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군주 영조와 정조는 왜 언권을 혁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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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사대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나쁘지 않은 곳이 없다. 붕당을 만들어 할 일 없는 사람들을 모으고 권세를 부려 가난한 백성들을 괴롭힌다.…… 같은 색목이 아니면 한 고장에서 함께 살지 못하고, 마을 안에서는 헐뜯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 옥사 이래 조정에는 노론 소론 남인 세 색목의 원한이 날로 깊어져, 서로 역적의 누명을 뒤집어씌우더니, 그 영향이 시골에까지 미쳐 싸움터가 아닌 곳이 없다.…… 같은 색목이면 하늘을 덮는 죄가 있어도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떼 지어 일어나 도와야 하고, 아무리 행실이 착하고 덕이 있어도 같은 색목이 아니면 그 사람의 약점부터 들추어낸다.”

<택리지>의 저자 청담 이중환이 3장 「복거총론」 중 「인심」 편에서 그린 18세기 초중반 조선의 사회상이다. “천지가 개벽한 이래 인심이 일그러지고 무너져 본성을 잃은 나라가 있었다 해도, 오늘날 붕당으로 인한 환난보다 더한 적은 없었다.…… 백만 백성이 장차 인간의 본성을 모두 잃어 구할 수 없을 터이니 이 또한 슬픈 일이다.”

인문지리서가 당쟁의 폐해를 장황하게 전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살 곳을 선택할 때 가려야 할 것이 인심의 좋고 나쁨, 기후의 건습 따위지만, 당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색목이었다는 한탄이다. 이중환의 충고는 이렇다. “사대부가 살지 않는 곳을 선택해서 두문불출하며 홀로 착하게 산다면 비록 농사짓고 물건 만들고 장사를 한다 해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쓰던 1751년 즈음 조정의 풍경은 판이하다. “근래에 와서는 사색이 조정에 함께 나가서 오로지 벼슬만 할 뿐이고, 옛날부터 지켜오던 의리는 고깔을 씌우듯 감추어 버렸다. 옳고 그름과 충신 역적에 대한 논란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피 터지게 싸우던 습관은 전에 비해 적어졌지만, 나약하고 게으른 새 병폐가 생겼다.”

영조의 탕평책이 나름 뿌리를 내리던 시절이었다. 이중환은 이런 변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경신년(1741년) 전랑권 혁파를 꼽았다. “경연에 참석한 신하들이 붕당의 분열은 전랑에서 시작되었으니 전랑의 권한을 없애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했다.”

영조17년 4월19일의 일이었다. “임금이 늘 조정의 붕당을 근심하였는데, 이조 낭청과 한림을 선발할 때면 두 당에서 서로 싸우기를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그들의 하는 짓을 싫어하고 미워하여 경장할 뜻을 갖고 있었다. 마침 송인명 조현명 원경하 정우량 등 여러 사람이 극력 찬성하니 임금이 혁파를 명했다.”(󰡔영조실록󰡕) 전랑의 3사 당하관 인사권(통청권)과 예문관 사관의 사관 추천제(한림회천제)를 없애라고 한 것이다.

영조가 밝힌 혁파의 이유는 이렇다. “붕당의 행태가 신하들을 함몰시키고 기강 문란을 초래하고 있으니 신하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편당 만드는 것뿐이다. 폐단을 바꾸려고 한다면 마땅히 그 근본을 바로잡아야 한다. 낭청(정3품 이하 관리)의 통청을 먼저 혁파해야 하며, 야료의 온상이 된 한림의 추천제도 마찬가지다.” 영조는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그대들은 사사로운 뜻을 위해 감히 저지하거나 방해하지 말도록 하라.” 영조가 스스로 꼽은 4대 치적 가운데 첫째와 둘째가 전랑(정랑과 좌랑)의 통청권과 한림회천제 혁파였다.

조선은 언론을 중시했다. 백성을 근본(민본)으로 삼아 오로지 백성을 위한 정치(위민)를 하려면 꼭 필요한 게 권력자에 대한 성역 없는 감시와 견제를 위한 언권이었다. 조선은 개국 초기 심지어 풍문만으로 관리를 탄핵할 수 있는 풍문 탄핵까지도 허용하며 이를 실천하려 했다. 중요한 것은 언론의 독립성이었다. 최고 권력인 국왕은 물론 당상관 권력자의 부당한 간섭이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했다. 그러자면 요체는 인사권 확보였다.

조선의 언론은 사간원(간쟁), 사헌부(관리에 대한 검증 및 감찰), 홍문관(학문) 등 3사의 당하관과 사초를 기록하는 예문관 사관이 맡았다. 이들 언관의 독립성을 위해 도입한 것이 낭청권 (전랑이 3사의 언관을 추천하는 통청권, 전랑이 독립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하도록 전랑이 자신의 후임자를 추천하는 자대권)이다. 전랑은 이밖에 3사 언관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을 경우 공론을 수렴하는 처치권을 행사했다. 낭청권은 중종 11년 조광조 등 신진사림의 요구로 제도화됐다. 당시 중종은 훈구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청요직에 적극 기용했고, 이들의 독립성을 대폭 강화했다.

