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제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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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폐가가 되어버린 곳이 광주 신역이다. 1969년 기차가 이곳을 씩씩하게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많이도 퍼 나른 곳이다. 신역에 내리면 입구에 ‘의향 광주’라고 새긴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오랫동안 나는 그 말의 뜻을 몰랐다.

광주가 왜 의향인가? 한때 서울 사람들이 광주를 ‘민주 성지’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광주가 의향인가? 또 1929년엔 이곳 학생들이 항일 투쟁의 앞장에 나섰다. 이후 전국의 학생들이 항일 투쟁의 대열에 동참하였던 지난 일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광주의 역사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향 광주’라는 호칭에 낯설었다. 왜 광주가 의향인지 선뜻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의향 광주’에서 사용되는 광주는 호남의 동의어이다.)

나는 고교 시절에 박정희를 반대하는 시위로 경찰서와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1980년 광주 항쟁을 전후로 하여 오랜 시일 투옥과 수배의 꼬리표를 달며 살았던 내가 정작 ‘의향 광주’를 설명할 수 없었다는 것은 결코 허언도 엄살도 아니었다. 광주 산수동에서 태어났고, 광주 계림동에서 자란 내가 정녕 ‘의향 광주’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 분명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유는 있었다.

성재(省齋)는 경무서에 갇혔다. 풍설에 의병이 사방에서 몰려온다고 하니 적은 놀라 겁을 먹고 장수를 총살했다. 성재는 죽음 앞에서 의연하여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시 한 구절을 읊었다. 들었던 이에 의하여 아래 구절을 얻었다. 성재가 읊은 시는 이렇다.

“군사를 내었다가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해를 삼켰던 전년의 꿈도 또한 헛것이로다.” 성재는 전년에 집에 있을 때 붉은 해를 삼킨 꿈을 꾸었다. 꿈을 깨고 나서 스스로 해몽하였다. “붉은 해는 처음 뜨는 해이고 해 뜨는 곳은 일본인데 내가 해를 삼켰으니 이는 매우 큰 꿈이다.” 왜놈을 물리치는 것은 나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며 자부하였다. 그래서 시에서 이 말을 한 것이다.

囚警務署風說義兵四至 賊恇懼遂害將就死 從容無幾微色 詠詩一節 聞者 只得其下句 其詩曰 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 蓋昔年家居夢呑紅 日 自觧曰 紅日初出之日 日出處是日本而爲我所呑 其是大夢 自負其亡 倭由余也 故詩及之

이 글에는 두 분의 의병장이 관련되어 있다. 한 분은 경무소에 갇힌 성재 기삼연 선생이다. 선생은 1907년 장성 수연산에서 선봉 김준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를 조직한 회맹소의 대장이었다. 다른 한 분은 기삼연 선생의 의로운 삶을 기리고자 이 전(傳)을 남긴 송사 기우만이다. 기우만과 기삼연은 모두 노사 기정진의 후손이었고, 1896년 의병 제1차 거의를 주도한 호남의 대표적 의병장들이었다. 성재 기삼연 의병장이 왜놈에게 체포되어 광주공원 앞 천변 백사장에서 총살을 당한 것은 1908년 1월 2일이었다.

광주 사람 안규용이 관을 갖추어 염을 하였고, 광주부의 서쪽 탑동에 임시로 빈소를 차렸다.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옆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겼다. 규용은 이렇게 말했다. “이 때문에 화를 당한다면 마땅히 웃으면서 땅에 들어가리라. 이 세상에 훌륭한 가르침을 붙들어 세운 공이 있는 이의 뼈를 모래밭에 굴러다니도록 두겠다는 것인가?”

큰일을 하고 목숨을 초개처럼 내놓는 선비가 있는가 하면, 그 장부의 시신을 남몰래 수습하는 선비가 있었다. 녹천 고광순의 무덤에 흙을 덮어준 이는 황현이었는데, 지금 천변 백사장에 널려 있는 기삼연의 시신을 수습하여 제를 올린 선비는 안규용이었다. 기우만은 안규용을 광주 사람이라고 적었으나, 지난 ‘미지의 초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회봉(晦峰) 안규용은 보성의 큰 학자였다. 연재 송병선의 문하였고, 송사 기우만과도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다.

그런데 예전에 <호남 의사 열전>을 읽을 때 안규용 석자의 이름이 나에게는 읽히지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던가? 이제 안규용의 내력을 조금 알고 나니, 문장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화를 당한다면 마땅히 웃으면서 땅에 들어가리라. 훌륭한 가르침을 이 세상에 붙들어 세운 공이 있는 이의 뼈를 모래밭에 굴러다니도록 두겠다는 것인가?” 올바른 일을 위해선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안규용의 의기가 다가온다.

