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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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2015년 1월 19일(월)-28일(수)
곳: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베니스
회원: 두동모임, 고전 교사 모임, 철학하는 엄마들

2014년 2월 동유럽 세 나라, 체코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관광하면서 이 관광을 추천해 준 친구 임창로의 진정성을 나는 느끼게 되었다. 그가 짜준 여정은 매우 알찼고, 안내원의 품위는 한결 높았으며, 소요된 여행경비는 착했다. 창로는 제법 자리를 잡은 여행사 사장이었는데, 학창 시절 그가 풍긴 순수와 진지는 그대로였다. “광우야, 발칸을 들여다보라. 발칸을 보아야 유럽을 안다. 관광의 차원에서도 보석처럼 빛나는 곳들이 많으니, 더 오염되기 전에 와서 보라.”

임창로의 발칸 여행 제안이 우연의 토양에 필연의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두동공동체 회의의 뒷풀이 좌석에서였다. 때는 봄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딸 황진이가 대학에 들어가면 그동안 수고한 아내에게 세계여행을 시켜드리기로 약속하였다며 지난 2월 임창로의 도움으로 동유럽을 갔다 왔다고 자랑하였다. 원래 임창로는 두동공동체의 한병곤 교수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한병곤 교수가 추임새를 넣었다. “아니, 그런 여행이면 나도 동참했어야 하는 것 아냐?”, “그러면 우리도 팀을 꾸려볼까? 그렇잖아도 2016년에 발칸여행을 하기로 약속하였어.” 두암동 먹자골목에서 마신 막걸리와 봄밤의 분위기는 제법 흥성거렸다.

막상 의사를 확인해보니, 술좌석의 이야기와 개인의 사정은 많이 달랐다. 정근식 교수와 정담 원장이 난색을 표했다. 유인상 변호사도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교사 모임과 철모 회원들에게 의사를 타진하기 시작하였다. 다수의 회원들이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처음에 간다고 하여 마지막까지 뜻을 일관하는 경우는 절반이라고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익주 샘 부부와 딸 황진이가 애를 먹였다. 나익주 샘은 반드시 여행에 동참해야 할 분이었다. 교사 모임의 고참이자 분의 입담은 여행을 흥미롭게 한다. 본인 역시 강력하게 희망하였으나, 예기치 않게 부인 조미라샘이 수술에 들어가야 했다. 나샘이 빠지면서 그 자리를 재빨리 서민주 양이 메우고 들어왔고, 애시당초 유럽여행을 하지 않겠다던 황진이가 유동적인 상황이 되었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결정한다. 나는 마지막까지 딸의 동행을 강권하지 않았다. 황진의 합류는 마지막에서야 결정되었다. 다행이었다. 남금희씨가 혼자 여행하면 외롭다며 문월식씨가 동참 의사를 밝혔다. 또 정은아의 아들과 문화영의 아들이 빠지면서 박경옥의 지인인 박인자님과 정인경님이 합류하였다. 이렇게 하여 빛고을 발칸 여행단 30명의 명단이 어렵게 확정되었다. 김명혜 교수의 룸메이트로 정은아님이 추천되었고, 손미오의 아들 성영주군과 이지화의 아들 유현욱군이 엄마의 품을 떠나 룸메이트가 되었다.

1월 19일 인천에서 모스크바로, 베오그라드로

새벽 4시 일곡병원 앞에서 공항 가는 버스를 타기로 하였다. 민주 아빠가 우리 일행을 실어다 주었다. 부인의 해외여행을 위해 새벽부터 차를 모는 민주 아빠의 성실은 가히 모범적이다. 집에서 일곡병원은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여서 나는 느긋하게 갔다. 약속 시간에서 5분을 늦었는데, 우리 가족이 꼴찌였다.

8시 30분에 공항 건물 안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다. 민주네 식구랑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건너편에는 한병곤과 그의 부인 정은진, 이지화와 아들 유현욱 딸 유인해가 자리를 잡았다. 일행은 곧 러시아행 비행기를 타는 게이트에 섰다. 인천에서 모스크바까지 9시간이 걸리는 긴 여행이기 때문에 나는 비행기 안의 무료를 잊기 위해 플라톤 관련 서적을 준비하였다. 책은 무료를 이기게 해주는 좋은 벗이다. 모스크바 공항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환승하기 위한 중간 기착지였다.

처음으로 모스크바의 땅을 밟았으니 설레일 법도 한데, 덤덤하였다. 세월이 흘러 나의 이념성도 그만큼 무디어진 것이다. ‘모스크바 1413년’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붉은 모자를 샀다. 터미널 D에서 터미널 F로 이동하는데 30분이 걸렸다. 현지 시각으로 4시에 도착하여 9시에 베오그라드 행 비행기를 타는 일정이어서 다들 ‘시간 사냥’에 나서야했다. 유미정과 서연정은 황진이를 데리고 유쾌한 쇼핑을 하였다. 루블화가 없어 물을 사 먹지 못한다고 하길래 나는 특유의 밀어붙이기로 물을 사 주었다. 손난영은 혼자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박관석 교수와 한병곤 교수, 남금희씨와 나는 아일랜드 주점에 들어가 맥주를 마셨다. 술맛은 좋은데 씹히는 게 없다. 유럽 맥주의 공통된 허무이다.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에는 좌석이 널찍했다. 한 숨 자니 도착했다. 모스크바 비행기의 기장들은 아주 순조롭게 기체를 땅에 착륙시켰는데, 매우 부드러웠다.