이때 내세운 게 ‘공론재하(공론은 아래에 있다)’의 원칙이다. 공론은 백성에게 있다는 것으로 공론정치의 철학적 토대였다. 물론 언관이 대변한 것은 백성의 여론이 아니라 사림의 의견이었다. 그렇다고 여론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훈구 및 외척세력과 사림이 대결할 때 사림의 공론은 백성의 여론과 다르지 않았다. 명종 때까지 온갖 비리를 저지르던 훈구 척신과 맞서던 사림의 가장 큰 힘은 언권이었다.

선조 때부터 사림이 조정을 주도하면서 언관의 행태가 변질됐다. 붕당이 생기고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1575년 동서분당은 바로 그 언관의 인사를 독점하던 이조 전랑 자리를 둘러싼 각축에서 비롯됐다. 이때부터 언권은 공론이 아니라 붕당의 당론을 대변하고, 권력에 대한 견제가 아니라 상대편을 탄핵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조선 5백 년 최대의 사건이라던 기축옥사, 광해군 대의 고변과 무고의 정치, 이념적 주도권을 노린 문묘종사 논란과 회퇴변척 논쟁, 현종 대의 을해예송 및 갑인예송 등은 붕당의 언관에 의해 주도됐다.

숙종 대로 넘어오면서 당쟁은 아예 살육전으로 타락했다. 공론정치는 허울뿐이었다. 숙종은 갑인예송을 빌미로 갑인환국을 단행했다. 환국이란 왕이 주도한 급격한 정권교체다. 숙종은 오로지 권력투쟁에 몰두하던 붕당의 행태를 이용해 왕권을 강화했다. 당시 당쟁이 얼마나 타락했으면,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남인 박멸’을 위해 사림이 지켜온 의리를 버리고, 김석주 등 척신의 정탐정치와 고변을 옹호하고 지원하기도(경신환국) 했다. 이는 노소 분당의 원인이었다. 숙종은 특정 붕당이 비대해져 왕권을 흔든다 싶으면 집권세력을 교체해버렸다. 1674녀 갑인환국으로부터 1727년 정미환국까지 무려 9번이나 정권은 뒤집어졌고, 그때마다 대규모 숙청과 살육이 이루어졌다.

<택리지>가 전하는 시대상이었으며 영조가 추진한 탕평책의 시대적 배경이었다. 탕평은 사색당파에서 인사를 고루 기용하는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었다. 당쟁의 총구인 언관의 횡포를 막아야 했다.

영조는 그리하여 낭청권 등을 혁파했지만, 말년 혼미해지자 노론 대신의 등쌀에 밀려 낭청권을 부활했다. 그것을 최종적으로 없앤 것은 정조였다. 정조는 영조와 마찬가지로 언관들의 공리공론과 무고, 고변 따위에 넌더리가 났다. 정조8년(1784)년, 청요직에서 노론의 입으로 잔뼈가 굵은 김하재 옥사가 발생했다. ‘사도세자가 죄인이므로 정조도 죄인인다’ ‘정조가 사림을 주살하려 한다’ 등의 흉언을 담은 쪽지를 돌린 게 문제였다. 정조는 조정 신료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하재 한 사람만 처형하고 증거물인 쪽지는 불에 태우도록 했다. 쪽지가 공개될 경우 당쟁이 재연하고 대규모 살상극이 벌어질 것을 우려했다.

정조는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며 딴지를 거는 노론 벽파의 영수 김종수에게 은밀하게 ‘금등비서’ 일부를 보여줘 입을 막기도 했다. 이 비서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영조가 후회하는 마음을 담은 서한으로 도승지 채재공을 통해 정조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이 문서 역시 공개될 경우 벽파와 시파의 갈등은 폭발할 게 자명했다.

김하재 옥사로부터 5년 뒤 정조(정조실록 정조13년 12월8일치)는 결단한다. 판중추부사 채재공이 나섰다. “전랑에 대한 옛 제도를 다시 설치한 뒤에는 단지 다투는 단서가 나날이 심해지고 사의(私意)가 날로 자라는 것만 볼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조종조에 누차 설치하였다가 누차 혁파한 것이, 폐단의 근원을 환하게 살핀 데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관방(官方)으로 말하더라도 전랑은 극도로 신중히 고르는 후보입니다. 이 임무를 한 번 지내기만 하면, 비록 총재(冡宰)나 의정부에라도 무엇 하나 구애될 것이 없어집니다. 한 대(代)에 설령 적합한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서너 명에 불과할 뿐인데도, 무상하게 교체시키고 빈번이 새 후보를 내곤 합니다. 겨우 홍문관을 거치기 바쁘게, 대뜸 전례를 따라 돌아가면서 추천하는 자리가 되니, 최초에 설치한 의도가 어찌 그런 것이었겠습니까.”

정조가 신하들에게 물으니, 서유린 정창순 심이지 등이 모두 혁파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시 설치하는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단연코 알았지만, 이미 설치한 뒤에는 혁파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그대로 끌어왔다. 마침 말이 난 김에 경의 말을 들으니, 내 생각과 꼭 들어맞는다. 신중치 못하다는 혐의에 어찌 구애되겠는가. 이조의 낭관에 대하여 다시 설치했던 규정을 혁파하도록 하라.”

