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대장 기삼연 선생의 묘를 참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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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이것이 의병장 기삼연 선생의 묘소를 찾아 나선 내가 확보한 정보의 모든 것이었다. 광주에서 장성으로 가는 길은 순탄하였다. 차는 하서 김인후의 필암 서원을 지나 홍길동 테마파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곡리에만 가면 금방 기삼연 선생의 묘소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현실은 달랐다. 아곡리는 넓었고, 안내판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묘소의 주소지를 알아내기 위해 장성군청에 전화를 하였다.

“기삼연 선생의 묘소를 보러 왔습니다. 주소지를 알고 싶습니다.”

“기삼연이 누구죠?”

답변은 의외였다. 공무원이 의병장 기삼연을 모르다니…. 문화관광과 담당 공무원을 연결해 줄 것을 부탁했다. 어렵게 아곡리의 묘소 지번을 확보하였으니 하남마을 산 30-3번지였다.

묘지는 헤매던 곳에서 불과 1분 거리에 있었다. 차를 세우고 오솔길을 걸었다. 산 중턱엔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기삼연의 비석은 보이지 않았다. 십여 기의 묘를 다 확인하였으나 기삼연은 없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였다. 이럴 수가?

오를 때의 기대가 허탈로 바뀌던 그 순간 다시 한 가닥 희망이 떠올랐다. 기삼연의 묘가 200m 거리에 있다는 입구의 안내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저 산 어딘가에 성재(기삼연의 호)의 묘소가 있다는 것 아닐까?

다시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솔길은 비탈길이었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 나와 같은 장애자에겐 우호적이지 않은 길이었다.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 있는 성재 기삼연 의병장 묘지 안내판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한 굽이 돌아서니 새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묘지의 안내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반가웠다. 선생의 일대기가 적혀 있어 읽어 보았다. “선생은 이튿날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광주천 백사장에서 일본군의 칼에 왼팔이 잘리고 머리에 총 관통상으로 순국하였다.”

묘 앞에 섰다. ‘호남창의영수성재기삼연선생지묘’(湖南倡義領袖省齋奇參衍先生之墓)라 새겨져 있었다. 우두머리 영수(領袖)라는 칭호가 눈에 띄었다. 나는 묵념을 하였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 있는 성재 기삼연 의병장 묘소

돌아오는 길은 왠지 허전하였다. 어느 후손이 장성 이 깊은 산속에까지 찾아와 참배를 할까? 나부터가 부끄러웠다. 명색이 ‘의향 광주’인데 왜 광주엔 선생의 동상도 기념관도 없는 걸까? 이러면서 ‘광주정신’을 말할 수 있나?

농성광장에 가면 김준 의병장의 동상이 있다 하여 택시를 타고 농성광장에 갔다. 택시 기사는 농성광장은 잘 알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농성광장에 김준 의병장의 동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가보니, 동상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 저 동상을 누가 와서 볼 것이며, 동상을 본들 김준 의병장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까?

김준 의병장은 기삼연 대장이 죽은 후 호남창의회맹소를 이끌고 나갔던 의병장이었다. 기삼연이 초대 대장이라면 김준은 제2대 대장이었다. 1908년 1월 1일 무등산 무동촌에서 왜적을 격파한 의병장 김준은 1908년 4월 25일 어등산에서 전사하였다.

전북 장수에 가면 의병장 전해산의 기념관이 있다 하여 달려가 보았다. 전해산은 김준의 사후 김준의 부대를 이어받은 의병장이었다. 제3대 대장이었던 셈이다. 장수에 가보니 전해산의 기념관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동상도 우뚝 서 있었다.

장수를 보니 또 씁쓸하였다. 자꾸만 ‘의향 광주’의 못난 모습이 도드라져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광주 시민을 향해 꾸짖는 것 같았다. “‘의향 광주’라며? 근디 의병 할아버지들은 잊고 살아?”

기삼연 의병장이 총살당한 그 자리, 광주 공원 앞 천변에 우뚝 선 기삼연 동상을 꿈꿀 수는 없을까? 김준 의병장이 총살당한 그 자리, 어등산에 잘 정돈된 김준 기념관을 꿈꿀 수는 없을까?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 상임 이사 황광우

출처남도일보
황광우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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