이 밤을 그대로 보낼 순 없지. 여섯 명의 남성들은 뭉쳤다. 박관석 교수가 와인을 가져왔고, 나는 따개를 준비했다. 자기 소개하는 것으로 술자리를 열었다. 남금희씨와 문월식씨는 사진 촬영 관계로 여행을 자주 하는데, 사진 작업을 할수록 인문학적 소양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부인과 두 딸을 대동한 김용범씨는 40대에 겪은 개인의 위기를 털어놓았다. 믿었던 친구들로부터 세 번 배신당하고 우울증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저렇게 점잖고 쾌활한 사람이……

1월 20일 베오그라드에서 마케도니아로

아침은 평화다. 토마토와 요구르트는 나의 위장에 평화를 선사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토마토의 신선함과 요쿠르트의 편함에 길들여졌다. 어젯밤에 음주한 사람들이 먼저 레스토랑에 입실하였다. 한교수 부부는 베오그라드 호텔 식사에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관석 교수는 이런 곳이라면 며칠 쉬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만족의 뜻을 대신하였다.

식사를 하고 나는 주변 풍경을 보기 위해 산책에 나섰다. 키릴 문자로 쓰인 간판이 해독을 어지럽게 하였다. 나는 그리스어 알파벳을 떠올리며 주섬주섬 퍼즐 맞추기를 하였다. 골목길엔 구멍가게와 빵집, 편의점과 전파상이 있었다. 조금 걸어가니 도시의 뒤에 오래된 2층집이 서 있었다. 낡은 소형차들이 즐비하였다. 사람들은 대개 검은 옷을 착용하였고, 표정은 무거웠다. 호텔 주위를 한 바퀴 돌았더니 5층 건물의 초등학교가 나왔다. 어느 나라나 아이들은 예쁘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학교 맞은편엔 사진 현상소가 있었고, 길거리엔 저상 버스가 달리고 있었다. 날씨도 을씨년스러웠으나 베오그라드의 아침 풍경은 어두웠다.

자, 이제 우리의 관광버스를 타자. 이 버스를 타고 우리는 여덟 개의 나라를 순방할 것이다. 나는 운전수 뒤 두 번째 자리에 말뚝을 박았다. 전체 좌석이 50석인지라 혼자서 두 칸의 자리를 점해도 무방하였다. 안내원은 이곳 아침 인사를 가르쳐 주었다. “도브리단”

베오그라드의 베오는 ‘흰’이고 그라드는 ‘성곽’이다. 베오그라드 시내에 들어서니 나토군이 가한 포격의 흉터가 건물 이곳저곳에 새겨 있었다. 밀로셰비치는 인종 청소의 악마였던가? 지금 우리는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오래된 선술집과 카페가 있는 스카다리아 거리로 가고 있다. 비가 한 점 떨어졌다. 이 정도 비는 모자로 막는다. 100년 전의 맥주 거리, 시인의 동상 앞에서 다들 한 컷트 찍는다. 배가 남산만하게 튀어나온 웨이터 동상 옆에서 나는 한 컷트 찍었다. 그 개구리 배는 10년 전의 나의 배였다. 조금 걸으니 예술의 거리가 나왔다. 사거리 한 가운데 서 있는 기둥에는 각 나라의 유명 거리를 딴 팻말이 인상적이었다. ‘아테나로 가는 길’,‘비엔나로 가는 길’,‘몽마르트로 가는 길’…조금 걸으니 우리의 명동 거리에 해당하는 베오그라드 중심가가 나왔다. 이 거리의 풍경,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체코의 프라하에서 보았던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보았던가? 나라를 건립한 장군의 동상이 서 있고, 동상 맞은편에 상가가 즐비하게 서 있는 것은 동유럽 도시의 공통된 풍광인 듯하다. 기념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자유 시간을 갖자. 서점에 들렀으나 키릴 문자의 책은 엄두를 낼 수 없어 그냥 나왔다. 모자를 사는 것은 도시 방문의 예의지. 잔돈이 남길래 가면극 마스크도 샀다.

다음으로 우리는 칼레메그단 요새를 찾았다. 이곳에는 세르비아의 군사박물관이 있다. 칼레는 요새이고 메그단은 전쟁터인가? 이 요새의 후미엔 두 개의 강, 사바강과 도나우강이 두물머리로 흐르고 있었다. 이스탄불의 토카피 성의 후미에 있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물처럼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군사박물관의 미로를 따라 발길을 옮기면서, 다들 기억조차 하지 못할 박물관의 유물들, 칼과 활, 투구와 갑옷에 뜻 없는 눈길을 주고 다녔다.

어느 그림 앞에서 안내원의 설명이 귀에 번득였다. 원래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땅이었다. 1398년 터키인이 코소보를 침공하였고, 세르비아는 이곳을 막아내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완강히 버텼으나 마침내 세르비아는 무너졌다.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는 조상의 피가 흐른 성지란다. 코소보 사태의 저류에는 오랜 역사적 갈등이 깔려 있었다. 민족적 갈등과 종교적 갈등이 오랜 역사 과정에서 실타래처럼 꼬여 있었다. 나는 박물관의 책자를 한 권 구입하였다. 발칸의 여행기를 쓰는 일이 쉽게 여겨지지 않았다.

오전 관광을 산뜻하게 마친 일행은 베오그라드의 북경반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발칸까지 와서 무슨 중국식인가? 하지만 나는 불만을 호소하지 않았다. 나는 테이블마다 한 병씩 와인을 돌렸다. 다들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유럽은 가게가 적다. 호텔에서도 와인을 구하지 못할 수가 있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발칸 현지 답사’이지만, 공부만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다. 고되게 살아온 이 몸에게 약간의 여흥을 제공해주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나는 왔다. 와인을 마시러.’ 베오그라드의 북경반점에서 나는 포도주를 10병 구입하였다.

