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월동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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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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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주광역시 망월동에 산다. 망. 월. 동. 어쩐지 음산하고 무서운 곳이다. 어린 시절 유행하던 귀신 이야기 시리즈에 나오는, 하얀 소복 입은 여자가 택시에 타서 데려가 달라는 제삿날의 방문지, 망우리 공동묘지의 느낌이 드는 곳이다.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큰 딸의 초등학교 친구는 누가 어디 사냐고 물으면 절대 망월동이라 하지 않고, 청옥동이나 석곡동이라고 답한단다. 나도 오랫동안 망월동에 산다고 말하는 것을 꺼렸다.

지금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5.18 국립민주묘지가 있는 곳, 망월동에 살아요.”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여 말한다. 귀신이 놀랄 만한 변화다. 한때는 망자(亡子)들의 동네, 망한 동네였던 망월동이 어찌 하여 이제는 ‘달이 뜨면 더 아름다운 망월동’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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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의 오월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 해 5월, 영광군 군남면시골 학교의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어느 날 몇 몇 친구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광주에서 무선 일이 벌어졌시야.”, “여학생 가슴을 잘랐다메” 그때 나에겐 유언비어였다. 여고괴담에나 나오는 공포 시리즈처럼 한 때 유행하는 이야기라고만 나는 생각했다.

그 해 여름도 초등학교 때부터 행사처럼 해 온 모내기와 보리 베기 농촌 근로봉사를 하느라 학교 공부는 전혀 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늘 해오던 일이라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고 항의하는 학부모도 없었다. 점심으로 주는 국수 한 그릇이 감사했다. 배고픈 친구들과 함께 어느 집 마당가의 앵두를 다 따 먹어버리고 그 집 담 밑에 숨던 일이 어제 일인 듯 떠오른다.

일주일에 몇 시간씩은 군복을 입고 출근하던 교련 선생님에게 군사훈련 수업을 받았고 가을에는 줄을 맞추어 행군을 갔다. 대입 시험을 보기 위해 광주에 온 것이 1980년 11월이었다. 나는 영광 촌년이었다. 광주의 친척과 선배들이 커다란 하얀 타래엿을 들고 찾아와 주었고, 다음날 학력고사를 보았다. 도시락이 없어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서둘러 시험장으로 뛰어 갔던 생각이 난다.

이듬 해 나는 대학생이 되어 광주에 왔다. 이후 선생님, 부모님, 친구, 내 주변 어느 누구에게서도 광주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학교 선생님의 집에 딸린 아래채에서 자취를 했는데, 본채에서는 선생님의 대학생 아들과 재수생 아들이 살았다. 그 집 마당 가운데에 해마다 자목련이 피었고, 캠퍼스의 풍향 동산에 벚꽃이 만발하는 봄이 네 번 지나는 동안에도 나는 광주의 일에 대해 눈치도 채지 못했다.

시골에서 출세한 이 여대생은 굽 높은 구두에 핸드백은 어깨에 메고 대학 교재는 눈에 띄게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취미로 기타를 배우고 가끔 극장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대부’ 같은 영화를 보았다. 나는 주말이나 방학이면 시골집에 가서 동생들에게 책과 영화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학 시절 유독 안 좋은 기억을 말하자면 추운 겨울 번개탄으로 연탄불을 지피던 일과 봄이면 거리를 자욱하게 덮는 최루탄 냄새였다. 모르는 게 약이었을까? 여기 저기 동아리를 옮겨 다녔으나 오래지 않아 그것도 싫증이 나서 혼자 공부를 했다. 별 고민 없이 대학을 다녔고 졸업 후 원하던 교직에 취직을 했다. 교사, 착한 교사이긴 했으나 돌이켜 보니 나는 생각이 없는 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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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무등산 아래 마을, 망월동으로 이사를 갔고 늦둥이 막내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자칭 호가 노산(老産)이다. 뒤늦게 세상에 내놓은 자식이라는 자조 섞인 명칭이다.

아기 때부터 막내아들을 할머니 집에 맡기고 데려오던 길은 망월동 묘역을 지나 고개를 넘어 광주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할머니 집에 가는 것을 싫어한 아들은 차 안에서 동그랗게 앉아 자는 척하였다. 체념한 듯 두 눈을 감고 잤다.

