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 대신 권력 독점 추구하다 몰락한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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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8년(1616년) 12월 전라도의 한 젊은 유생의 상소가 조정을 뒤흔들었다. ‘신경희의 옥’으로 능창군까지 처형된 뒤였다. “지금 예조판서 이이첨의 하는 짓은 괴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당시 이이첨은 왕조차 버거워하는 최고 권력이었다. 상소는 이렇게 이어졌다.

“근래에 전하의 팔다리 노릇을 하고 귀와 눈 역할을 하며 목구멍과 혀 노릇을 하는 관원들이나, 일을 논하고 규율과 질서를 세우고 인재를 선발하는 일을 맡은 이들 가운데 이이첨의 복심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무릇 지금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올리는 말이나 홍문관에서 나온 간단한 상소문도 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문무관을 뽑는 이조 병조에서 추천하는 사람들 또한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관학의 유생에 이르러서도 그의 파당이 아닌 자가 없으며, 따라서 관학의 상소 또한 겉으로는 곧고 격렬하지만 속은 실제로 아첨하며 빌붙는 내용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필자는 태학(성균관)생 윤선도였다. 일개 학생이었지만, 그 내용이 얼마나 정곡을 찔렀으면 이이첨은 한동안 문밖 출입을 자제하고 집안에 칩거했다고 한다. 이이첨의 꼭두각시로 간주당한 것에 발끈한 광해군은 윤선도를 즉각 함경도로 유배했다. 논란이 잦아들자 이이첨은 다시 칼을 빼들었다. 준동하는 잔당의 뿌리를 뽑아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인목대비 폐모론이었다.

광해군에게는 두 가지 콤플렉스가 있었다. 하나는 서자 출신의 왕이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서자 중에서도 둘째라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세자 책봉에서부터 왕위 승계에 이르기까지 온갖 시달림을 당했다. 선조 말년엔 폐세자 논의가 공공연했고, 3살밖에 안 된 적장자 영창대군에게 왕위가 승계될 뻔한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승계한 뒤에도 영창을 지지하는 대신들은 명나라 조정을 끌어들여 광해의 왕권을 흔들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7년 전쟁 동안 명나라로 도망갈 궁리나 하던 선조 대신 사직과 국가를 지켰다. 전후에도 전후복구를 위한 혁신에 앞장서는 등 개혁군주로서 자질을 충분히 보여줬다. 그러나 왕권의 문제에 관한 한 병적인 집착과 피해의식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이는 광해군을 몰락으로 이끌었다. 길잡이 노릇을 한 게 이이첨이었다. 그는 광해군의 불안을 이용해 권력을 전횡했다. 말년엔 광해군조차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다. 오죽했으면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에서 달아나면서 “(반란은) 이이첨의 짓인가”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이이첨은 집착이 강했다. 1560년에 태어난 그는 22살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광릉참봉을 거쳐 현감 재직 중이던 159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44살 때 성균관 사성으로 재직하면서 중시 갑과 장원으로 급제했다. 대과 입시기관인 성균관 교원으로 있으면서 제자들과 함께 시험을 치러 장원을 한 것이었다.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던 이극돈의 후손으로서 유림의 배척을 이겨내는 데는 ‘장원’이라는 관록이 필요했다.

재주와 집념은 특별했지만 그를 거두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를 유일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남명 조식의 제자 정인홍이었다. 강개한 의병장이었던 정인홍은 죽음을 무릅쓰고 세조 어진을 지킨 그를 애틋하게 챙겼다. 이이첨은 정인홍의 줄을 잡고 동인에 발을 디밀었고, 1592년 광해군 세자 책봉 건의와 관련한 정철 처리 문제로 동인이 남북으로 갈라질 때 북인의 편에 섰다. 임진왜란 중 왜와 강화를 추진하던 유성룡 등 남인을 밀어낼 땐 전위대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북인이 1599년 홍여순의 대제학 임명 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할 땐 정인홍을 따라 대북의 편에서 소장파(소북)를 공박했다.

거듭되는 권력투쟁 속에서 이이첨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 1608년 선조의 후계를 놓고 대북과 소북이 정면충돌할 때는 정인홍과 함께 대북을 이끄는 존재가 되었다. 선조는 16년 동안 세자로서 자신을 보필했던 광해군 대신 세 살배기 영창대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영의정 유영경 등 소북의 지도부가 이런 선조의 마음을 읽고 영창대군을 밀고 있었다. 이 염치없는 선택에 소북 모두가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기자헌 남이홍 등은 광해군 승계를 주장했는데 이 일로 소북은 유영경의 탁소북, 기자헌 등의 청소북으로 분열했다.

