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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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가 고향인 가수 백년설의 대표곡은 1940년에 발표된 <나그네 설움>이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요즘도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보면 80년 세월이 무상하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로 시작하는 <나그네 설움>은 고향 떠난 자의 한없는 인생역정을 노래한다. 떠돌이로 10년 넘어 반평생을 살아온 나그네는 해거름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보인다.

태평양전쟁을 목전에 둔 일제강점기 조선의 나그네는 도보에 의지하여 길을 떠돌았다. 식민지 백성 처지에 승용차나 열차는 언감생심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걸어야 했던 데에는 까닭이 있을 터이나, 우리는 내막을 알지 못한다. 나도향의 <그믐달>에 나오는 야반도주한 파락호(破落戶)일지도 모르고, 최서해의 단편소설 <탈출기>의 주인공 도배장이 나운심의 후예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걷고 걸었고 걸을 것이다.

인간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얼마나 될까? 장정 기준으로 30킬로미터 내외가 고작이라는 게 정설이다. 시간당 3-4킬로미터를 걷는 것이니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해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진주라 천리길”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과거 보려고 한양 가는 조선의 선비는 편도 보름치 양식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오늘날처럼 탄탄대로나 신작로가 아닌 구불구불한 길과 가파른 산길과 언덕길을 가야 했던 사람들의 행장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렇지만 당대 지식인들은 자신의 걸음으로 사유와 인식의 지평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호모사피엔스의 첫 번째 조건이 직립보행 아닌가! 영장류 가운데 인간처럼 직립보행이 일상화된 종은 없다. 오늘날 스마트폰 때문에 인류가 고릴라나 침팬지 혹은 오랑우탄처럼 등이 구부정해지는 것은 별도로 쳐두자. 똑바로 서서 걸으면서 우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각종 상념과 기획을 보듬고 걷는다.

누구는 건강을 생각하여 일삼아 걷지만, 우리는 걸으면서 과거와 미래, 행과 불행, 관계와 절연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근대 이전의 나그네는 사유 속도와 걷는 속도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한 예외가 아니면 그들은 일상의 속도에 맞춰서 걸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사물을 인식하고 관계를 성찰했다. 시속 300킬로미터 가까운 고속철로 이동하는 현대인은 성찰하지도 사유하지도 않는다.

걷지 않는 현대인은 똑똑한 전화기를 들여다볼 따름이다. 만물의 창이자 만능소통의 마당이 되어버린 스마트폰은 사유와 인식, 성찰과 무관하다. 거기서 쏟아지는 숱한 정보와 지식은 이용자를 암담하게 만든다. 급기야 그들은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손쉬운 해결책을 찾아낸다. 정보와 지식의 바다에서 일엽편주 돛단배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비판적인 정신과 영혼을 사상(捨象)한 채 한낱 엄지족으로 전락해 버렸다.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살려면 정처(定處)가 있어도 걸어야 한다. 구부정한 영장류가 아니라, 직립보행하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 걸으면 살고, 멈추면 죽는다. 거리에 봄꽃 한창이다.

<경북매일신문>, 2020년 3월 19일자 칼럼 ‘파안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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