사남매 여섯 식구 뒤치다꺼리 끝낸 부산한 아침, 망월동 묘역을 지나가던 출근길은 고요했고, 계절마다 아름다웠다. 비가 오면 가끔 근처 시립묘지에서 번갯불이 반짝였다. 밤이 늦어도 무섭지 않았는데, 누군가 지켜 줄 것 같아 가슴 내밀고 목을 한껏 뒤로 젖힌 채 운전하던 길이었다.

한 낮의 묘역 입구엔 포장마차 꽃집 주인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한정 없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꽃을 팔아 밥벌이가 될까? 조화로 된 알록달록한 꽃 한 다발. 산 자에게 죽은 자는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면서 그 길을 지나갔다. 매년 5월이면 묘역 가는 길엔 태극기 깃발이 가로수처럼 늘어섰고, 하얀 이팝 꽃 눈 내리는 그 길은 더욱 환하고 숙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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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어느 날, 나는 아들을 할머니 집에 맡겨만 두고 돌보지 못한 것에 자책감이 들었다. 이제라도 아들 노산의 공부를 챙겨주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고 영어 학원에 상담을 하러 갔다. 응접실에 앉아 있는데 학원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엄마들이 광주에 잘 가르치는 독서 선생님이 있다고 말하는 걸 듣게 되었다. 나는 노산의 자존감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독서교육이 더 낫겠다 싶어 바로 독서 학원을 찾아갔다.

다산 학원이었다. 원장 선생님은 특이하게 엄마도 아이와 같이 강의를 들어보라고 했다. 뜻이 맞은 엄마들 몇이서 원장의 철학 강의를 같이 듣게 되었고, 우리는 ‘철학하는 엄마모임’이라 하여 ‘철모’를 만들게 되었다. 아이들 공부 맡기러 왔다가 엄마들이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이 ‘철모’ 공부모임에 지아비들이 들어와 함께 공부하는 바람에 ‘철모’는 ‘철부지’로 개명을 하게 되었으나, 2011년 창립 이래 광주의 ‘고전공부모임’은 지금도 해마다 그 연조를 쌓아가고 있다.

학창시절 책의 이름만 외웠던 호메로스, 그가 남긴 서사시《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읽었고 노자의 《도덕경》과 공자의 《논어》도 읽었다. 《성경》을 구약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약의 복음서까지 다 읽었다. 동양고전과 서양고전을 번갈아 가며 공부했다. 자연스럽게 서양과 동양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에 역사 공부도 하게 되었다. 고대사와 현대사, 세계사와 중국사, 국사와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예견하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에 대한 생각이 시루 속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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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스물두 살 박기순 평전》을 읽게 되었다. 처음으로 1980년 오월의 전사(前史)를 알게 되었다. 박기순은 1978년 12월 25일, 야학의 아이들을 위해 땔감을 모으러 산에 갔다가 그 날 저녁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 스물두 살의 여대생이었다. 나는 그 나이에 무엇을 했지, 아무 생각 없이 살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5.18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평전을 읽었다. 오월 광주가 있기까지 이렇게 헌신적인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놀랐다. 오월 광주는 그냥 온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젊은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그 날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 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늘 청년이 수행해야 할 역사적 소임을 고민해온 분들이었다.

1980년 5월 18일, 이은주란 젊은이가 영광이 아닌 광주에 살고 있었다면 무엇을 했을까? 생각을 해 보았으나 이은주는 결코 그들처럼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남을 위해 사는 삶을 한 번도 고민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세월이 부끄러웠다. 나는 착한 교사였다고 할 수는 있으나 생각이 없는 교사였다.

2019년 5월 18일 나는 평생 처음으로 망월동 국립묘지에 참배했다. 비가 내렸다. 몸은 젖었으나 영혼은 오랜 어둠에서 풀려나고 있었다. 헤아려 보니 광주에서 보낸 세월이 40년이었고, 그 중 22년을 망월동에서 살았다. 이제 망월동은 슬프고 무서운 동네가 아니다. 자랑스러운 광주, 아름다운 망월동에서 산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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