이제 우리는 긴 잠에 들어간다. 버스는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프예로 향하였고, 여섯 시간을 우리는 버스에 머물러야했다. 운전사는 두 시간에 한 번씩 휴게실에서 쉬는 것이 이곳의 법이다. 버스마다 자동기록장치가 있어 이를 어기면 벌금을 문다. 첫번째는 15분 쉬고 두 번째는 30분 쉰다. 좋은 법이다. 참고로 우리의 버스는 한화로 7억원 나가는, 크로아티아에서 최고로 비싼 관광 전용 버스이다. 버스가 스쳐지나가는 세르비아의 벌판은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로 가는 벌판과 똑같았다. 아무것도 경작하지 않은 빈 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농가도 듬성듬성 나타났다.

마케도니아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잘 달리던 버스가 멈추었다. 고속도로는 좁은 2차선 도로였다. 무슨 일이 발생한 모양이다. 어차피 30분 쉴 때가 되었으니 쉬어 가는 셈 치자고 마음 묵었다. 일행은 서른 명이어서 모두의 얼굴을 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천 공항에서 이곳까지 숨 가쁘게 오면서 생략한 게 떠올랐다. ‘철학하는 엄마들’(약칭: 철모)의 회장인 문화영씨의 주도로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마이크가 이동식이 아니어서 사람이 이동하였다. 달리는 중이 아니어서 괜찮았다. 정인경씨의 자기소개는 모범적이었다. 차분하고 조리 있는 언변이 돋보였다. 한참이나 자기소개를 하였는데 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경찰차가 지나갔다., 병원구급차가 지나갔다. 큰 사고가 난 모양이다. 시간은 가도 차는 움직일 줄 몰랐다. 안내원은 ‘이 모양 이 꼴’이라며 이것도 이 나라의 풍경이라며 우리를 달랬다. 점심 때 산 포도주가 향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와인 따개를 준비하였고, 기회가 올 때마다 안주감을 구입하였으니, 차안이 와인집으로 변하였다.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나도 한 병을 비웠다. 뒤쪽에 앉은 한병곤 교수와 박관석 교수는 쉬임없이 포도주를 마셨다. 몇 병이나 마셨을까? 버스는 움직일 줄 모른다.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버스 뒤 대자연에다가 신진대사를 하였다.

한국이라면 30분 안에 처리될 사고가 한없이 지연되고 있었다. 밤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프예로 가기 120키로 미터 전방에서 연쇄 추돌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다섯 시간이 넘어서야 마침내 교통사고는 정리되었고, 우리는 국경을 넘었다. 출국과 입국의 절차가 또 우리를 붙들었다. 국경을 넘으면서 대형사고 뉴스가 공중파를 타고 전국에 방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벽 2시에 도착하여 바로 곯아 떨어졌다.

1월 21일 마케도니아에서 오흐리드로, 알바니아로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온 것은 내가 맨 먼저였다. 간밤에 안내원이 가르쳐 준 곳을 갔는데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프런트에 가서 “Where is restaurant?”이라 물었더니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가서 보니 식당은 없고 분수대만 있었다. 식사 때가 되지 않은 것인가? 호텔을 나와 바깥 공기를 마셨다. 새벽길인데 차는 분주하게 다녔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시 들어와 식당을 찾았다. 청소하는 아줌마가 있어 또 물었다. 알고 보니 분수대를 지나 더 가야 식당이 나오는 것이다. 토마토와 요쿠르트를 접시에 얹고 후라이치킨을 올려놓았다. 식사는 이중적이다. 많이 먹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맛있는 것은 우리를 유혹한다. 먹을 때는 좋으나 먹고 나면 후회된다. 빵과 치즈를 또 집어 들었다. 맨 먼저 식사를 했으니 맨 먼저 식당을 나서는 것은 당연하였다. 나는 사람들이 식당을 찾지 못해 나처럼 방황할 것을 염려하여 엘리베이터 근처로 갔다. 역시 식당을 찾지 못해 서성이는 분들이 있었다. 나는 자랑스럽게 식당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버스는 하루 11시간 쉬어야 한다. 어젯밤 늦게 도착하였으므로 오전 운행을 중지한다. 버스도 쉬고 사람도 쉬고 이것이 이곳의 법이다. 덕분에 우리는 택시를 불렀다. 여덟 대의 택시가 우르르 호텔 앞으로 몰려왔다. 오늘은 테레사 수녀의 기념관에 간다. “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합니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의 국적은 어디인가? 그녀는 이곳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부모가 알바니아인이다. 그리고 활동은 인도에서 했다. 기념관에는 테레사 수녀의 연보가 키릴 문자로 적혀 있었다. 기념관을 나와 조금 걸으니 강이 나왔다. 스코프예의 중심을 가르고 흐르는 다르다르강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상(像)이 우뚝 서 있었다. 안내원은 이 모든 동상이 5년 전에 신설된 것임을 힘주어 말하였다. 우리는 유스티아누스 황제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터키식 돌다리를 건넜다. 강 건너엔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과 어머니의 상이 서 있었다. 키릴 문자를 만들고 전파하였다는 키릴로스 형제의 상도 보였다. 다우트파샤 목욕탕이 인상적이었다. 겉은 이슬람교의 모스크 사원 모양인데, 그 안에 목욕탕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재래시장에 들어섰다. 시장은 삶의 현장이다. 시장은 어딜 가나 파릇파릇 살아있다. 늘 풍성하다. 호주머니로 들어간 손이 근질근질하다. 와인을 마시려면 견과류가 필요하지. 건포도, 말린 자두, 말린 무화과를 샀다. 빵집이 있길래 호기심에 하나 집어 들었다. 길가에는 할 일없이 노닥거리고 있는 아저씨들이 많았다. 모스크 사원 앞엔 빙판이 있어, 한 신도가 빙판을 부지런히 제거하고 있었다.

