우리 대통령, 일 잘하는 대통령’ 하며 독재자를 찬양했다. 지금도 동네 골목에서 고무줄넘기하며 불렀던 노래가 입에서 나온다. 까닭도 모른 채 북한의 남침을 염려해야 했고, 10월 유신을 찬양하였다. 교실 환경정리를 할 땐 ‘총력안보’ 네 글자를 써서 걸어놓으라는 담임 선생님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그땐 박정희가 독재자였던 지도 몰랐다. 그전 해 1979년 10월이 다 가는 어느 날 아침, 등굣길에서 들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뉴스는 충격이었다.

태어난 해부터 대통령이었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겐 적응이 되지 않았다.

1980년 대학에 입학하여 듣게 된 “전두환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나에겐 무척 낯설었다. 그런 나도 5월 16일 광주의 모든 대학생들이 도청 앞으로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도청으로 갔다. 뭘 알고 투철한 사명이 있어서 도청으로 갔던 게 아니었다. 그냥 물 흐르듯 따라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날 횃불을 들고 호랑이처럼 포효하던 박관현 열사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때 내가 본 열사는 대학생이라는데 중년의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다. ‘나와 같은 대학생인데 저 사람은 얼마나 똑똑하고 유식하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횃불 성회에서 듣고 있던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근래 그때의 영상을 찾아본 적이 있다. “꺼지지 않는 횃불과 같이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박관현의 음성은 40년이 지난 오늘 다시 들어도 그때 그날처럼 가슴 절절하게 다가왔다. 열사가 죽지 않고 살아서 이 나라를 위해 일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통하기 그지없다.

횃불 성회에 참가한 후로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나는 보지 못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나를 데리러 광주로 오셨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고흥 녹동에서 살고 계셨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부모님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다.

대인동 시외버스 터미널,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내가 본 단 하나의 5.18은 이 터미널에서 벌어졌다.

막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계엄군과 학생들 사이에서 쫓고 쫓기는 일이 번개처럼 벌어졌다. 학생들이 버스 밑으로 몸을 숨겼다. 버스 밑에 몸을 숨긴 학생을 계엄군은 기어이 끄집어냈다. 방망이로 때리면서 잡아끌고 갔다. 엄마는 치를 떨면서 나를 버스 위로 밀어 올렸다.
휴교령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오니 여름이 와 있었다. 그 후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어머님과 나는 그 일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나는 누구에게 그 해 5월의 일들을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언젠가 동료 교사들에게 5.18 행방불명자 임옥환의 이야기를 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동료 김목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다.

광주는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다

김목

1980년 5월 18일
무등산에서 벗들과 술 마시는데
시내에서 계엄군이 학생들을, 젊은이들을
뭐라고? 아녀자들까지
몽둥이로 치고
대검으로 찌르고
머리통이 깨지고,
젖가슴이 찔리고

5월 19일부터
아침이면 2천원을 호주머니에 넣고
도청으로,
금남로로 갔다.
천원은 모금함에 넣고,
천원은 점심값이었다.

광주천 다리 건너엔
돼지고기를 석쇠에 구워주는 집이 있었다.
대여섯이 천 원씩 모아
안주 한 접시
소주 두세 병
점심으로 때우고

오른 손 번쩍번쩍 치켜들어
외쳤다.
구속인사 석방하라!
전두환은 물러나라!
이대로 당하고만 살 수가 없었다

고 임옥환

2008년 5월 문득 다시 그날을 떠올린다. 두 학생이 고흥을 향해 걸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차편이 끊긴 탓이었다. 터벅터벅 길을 걸었다. 남광주를 지나, 학동을 지나, 소태동을 벗어나는데 갑자기 콩 볶듯 기관총 소리가 터졌다. 두 학생은 혼비백산 정신없이 뛰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친구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다시 볼 수 없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 임옥환이었다. 지금은 ‘5․18 행방불명자’라고 불린다. 임옥환! 남겨진 님의 이름은 영원하리니 고이 영면하시라.

내가 사는 곳은 지산동이다. 집 가까운 곳에 동산 초등학교가 있다. 지난해 전두환 씨가 이곳 광주 법원에 출두하던 날 창문으로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치던 아이들의 학교, 동산 초등학교 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동산 초등학교를 바라본다. 40년 전의 그날처럼 봄은 왔지만 봄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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