기삼연의 시신을 수습한 안규용은 서울로 끌려 올려가는 송사 기우만을 호위하기도 하였다. 역시 예전엔 눈에 들어오지 않은 구절이었다. 알고 나니 다음의 문장이 살아서 나에게 다가온다.

3월 28일(1907년) 서둘러 압송하였다. 선생은 길을 떠나자 왜놈은 말을 준비하여 타라고 청했는데 선생은 거절했다. 영산포에 당도하자 갑자기 하늘이 캄캄하고 비바람과 우레가 내리쳤다. 이튿날 배에 올랐다. 아들 낙도, 숙도, 조카 근도, 족인 두섭, 문인 안규용과 집종 순팔이 모시고 갔다.

4월 1일, 목포 경무서로 들어갔다. 무안의 여러 사람들이 술을 가지고 경무서로 들어와 선생을 위로하였다. 함께 동행하는 안규용에게 말했다. “해상의 경치가 전일 꿈속에서 본 그대로이네. 오늘 그대와 함께 동행하게 되니 혹시 예감한 것이 아닌가?”

송사 기우만은 정재규와 곡성 도동사에서 2차 거의를 모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서 경찰서에 구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1906년 10월 16일 광주 경무관에 수감되었다. 이제 광주에서 영산포를 거쳐 서울로 압송된다. 이때 송사 기우만과 동행을 한 선비가 안규용이었다. 기우만과 안규용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기우만이 서울의 감옥에서 풀려난 것은 1907년 4월 20일이었다.

 

그해는 참 고통스런 해였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낸 죄로 고종이 퇴위를 당했고, 이어 군대가 해산되었다. 그 누구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왜놈의 노예로 사느니 죽을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마음이 아프고 한스러워 잠자고 밥 먹는 것이 달지 않았다. 짐승처럼 사는 것이 사람으로 죽느니만 못하다 여기고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한 놈의 원수라도 죽이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생각하였다.”(의병장 김용구)

의병으로 싸우다 죽으리라 결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의병을 모아 부대로 조직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총기와 탄약과 실탄을 조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군량과 자금을 마련하는 일은 더욱 곤란한 일이었다. 이 일을 해 낸 초야의 선비가 있었다. 장성의 선비 성재 기삼연이었다.

1907년 9월 24일, 장성의 수연산에선 수백여 명의 의병들이 깃발을 들고 결의하였다. 돼지 피를 마시며 맹세하였다. “빼앗긴 나라를 찾자.” 마침내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되었고 기삼연이 맹주로 추대되었다.

이후 기삼연 의진은 고창과 영광에서 왜적과 접전하여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마을에서 마을로 입에서 입으로 기삼연의 이름이 퍼져갔다. 그런데 일본 토벌대는 담양의 추월산성을 포위, 기습하였고, 기삼연은 여기에서 그만 발에 부상을 입었다. 걸을 수가 없어 엉금엉금 기었다. 1907년 12월 기삼연은 순창에 숨었다.

1908년 1월 1일 설날 왜놈들은 기삼연을 체포하였다. 담양에서 광주로 가는 길에서 보는 이들 중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고, 가마를 메고 가는 이들 또한 눈물을 흘리느라 잘 가지 못했다. 이후 정식 재판 과정도 없이 광주천변 백사장에서 총살되었다. 광주 사람들은 기삼연의 처형 소식을 듣고 방에 불을 피우지 않았고, 함께 울었다고 한다.

100년 전 왜놈들은 기삼연을 폭도의 거괴(巨魁)라 불렀지만, 광주 사람들은 선생을 의병의 영수로 숭모하였을 것이다. 선생은 광주의 대표였고 광주의 정신이었다. 광주천과 광주공원은 어린 시절 나의 놀이터였는데 이곳 광주공원 앞 천변 백사장이 기삼연 선생께서 왜놈의 총에 처형된 곳이었다니 나는 절로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광주의 진실을 왜 이제야 아는가?

이때 선봉장 김준이 군사를 나누어 창평 무동촌에 이르러 이름난 왜장 길전(吉田)을 죽이고 샛길로 돌아오다가 중도에 성재 기삼연의 피체 소식을 듣고 정병(精兵) 30명을 뽑아 급파하여 경양역(景陽驛)에 이르렀으나 이미 지나간 뒤였다.

(于是先鋒金準分陣 至昌平舞童村 殺名將倭吉田 間道還道中聞奇 選精兵三十 急足至景陽驛已無及矣)

황광우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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