마케도니아는 발칸반도의 정복자가 바뀔 때마다 다른 주인을 번갈아 섬긴 나라다. 서기 395년부터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14세기부터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독립하였다. 따라서 스코피에 도처에 정교의 교회와 이슬람 모스크가 공존한다. 시장을 나온 우리들은 지나가는 길에 어느 고택에 들어섰는데, 나지막하고 조용한 주택이 정교 교회란다. 건물의 높이가 낮은 까닭은 오스만 투르크 지배 하에서 교회의 건물은 높아선 안 되었기 때문이다. 건너 언덕에 요새가 있다. 칼레다. 요새 너머 스코프에를 가르는 강이 흐르고 안내원은 저 강 건너편이 보스니아이고 코소보고 알바니아이고 마구 설명하는데 도무지 따라가기 힘들었다. 내려오는 길에 안내원은 이슬람의 사원을 보라고 한다. 스코피에에 오는 터키인들은 저 사원을 보면서 옛 오스만 투르크의 영화를 추억한단다.

버스는 출출한 배를 달래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한다. 마케도니아는 한국과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몇 나라 중의 하나이다. 안내원은 마케도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이 세 가족에 도합 11명인데 자신이 한인회 회장을 맡고 있단다. 식사로는 수프가 나왔고, 고기가 나왔다. 이곳 와인도 먹을 만하였다. 네 병을 시켜 마셨고, 두 병을 샀다.

이제 우리는 오흐리드 호수를 보러 간다. 스코피에에서 남서쪽으로 여섯 시간 내려간다. 오흐리드에선 여름에 시인들의 축제가 열리는데, 작년엔 한국의 고은 시인이 이 축제에 참여했다고 한다. 박관석 교수가 한겨레신문에 실린 고은 시인의 오흐리드 기사를 가져와 안내원에게 보여주니, 고은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저 여인이 자신의 아내라며 어깨를 으쓱한다. 오흐리드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한 산길이었는데 산을 깎아 고속도로를 내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중국인이 추진하는 사업이란다. 오흐리드는 넓은 호수를 끼고 있는 휴양도시다. 10-13세기에 지은 성당들이 300여개 된다.

우리는 나지막한 야산을 오르고 있었다. 나는 절룩이면서 대오의 후미에 쳐졌다. 고개를 넘으니 그 유명한 오흐리드의 호수와 옛 성당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기원전 200년에 세워졌다는 고대 그리스의 원형극장이 우리를 수줍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 극장은 2000년의 세월 동안 땅 밑에서 잠들어 있다가 최근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극장을 지나 서울의 산동네 비탈길을 연상케하는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비가 한 방울 떨어진다. 마침내 나왔다. 오흐리드의 호수는 바이칼만큼이나 광활하였다. 그 호수가 파노라마처럼 들어오는 언덕 꼭대기엔 중세의 고풍스런 성당이 단단한 벽돌로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우리는 취했다. 그리고 찍었다. 실족하면 추락사할 가파른 곳에서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벗들과 어깨동무하며 사진기 앞에 섰다. 오르고 내려가는 것이 인생이듯, 언덕에 올랐으니 이제 호수가를 향해 내려가야지. 백조 한 마리가 유영하고 있었다. 오흐리드는 며칠 묵고 가야할 곳이지 지나칠 곳이 아니었다. 안내원은 빨리 이동하라며 채근하고, 나의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기념품 가게에 들려 오흐리드 전경을 담은 사진 액자 한 점 구입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해는 졌고 길이란 길은 다 어두웠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탔고, 또 다른 나라 알바니아로 간다. 어제와 같은 사고만 없어라. 버스는 술술 길을 달렸다. 하지만 국경은 늘 우리를 붙잡았다. 출국과 입국이란 말을 누가 만들었나?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너 호텔에 당도한 것은 밤 10시였다. 2층 식당에는 피곤한 몸을 반갑게 맞이하는 석식이 예비되어 있었다. 먼저 수프를 먹고 다음 송이버섯 요리를 먹는다. 닭고기와 삶은 감자도 먹을 만하였다. 박관석 교수가 아들 박선호군이 국가고시에 합격했다며 술을 샀다. 먼저 올라갈 분들은 올라가고 술꾼들은 남아 오래도록 마셨다.

1월 22일 알바니아에서 몬테네그로로, 코토르로, 보스니아로

알바니아인의 70%가 이슬람교도이고 20%가 정교이다. 유럽의 나라인데 무척 가난하다. 일인당 지디피가 5000달러이다. 특이한 나라였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선진국의 어느 호텔 부럽지 않게 최신식 호화 건물이었으니 우리는 지금 서울의 신라 호텔에 들어온 것이다. 새벽에 이슬람 사원에서 아잔이 울려 퍼졌고, 나는 그 소리를 따라 호텔 바깥을 나갔다. 아직 어둠이 컴컴한대 사람들은 부지런히 출근하고 있었다. 길가의 간이식당에선 사람들이 식사를 때우고 있었다. 낯선 곳에 가면 새벽의 여명을 밟을 일이다. 아직 문을 열지 않는 도시의 골목길을 걸으며 생각하는 것이다. 알바니아인이 가난한 것은 그들의 종교가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가르치기 때문은 아닐까.