이이첨은 정인홍과 함께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광해군 승계의 당위성을 정면에서 주장했다. 선조는 발끈했고, 탁소북의 탄핵을 받아 이이첨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가 이틀 동안 미적거리며 출발을 미루는 사이 선조는 사망했다. 유영경 등 선조의 일곱 고명대신은 선조의 선위 교서까지 감추면서 광해군 승계를 막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지만, 선조의 뜻을 확인한 인목대비가 언문 교서로 광해군 승계를 확인함에 따라 천지는 뒤바뀌었다. 이이첨은 하루아침에 광해군 정권의 총아로 떠올랐다.

광해군은 집권하자 일곱 대신과 탁소북을 조정에서 몰아냈다. 이원익(남인) 등을 영입해 대북, 남인 그리고 이항복(서인) 기자헌(청소북) 등으로 이루어진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연합 정치를 추진했다. 이이첨은 예조판서 겸 대제학으로 광해군의 왕권을 보위하는 역할을 했다. 광해군 즉위년 유영경 등의 사주로 명나라가 왕위 계승 과정을 조사하기 위한 사신을 파견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광해군의 친형이자 서장자인 임해군이 문제였다. 이이첨은 임해군이 모반을 도모한다는 고변을 일으켰다. 그가 장악하고 있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3사를 동원해 임해군의 처단을 주장했다. 결국 임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돼 그곳에서 의문사했다.

이이첨은 고변과 무고의 효과를 깨달았다. 이후 도전세력의 제거에는 고변과 무고가 이용됐다. 정통성 문제로 시달리던 광해군으로서는 불감청고소원이었다. 임해군 다음 표적은 한때 선조가 광해군 대신 염두에 두고 있었던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이었다. 1612년 김직재의 옥을 일으켜 진릉군과 함께 그를 추대하려 했다는 이유로 소북을 일망타진했다. 옥사에 연루된 이들에게 고변하게 하여 소북의 100여 가문을 숙청했다. 임해군은 성정이 포악하고 언행이 방자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가 없었지만, 김직재의 옥 이후부터는 광해군과 이이첨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다.

1613년엔 계축옥사를 일으켰다. 그해 봄 일어난 일곱 서자의 강도질(칠서의 옥)을 이용해, 영창대군을 겨냥한 옥사를 일으켰다. 이이첨은 칠서 가운데 한 사람인 박응서로 하여금 ‘서얼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이를 빌미로 수괴로 지목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세 아들이 처형됐다.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 영창대군의 폐서인에 반대하던 이덕형 이항복 신흠 이정구 김상용 등 서인과 남인 잔존세력이 숙청됐다. 영창대군은 이듬해 유배지에서 이이첨의 심복인 강화부사 강항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제 대북의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숙청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1615년엔 소명국의 고변을 이용한 신경희의 옥을 일으켰다. 능창군이 표적이었다. 당시 시중에는 ‘정원군(능창군의 아버지)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느니 ‘능창군(인조의 동생)의 기상이 비범하다’ 따위의 항설이 나돌았다.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돼 죽임을 당했다.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을 허물고 궁궐(경덕궁)을 지어 서기마저 가로채려 했다.

윤선도의 병진소는 이런 시점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이이첨이 고변을 얼마나 악용했으면, ‘이웃집의 숟가락이 자기 것보다 크기만 해도 고변이 있’었다(유몽인). 거짓 고변을 한 자는 처벌당하지 않고, 지목된 사람만 처벌받았기에 너도나도 고변에 열을 올렸다. 장령 배대유는 이렇게 개탄했다. “김덕룡이라는 자는 간음하다 붙들리자 고변했고, 김언춘은 도둑질하다 붙들리자 모역을 고변했다.”

권력 독점의 대미는 인목왕후 폐모론이었다. 이이첨은 계축옥사 때 태학(성균관)생 이위경 등을 사주해 폐모소를 올리도록 했었다. 그가 과거를 주관하는 자리에 있었으니 태학생들은 그의 사주에 손쉽게 놀아났다. 패륜의 비난이 부담스러웠던 광해군은 ‘국모를 흔드는 죄가 윤리와 기강에 관계된다’ 하여 오히려 상소한 자들을 징계했다.

이이첨은 1617년 다시 폐모론을 전면적으로 전개했다. 11월 전현직 관리 1000여명과 종실 170여 명을 동원했다. 이듬해 1월에는 우의정 한효순 주도로 폐모를 논하는 정청을 열었다. 광해군은 피하고 싶었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나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이다지도 한결같이 혹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인가. 차라리 신발을 벗어버리듯 인간 세상을 벗어나 해변가에나 가서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다. 나의 진심을 살펴 연민의 정을 가지고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이제 광해군은 이이첨을 누를 수 없었다. 5월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서궁(경덕궁)에 유폐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이첨은 이것도 성에 안 차 심복 백대형을 시켜 인목대비를 암살하려 했다. 대북 안에서도 폐모를 반대하던 기자헌, 정창연, 유몽인 등 ‘골북’, ‘중북’은 숙청됐다. 남은 건 이이첨 추종세력인 ‘육북’ 뿐이었다.