언관의 타락은 사실 독립적인 인사권과 면책특권 자체의 문제보다는 이런 특권을 이용한 언관의 권력화에 있었다. ‘무제한의 언론 자유’를 앞세워 스스로 권력이 되고, 붕당의 칼이 된 것이다. 붕당은 자파 언관들을 앞세워 당론을 관철하고, 고변과 무고를 통해 상대편을 저격했다. 이렇게 공론정치를 악용한 결과 숙종 대에 이르러 국왕의 처분에 온전히 맡기는 환국 정치를 초래했고, 결국 영조 정조에 이르러는 언권 자체가 혁파 당하기에 이르렀다.

4.15총선을 두고 몇몇 평자들은 대한민국의 주류가 보수에서 진보로 바뀌었음을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소가 하품할 소리다. 새삼 들출 이유는 없지만 이 사실만은 상기해야 할 것 같다. 훈구세력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언론(족벌 매체, 사간원)을 운용하고 있고, 감찰과 탄핵기관(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 사헌부)과 유착해 있으며, 여론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주류 학계(홍문관, 대학)를 주도하고 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최고 권력인 재계와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행정관료 역시 음으로 양으로 이들을 지원한다. 평소 공론은 훈구 카르텔 바다에 떠 있는 조각배에 불과하다. 선거를 통해서나 각성된 시민의 지원을 받을 뿐이다.

바뀐 것은 시민들이 과거처럼 훈구 언론들에 마냥 속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언론들이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혈안이라는 것을 잘 안다. 코로나19 재난 속에서 치러진 총선 과정에서 남김없이 드러나, 이들의 저 황당한 왜곡과 조작, 고변과 무고는 이런 각성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됐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그들은 국민적 재난을 정치화하여 정쟁에 이용하고, 정권심판론을 겨냥한 가짜뉴스의 대량생산 유포로 국가를 혼란에 빠트리려 했다. 중국 봉쇄를 하지 않아 코로나19가 창궐했다는 잠꼬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세계건강기구마저 혐오 및 차별이라 규정한 ‘우한폐렴’을 고집했다. 일부 중국인들이 온라인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한다는 ‘차이나 게이트’까지 제기했다. 이 정부의 태도를 ‘친북’과 같은 종류의 ‘친중’으로 내모는 신형 색깔론이었다.

한국산 코로나 진단키트를 미국 FDA가 사전 승인한 것을 가짜뉴스라고 단언하는 가짜뉴스를 만들어 퍼트렸으며, 서울 마포보건소가 외국 거주자의 검사를 거부했다는 가짜뉴스를 유포했다. 선거일 직전 ‘정부가 코로나19 검사 금지하고 있다’는 한 의사의 거짓말을 확인도 하지 않고 보도해 불신을 야기했다. 심지어 이들이 저주해 온 민주노총이 ‘코로나 판국에 딸기체험’을 했다며 가짜뉴스를 퍼 날랐다. 이들은 국민이 도탄에 빠지건 말건, 나라 경제가 파탄나건 말건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노력이 실패하도록 해서 여당의 선거 참패를 유도하려 했다. 오죽했으면 서방언론은 ‘한국정부를 비난하는 것은 한국인밖에 없다’고 지적했을까.

호주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로위연구소가 운영하는 <The Interpreter>는 4월 27일 이런 글을 올려다. “북한 주민들은 정권이 통제하는 선전(언론)의 노예가 되고 있지만, 한국은 언론의 위기에 처해있다.…… 가장 큰 언론사들은 언론의 자세를 망각한 게으름, 그리고 과거 권위주의 시대부터 내려오는 부패로 인해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주류언론을 북한의 선전 매체에 비교한 것이 이채롭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올해 발표한 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은 180개국 가운데 42위로, 아시아에선 1위를 기록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70위에서 30계단 뛰어올랐다. 권력으로부터 언론 자유는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사주로부터 언론 자유는 낮은 점수를 받아, 평균 점수가 깎였다. 그럼에도 이 정부는 ‘붕당의 총구 노릇이나 해온’ 족벌언론의 종합편성TV 채널을 재승인했다. 선출된 대통령, 60% 국회 의석을 거머쥔 정권도 어쩌지 못하는 막강한 권력이다.

왕조에서처럼 권력이 언론 자유를 함부로 혁파할 순 없다. 스스로 권력이 되어 붕당의 총구 노릇이나 하는 족벌언론을 혁파할 수 있는 건 시민이다. 권력은 공정한 심판 노릇을 하면 된다. 21대 총선 결과가 우리에게 기대를 갖게 한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시민의 혁파 의지를 확인했고, 정부에는 족벌언론에 휘둘리지 않을 힘, 공정한 처분을 할 수 있는 신뢰를 줬다. 주저해선 안 된다.

곽병찬
전 한겨레신문 대기자. 이 시대 인문의 승묵(繩墨), '향원익청(香遠益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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