알바니아는 마케도니아의 서쪽에 위치하는 나라이다. 우리는 알바니아를 보러온 것이 아니다. 알바니아는 북쪽에 위치한 몬테네그로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점이었다. 찍고 간다. ‘몬테’는 ‘산’이고 ‘네그로’는 ‘검다’이다. 산이 검은 나라. 몬테네그로의 도로는 그야말로 비좁은 산길이었다.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몬테네그로의 농가가 평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어느 부유한 농부의 정원 곁을 달리기도 했다. 달리다 보니 아드리아해 해변이 출현하였다. 탄성을 지르지 않으면 안 되는 장면이었다. 완도나 홍도에 가야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바다의 풍광이었다. 우리는 몬테네그로의 코토르 성에 간다. 코토르 성은 잘 보존된 중세의 성이다. 저 높은 산꼭대기를 벽돌로 쌓은 성이 구불구불 지나가고 있다. 뾰쪽한 산과 단단한 성벽과 바다로 에워싸인 중세의 철옹성 코토르는 성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 성에 들어간 우리는 먼저 배부터 달랬다. 배추를 잘게 썬 요리가 좋았고, 피자처럼 얇은 빵부스러기도 좋았는데, 남금희씨가 산 와인은 더욱 좋았다.

크루즈가 들어오면 한 번에 몇 천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단다. 코토르의 안내원은 독일어를 구사하였다. 그러니까 우리의 여행 전체를 지휘하는 박태훈 안내원은 영어도 구사하고, 독일어도 구사한다. 독일어 안내원의 해설에 따르면 이 성안의 주택들은 항해사의 집들

이었단다. 1979년 대지진으로 성의 절반이 무너졌다. 성 트리폰 성당을 위시하여 주요 건물들은 이때 입은 지진의 상흔을 안고 있었다.

자유는 좋은 것이다.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나의 날개는 파드득 거렸다. 나는 서쪽 문을 찾았다. 역시 비경은 숨어 있다. 성벽 옆을 거센 강물이 힘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강물 저 위로 높은 산이 기이한 풍모로 우리를 내려 보았다. 그리스의 델피 신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와 흡사하였다. 모두들 찍기에 바빴다. 여행은 가고 사진은 남는다. 다시 성안 골목길을 뒤졌다. 이 골목 저 골목 모두 뒤졌다. 뒤지다 보니 함께 가던 동료들은 어데 가고 나 혼자만 걷고 있다. 나는 핸드폰도 없어 대오를 이탈할 경우 찾을 수 없다. 시계도 없어 정해진 약속시간을 훨씬 넘기고 나 혼자만의 자유분방에 빠질 수도 있다. 절제하자. 동쪽 문이 보여 빠져나왔다.

다음 행선지는 크로아티아이다. 우리는 하루 동안 세 개의 나라를 건너고 있다. 아침은 알바니아 티라너 호텔에서 먹고 점심은 몬테네그로의 코토르 성에서 먹고 저녁은 크로아티아에서 먹는다. 크로아티아로 가는 길은 흥미로웠다. 안내원이 기지를 발휘하여 배를 타는 코스를 선택한 것이다. 버스를 배에 실은 채 바다를 건넌다. 배를 탄다는 제안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도로를 따라 연안을 달리는 것보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쪽이 시간도 30분이나 단축된단다. 참 훌륭한 안내원이다. 2009년 트로이를 갈 때 이처럼 버스를 배에 실은 채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넌 적이 있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의 풍광과 벗들의 미소를 카메라에 담았다. 어둠은 완연하였고 우리는 아드리아 호텔에 들어갔다. 저녁은 호텔 식당의 뷔페식이었다. 나는 먹는 것에는 욕심이 없으나 술에는 욕심이 있다. 남금희씨가 산 와인을 음미하며 뷔페의 음식을 술안주로 먹었다. 새끼 꽁치가 좋았다.

1월 23일 크로아티아 듀브로브닉에서 보스니아 모스타르로

아드리아 호텔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크로아티아의 해안 풍경은 정확히 평가하여 통영보다 더 아름다웠다.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 움푹 들어간 만(灣)이 있고, 예쁜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집들은 모두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드리아 호텔은 들린 호텔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우아하였다. 아침에 샤워를 하면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그동안의 여행이 현장 답사였다면 오늘부터 ‘빛을 보는’(觀光)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바람이 찼고, 빗줄기가 후드득 쏟아졌다.

듀브로브닉(Dubrovnik) 성은 환상적일만큼 아름다웠다. 바람은 찬데 파도가 해변가 바위에 부서졌다. 이런 파도의 용트림은 제주의 해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것이 있었다. 바닷가에 구축된 저 요새는 무엇인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보물섬)》의 요새가 저기에 있지 않은가? 설레이는 마음을 부여잡고 듀브로브닉 성 안으로 막 들어서는데 짖궂게 내릴 것 같은 빗줄기가 거짓말처럼 뚝 그치고, 햇님이 구름을 뚫고 방긋 웃기 시작했다. 듀브로브닉 성은 예의 성이 아니었다. 그곳은 인간의 이상 도시를 구현하려는 웅지가 꿈틀거리는 유토피아였다. 성곽의 둘레가 4키로 미터. 크지 않은 성곽 안 7만 여 평의 부지에 인간의 이상 도시가 건축되었다. 성곽 안의 주민은 수로로 공급되는 물을 마시며 산다. 이 듀브로브닉 공화국엔 노예가 없다. 14세기의 일이다. 듀브로브닉의 역사를 볼까.