이이첨의 잠재적 도전자에 대한 숙청은 계속됐다. 8월 폐모론에 앞장섰던 허균마저 ‘남대문 벽서’를 핑계로 처형했다. 세자빈 자리를 놓고 이이첨과 경쟁한 것이 문제였다. 처형될 때 허균이 광해군에게 ‘할 말이 있다’고 외쳤다. 광해군이 ‘들어 보자’고 했지만, 이이첨은 처형을 강행했다.

이이첨은 한때 광해군의 수호무사였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에 서면서 광해군의 복심이 아니라 권력의 화신이 되었다. 개혁 정책에는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다. 전후복구를 위한 세수 확대와 공정과세에 반드시 필요했던 대동법 실시에 반대했다. 광해군은 ‘경기도 시범실시’로 타협했다. 명나라, 후금과의 등거리 실리외교에도 반대했다. 무너지는 명에 대한 충성을 주장하며, 명에 대한 지원군 파병에 주저하는 광해군을 비난했다.

광해군 몰락의 또 다른 원인이었던 궁궐 중축 및 신축에 앞장섰다. 전란 중 불탄 종묘나 창덕궁 중건 이외에 경덕궁, 인왕궁, 자수궁 신축은 고혈을 빨아먹는 흡혈귀였다. 신축의 명분은 두 번이나 화마를 입은 창덕궁은 불길하다느니, 경덕궁에 서기가 있다느니,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느니 따위가 고작이었다. 이런 궁궐 신축은 민심 이반의 결정적 이유였다. 광해군이 유배지로 떠날 때 백성들 사이에선 이런 욕이 쏟아졌다. ‘돈 애비야 돈 애비야 거두어들인 금은은 어디에 두고 이 길을 가느냐.’

독점은 몰락이다. 이이첨의 권력 독점이 완성되자 광해군 정권은 몰락했다. 즉위 초 탁소북을 제외한 연립정권을 형성했을 때 광해군은 재건과 혁신의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회퇴변척으로 연합의 축인 남인 유생들을 돌아서게 하고, 김직재의 옥으로 소북 1백여 가문을 숙청하고, 계축옥사로 조정의 서인과 남인 잔존세력을 쓸어버렸다. 폐모론으로 대북에서도 골북, 중북을 제거했으니 이이첨을 추종하는 ‘육북’만 남게 되었다. 국가재건의 동력은커녕 권력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이첨은 개인적으로 권력 독점을 이뤘지만,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과 전향한 북인이 지원한 인조반정을 막을 순 없었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래 21대 총선처럼 지저분한 선거는 없었다. 위성정당 때문이다. 미래통합당의 꼼수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허점투성이의 선거법을 만들고, 미통당에 이어 위성정당 꼼수에 합류한 민주당 탓이 크다.

개정 선거법이 추구한 가치는 사표를 없애 유권자의 선택을 선거 결과에 최대한 반영하자는 것이었다. 제대로 실현될 거대 양당이 30~40%의 득표로 의석을 독과점하는 폐해가 줄고, 소수정당의 의석수가 늘어 3개 이상의 원내교섭단체가 탄생할 수 있다. 국회는 연합 정치로 운영된다. 지금까지 국회를 분점한 양당은 국회를 차기 대권 경쟁의 수단으로 떨어트려, 극단적인 대립과 대결을 일삼았다. 입법부가 할 일은 언제다 뒷전이었다.

민주당이 위성정당 대열에 뛰어들면서 자신이 주도해 이룬 개정 선거법의 정신은 유린됐다. 미통당에 1당을 넘겨줄 순 없는 건 아니냐고 반문하지만, 실제 목적은 단독 과반 의석 확보였다. 개정 선거법에 따를 때 민주당과 미통당은 비례의석을 제아무리 많이 확보해도 7석 이상을 가져가기 힘들다. 나머지는 유의미한 득표는 했지만 득표에 걸맞는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소수정당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위성정당을 내세우면 소수정당이 가져갈 몫을 가로챌 수 있다. 미통당은 선거법 개정에 반대했으니 꼼수를 부릴 최소한의 이유는 있다.

하숭수 전 정치개혁연합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은 연합정치를 원하지 않았다.” 여당의 유력한 차기대권후보인 이낙연 전 총리보다 센 사람으로 꼽았던 인물이 양 원장이다.

광해군 시절 집권 대북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개혁적인 정치집단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이첨이 연합을 거부하고 독점을 추구하며 몰락했다. 다른 붕당과 달리 북인은 씨도 남기지 못하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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