“7세기에서 12세기까지 도시는 비잔티움의 지배 하에서 성장했다. 비잔티움의 지배를 받는 여러 해안 도시들처럼 듀브로브닉 주민들은 자치를 향한 강한 열망을 가졌다. 12세기에 듀브로브닉은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 총리(rector)에 의해 다스려졌다. 총리의 결정은 도시의 운용과 발전에 있어서 중추적이었다. 이 시기 시정 구조에 몇가지 변화가 발생하는데, 일단의 귀족 계급이 들어선다. 그들은 점차 도시의 모든 행정을 장악하고 전형적인 지중해의 귀족 공화국을 연다. 잘 조직된 해상교역체계로 듀브로브닉은 마침내 베니스와 겨루게 된다. 베니스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듀브로브닉이 자신의 경쟁자로 올라서는 것을 저지하였다. 1205년 듀브로브닉은 베니스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이후 150년 동안 베니스는 듀브로브닉을 지배한다. 베니스의 통치는 도시의 사회구조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듀브로브닉은 베니스에서 온 총리와 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듀브로브닉은 전형적인 귀족 공화국이었다. 모든 권력은 귀족의 수중에 있었다. 도시는 세 개의 계급, 귀족과 우등 시민 그리고 평민으로 나뉘어졌다. 총리가 이끄는 세 개의 평의회가 공화국을 이끌었다. 총리의 임기는 한 달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예약한 케이블카가 운행을 정지하였다. 대신 밴 차를 얻어 타고 우리는 전망대에 올랐다. ‘이곳이 유토피아다.’ 나는 그냥 그런 생각을 하였다. <유토피아>의 뜻은 ‘그런 곳은 없다’이다. 이곳에 와 보니 ‘그런 곳은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 풍광은 마치 완도의 약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청산 쪽 바다처럼 수려했다. 다른 것이 하나 있었으니, 듀브로브닉의 견고한 성벽과 집들이었다. 저 아름다운 중세의 도시가 세르비아의 폭격을 받았다니!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의 침공에 맞서 용감하게 저항하였다. 1992년도의 일이었던가? 듀브로브닉의 이 아름다운 성 안으로 폭탄이 떨어지자 프랑스의 한 지식인은 바다에 요트를 띄워놓고 해상 시위를 감행하였다고 한다. “야만이 중세의 유적을 폭격하고 있다. 유럽의 지성이여, 일어나라!”

우리는 성벽을 걸었다. 말이 성벽이지 듀브로브닉은 해변의 돌출부를 에워 쌓아 구축한 요새였다. 성벽은 절벽이었다. 영화 ‘빠삐용’에서나 보았던 그 파도가 바로 요새 밑에서 부서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면 망망대해이고, 고개를 돌리면 성안에 고요히 숨 쉬고 있는 중세의 고옥들이 옹기종기 누워있다. 폭 1미터의 좁은 성벽 위로 바닷바람은 거세게 불고 있었다. 약산의 전망대 주변에 이처럼 아름다운 성벽을 구축하여 해변을 노닐게 하면 어떨까.

크로아티아의 가게 주인들은 비수기의 시기엔 모두 문을 닫고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이 가게는 우리의 요청에 부응한 특별한 식당이었다. 살라드를 들었고, 오징어와 새우튀김이 나왔다. 우리는 또 와인을 한 순배 돌렸다. 서른 명의 대가족이 오순도순 이국의 점심을 즐겼다. 나는 나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책자 두 권을 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는 사라예보이다. 사라예보는 1972년 이에리사가 탁구 세계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던 곳이다. 어쩌다 보스니아가 내전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모스타르는 ‘오래된 다리’, 1556년 건설된 터키식 교량이다. 강 저편엔 성당들이 서 있고, 강 이편엔 이슬람 모스크가 서 있는 곳. 보스니아 주민의 40%가 이슬람교도이고, 36%가 정교도이다. 우리가 모스타르를 찾은 시각은 오후 5시, 빗줄기가 한 두 줄 뿌리고 있었고, 해는 지고 어둠이 다가오는 시기였다. 역사의 현장은 더욱 으스스하였다. 벽은 ‘그 날을 잊지 말자’(Don’t forget 1993.)고 호소하였다. 학살의 그 날 발포된 총탄으로 만든 볼펜을 가게들은 팔고 있었다. 모스타르는 배가 불룩하게 솟은 다리였는데, 그 모든 참극을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르비아인들이 정교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하기 시작하자, 함께 해로하던 다수의 부부가 등을 돌리고 가족이 찢겨져갔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1월 24일 디오클레시안 궁전에서 트로기 섬으로, 플리트비체로

오늘은 고대 로마의 유적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서양의 고대사와 중세사를 일이관지하고 싶은 나에게 디오클레티시안 궁전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유적이었다. 궁전은 해변에 서 있었다. 이곳이 아드리아 해안이므로 바다 건너편에 로마가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이곳에서 은퇴 후의 여생을 지내기로 한 것은, 스플릿이 그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자리를 놓고 장군들 사이에서 극악한 암투가 전개되었던 3세기 로마에서 살해되지 않고 살아남아 권좌를 후대에게 넘겨준 유일한 인물이다. 기독교도들에게 최후의 박해를 가한 황제이기도 하다. 295년부터 305년까지 10년에 걸쳐 건축된 이 궁전은 그리스와 이태리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시신이 누워있던 그의 영묘가 후일 기독교의 성당으로 변신한 것은 씁쓸한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황제의 노후는 소박하였다. 궁전의 규모는 아담하였고, 황제의 거실도 크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 해변이 보이는 궁전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고 한다. 우리는 궁전 밖 재래시장에 들러 눈요기를 하였다. 둥근 빵 모양의 치즈 덩어리를 하나 구입하고 싶었는데 어쩌다 살 기회를 놓쳤다.

점심은 한식집 ‘마루’에서 해결하였다. 된장찌개와 오이김치와 제육볶음이 나왔다. 한식에 굶주린 혜원이는 공기 밥을 세 그릇이나 먹었다. 된장찌개는 이상한 찌개였다. 유럽의 식품검사를 통과한 된장은 이상한 된장이었다.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라곤 자신과 부인 두 명 뿐이라며 주인은 타지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한다. 크로아티아 법에 의하면 식당에선 소주를 팔 수 없다. 한국 관광객이 밥을 먹고 버리고 간 소주병 때문에 벌금 2천 만 원을 물어야 했단다. 우리는 젊은 부부가 크로아티아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길 빌었다.

트로기 섬은 섬 안에 성이 있는 기이한 섬이다. 꼭 동화 속의 성이었다. 유럽에는 어쩌면 이렇게 예쁜 성들이 많을까? 물론 그 답은 명확하다.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였던 한국과 달리 유럽은 봉건제였던지라 가는 곳마다 귀족의 성들이 즐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것을 소중히 간직하여 후대에게 물려주는 그들의 자세를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다. 성안의 골목길을 걸으니 다시 바다가 나왔다. 어여쁘게 단장된 해변 길을 걸어가니 바다를 지키는 요새가 웅장하게 우리 앞에 섰다.

섬을 한 바퀴 걸었고 발걸음은 편의점으로 간다. 해는 지고 사방이 어둠에 싸인 시점 우리는 플리트비체의 호텔에 당도하였다.

저녁은 연어 구이가 나왔다. 식당 밖 길가엔 눈이 와 쌓여 있었다. 식당 안의 공기는 더운데, 문을 열고 나가면 공기가 차가웠다. 식후 1차 뒷풀이는 식당에서 하였고, 2차 뒷풀이는 호텔 로비에서 하였다. 정인경, 박인자님이 합류하여 자리를 메워주었다.

1월 25일 플리트비체 설경에서 야마 동굴로 보히니로

새벽에 일어나 아내와 함께 호텔 주위를 걸었다. 눈보라가 날렸다. 닥터 지바고의 시베리아 평원을 휩쓸었던 그 눈보라는 아닐지라도 쓸쓸함은 비슷하였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눈이 춤추었다. 길은 빙판이었다. 조심히 걸어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또다시 호텔 주변을 돌았다. 여기저기에서 회원들이 동행하였다.

눈이 이렇게 쌓여 있어 오늘의 여정이 일정대로 진행될 수 있을지 우리는 우려하였다. 안내원은 유능한 기사의 운전 실력을 믿어보자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모든 판단은 크로아티아 출신 기사에게 맡기자. 차는 씽씽 잘 달렸다. 눈길을 말이다. 언제 이렇게 눈이 왔나 우리는 눈을 의심하였다. 버스가 멈추어 서고, 일행들은 플리체비체 국립공원으로 들어갔다. 밤사이 푸짐하게 내린 눈은 제우스가 우리에게 준 축복의 선물이었다. “제우스야, 고마워”

눈길을 걸으며 웃으며 장난치며 사진을 찍으며 걸어간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폭포를 보러. 뷰 포인트 1에서 일행은 폭포를 찾아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나는 조금 내려가다가 올라올 일을 생각하여 중도에 멈추어 섰다. 서연정, 유인해, 박지선과 함께 사진 몇 장 찍고, 혼자 길을 돌아섰다. 뷰 포인트 2를 향하여 평지를 걸었다. 아무도 걸은 적이 없는 숲 속 눈길을 노래 부르며 걸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이원수 작시, 정세문 곡의 동요 ‘겨울나무’는 나의 애창곡이다. 혼자 미지의 곳을 걷노라면 따라오는 것이 있다. 두려움이다. 돌아서자. 한참 걸으니 저쪽에서 일행들이 시끄럽게 나타났다.

한병곤 부부는 신바람이 났다. 러브스토리를 연출한다. 중년의 부부가 눈바닥에 벌렁 누워 버린다. 늘 무거운 병곤이에게 저런 가벼움이 있다니….정은아와 박지선도 벌렁 누운다.

나는 눈을 퍼주었다. 플리트비체의 폭포를 본 사람은 더러 있어도 플리트비체의 설경을 본 사람은 없으리라…..이곳 빛고을에서도 무등산에 들어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설경이지만,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놀다온 설경은 영락없이 제우스가 마련한 찰라의 천국

이었다. 모두가 동심으로 돌아가 행복한 순간을 체험하였다.

함께 간 윤지와 윤정이는 초등학생이었는데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있어 동행자들의 평균 나이가 30대로 떨어졌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의 보배이다. 그들에겐 역시 동굴 속 열차 체험이 환상적이었나 보다. 포스토니아-야마 동굴은 그 규모가 경이적이었다. 열차를 타는데 꼭 피난민들이 몸을 부대끼며 오르는 열차 같았다. 이어폰에서는 이곳 동굴의 발견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슬로베니아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한 신생 국가이다. 이어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의 침공으로 많은 인명의 피해를 겪었으나 슬로베니아는 비교적 큰 애로를 겪지 않고 독립국이 되었다. 알프스 산맥의 남쪽 사면에 위치한 나라로서 소득 수준이 높다. 인구 200만 슬로베니아의 종교는 캐톨릭이다. 이슬람은 터키와 가깝고, 정교는 러시아와 가깝다면 캐톨릭은 서유럽과 가깝다. 우리가 블레드의 보히니 호텔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어둠이 지고 있었다. 스위스 어느 산장에 온 기분이었다.

지하 1층에 식당이 있었는데, 우리가 들어가니 테이블에 나이프와 포크가 배열되어 있었다. 안쪽 소형 공간이 우리의 식탁이었는데, 전기불이 자주 나갔다. 나는 호소를 하였고, 입구의 중형 공간으로 식탁을 옮겼다. 이번에는 저녁 와인을 문월식씨가 샀다. 하우스 와인이었는데 꽤 맛이 좋았다. 뒷풀이는 조별로 가졌다. ‘가’조는 두동 모임이고, ‘나’조는 교사 모임이고, ‘다’조는 철모이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가줘, 나줘, 다줘’라고 불렀다.

1월 26일 블레드에서 베니스로

호텔 앞에 보히니 호수가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호숫가로 내려가는데, 벌써 일행들은 돌아오고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 버렸다. 이제 우리의 여행을 정리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내일이면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것이다. 여정대로 우리는 블레드 호수를 찾았다. 블레드 호수를 내려다보는 요새로 갔다. 저 호수는 알프스의 빙하가 녹아내린 물이다. 이 요새는 1004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2세가 브릭센의 주교에게 하사한 건축물이다. 기이하게도 이 요새는 박물관이기도 하였다. 이 근처에서 발굴된 선사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이 요새 각 처소에 잘 비치되어 있었다. 10만 년 구석기의 사람들도 이곳이 명당임을 감지하였던 모양이다. 호수 안의 플레타나 성당이 보기에 아름다

웠다.

그림을 사고 싶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곳은 달력을 사는 편이 낫다. 열 두 편의 그림을 한꺼번에 사기 때문이다. 만족스런 캘린더를 구입할 수 있었다. 블레드 호수는 ‘다시 오세요’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버스는 슬로베니아의 출국 수속실을 향하였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여권 검색대를 통과하였고, 길가에 옹기종기 모여 버스를 기다렸다. 베니스를 향해 가는 버스는 평원을 가로질러 다녔는데, 오른편에 계속 알프스의 눈 덮힌 산을 보여주며 달렸다. 점심은 한식당이었다. 비빕밥을 먹었다. 나는 떡볶이 한 접시를 샀다. 붐볐다. 식당 벽엔 김홍도의 ‘장가가는 날’과 신윤복의 ‘목욕하는 여인들’이 걸려 있었다. 반가웠다.

자, 마지막 여정, 베니스로 간다. 꿈의 도시, 물의 나라 베니스. 갈릴레오가 배를 타고 손수 제작한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하던 그 베니스. 셰익스피어가 상인의 인색을 풍자한 그 베니스 말이다. 베니스 전문 안내원이 버스에 올라 해설을 시작했다. 좀 시끄러운 사람이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가로 질러 갔다. 왼쪽 섬엔 갯펄에 건물을 지어 침하하고 있는 인공 도시가 있고, 오른쪽엔 뭍에 건물을 지은 자연 도시가 있다. 가이더가 시끄러우니 베니스도 왠지 번잡해 보였다. 중세의 고풍스러움은 보이지 않고 근세의 상업성이 도드라져 보였다. 베니스의 배 곤돌라에 올랐다. 산타루치아를 부르고 싶었는데 가사가 가뭇하였다. 애라 모르겠다. ‘토요일 밤에’를 불렀다. ‘긴 머리 짧은 치마 아름다운 그녀를 보면 오, 토요일 밤에’ 곤돌라에서 목격한 베니스의 집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았다. ‘이 음습한 곳에서….’ 카사노바는 대법관의 부인과 사랑을 나누다 감옥에 투옥되는데, ‘당신의 법적 판단이 당신의 자의에 의거한 것이었므로 나도 내 자의에 의해 탈옥한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똑똑한 놈이다. 그 카사노바가 놀았다는 카페를 찾았다. 돌아오는 배에서 바라보는 베니스의 석양은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졌다. 고마도 앞 바다는 더 황홀한데…

1월 27일 베니스에서 모스크바로, 인천으로

간밤에 마신 베니스 와인을 잊어야 하는 시점이 왔다. 공항으로 이동하면서 여드레 동안 성심성의껏 운전하여준 크로아티아 기사 아저씨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좀 있으면 오스트리아에서 와서 우리의 발칸 기행을 총괄 지휘한 박태훈씨와 헤어져야 한다.

벗 임창로가 왜 박태훈씨를 소개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박태훈의 성실을 설명하기 위해선 한 가지 더 이야기할 게 있다. 일행들 모두가 티켓을 발부받고 출구를 향해 이동하는데, 나의 여권을 받은 이탈리아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한 시간이 되도록 나의 여권을 연구하고 있었다. 나는 박태훈씨에게 사태가 꼬이는 것 같다며 호소하였다. 알고 보니 베오그라드 공항에서 내가 입국했다는 데이터가 없다는 것이다. 베오그라드에 도착한 것을 컴퓨터에 입력할 의무는 항공사에 있지 고객인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항의하였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비행기가 추락할 확률보다 더 작은 컴퓨터 사고를 나는 당한 것이다. 새옹지마였을까?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보니, 나의 좌석은 비즈니스석이었다.

발칸 여행은 복합적인 여행이었다. 세르비아와 알바니아와 보스니아를 본 것은 내전의 현장 답사였다. 크로아티아의 듀브로브닉 성과 디오클래시안 궁을 본 것은 역사 관광이었다. 플리트비체 설경과 블래드 호수는 그야말로 영혼을 맑게 해 준 휴양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은 ‘빛을 보는 기쁨’을 줌과 동시에 민족과 종교의 엉킴에서 오는 인간의 야만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무거운 숙제를 안겨 주었다. 본 글은 리포트에 불과하다. 발칸에 대해 많은 공부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낀 여행이었다.

2015년 2월 8일 황 광우

황광우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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