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방 궁궐 금성관, 보물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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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관 뜰 비석 (출처:전남일보)
망화루 (출처:전남일보)
벽오헌 (출처:전남일보)
전패 (출처:전남일보)
조선시대 가장 규모가 큰 객사 금성관 (출처:전남일보)

 

금성관, 보물 되다

문화재청은 지난 2019년 10월 2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인 나주시 과원동에 위치한 객사 금성관(錦城館)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037호로 지정했다.

객사란 관찰사가 관찰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자, 중앙 사신이 지방에 오면 묵던 숙소였다. 특히 객사의 정청은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望闕禮, 나무패에 절하는 의식)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다시 말해 사신을 접대하고 왕정의 위덕을 펴 관부의 위엄을 세웠던 장소, 즉 지방궁궐이었던 셈이다.

전국의 수 많은 객사 중 왜 나주 객사인 금성관이 보물이 되었을까? 객사는 정청과 좌·우익헌(동·서익헌)으로 구성되는데, 금성관의 중심 건물인 정청은 조선시대 객사 중 가장 크다. 정면 5칸 측면 4칸 집인데 칸 넓이나 높이가 다른 정청보다 엄청나 쳐다보는 순간 위엄이 느껴진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맞배지붕을 사용하는 일반 객사의 정청과 또 차이가 난다. 나주 객사가 타 지역 객사와의 차이점은 지붕 형태만이 아니다. 정청 앞에 오르는 계단인 월대(月臺, 궁전의 정전 등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를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건물 내부의 천장과 용 문양의 단청은 궁궐의 건축요소를 가미하고 있다.

이처럼 나주 금성관이 보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천년 목사골 나주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고, 원래 자리에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객사와 차별성이 존재하는 등 역사·건축·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금성관이란 객사 현판은 나주의 옛 이름 ‘금성(錦城)과 관련이 있다. 삼국 시대 발라주(군)로 불렸던 나주는 신라 경덕왕 16년(757), 고을 이름을 중국의 한자식으로 바꿀 때 금성군이 된다. 고려 태조 때 나주라는 이름을 갖게 되지만, 금성은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의 산 이름과 함께 나주의 별칭(애칭)으로 남아 있다.

금성관, 언제 건립되었을까

나주목의 객사인 금성관은 언제 건립되었을까? 고려 태조 왕건이 장화왕후 오씨를 만났던 나주는 고려시대 아주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전국을 12목으로 나눌 때 나주는 광주를 제치고 목이 되었고, 1018년 전국을 5도로 나눌 때 전주와 나주의 앞 자를 한자씩 따 전라도가 되었다. 작년 전라도라는 이름을 정한 지 1000년이 되었을 때 나주가 큰 행사를 치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처럼 고려시대 나주가 갖는 정치적 위상을 고려한다면 객사인 금성관이 고려시대부터 건립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은 조선 성종 때 나주 목사 이유인(1487~1489, 재임)이 건립했다는 기록이 최초다.

이유인 목사가 건립했다는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 궁실조를 시작으로, 이후 『여지도서』, 『나주군읍지』, 『나주목읍지』 등에도 나타난다. 또 『금성읍지』에도 “객사는 목사 이유인이 건립한 후 목사 박규동이 중수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목사 이유인이 건립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런데 금성관 건립을 알려주고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금성관 동익헌(벽오헌, 碧梧軒)에 대한 기록도 함께 나온다. 전라도 관찰사 이행(1403~1404)이 동익헌의 편액을 벽오헌의 동쪽에 벽오동 나무가 있어서 벽오헌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동익헌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건물로 추정이 가능하다. 이후 벽오헌은 1480년 나주목사 김춘경과 판관 오한이 다시 보수한다. 지금 벽오헌은 정청의 오른쪽에 위치한 건물이다.

벽오헌이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면 정청인 금성관도 이미 언급한것처럼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2003년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팀이 객사터를 발굴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고려 초기 건립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근거는 객사터에서 고려시대에 발행된 국내 최초의 화폐인 건원중보(乾元重寶, 996)와 초기 청자인 ‘해무리굽’ 토기의 발굴이었다.

고려시대에 최초로 객사인 금성관이 건립되었다고 해도 오늘 우리들이 보는 금성관은 이유인 목사가 건립한 건물임은 분명해 보인다. 15세기 후반 이유인 목사가 지었다는 금성관은 이후 몇 번의 중수를 거쳐 일제 강점기 군청의 청사로 사용되다, 1976년~1977년 완전해체 된 후 다시 복원된 건물이고, 동·서익헌과 망화루, 중삼문, 연못 등은 최근 다시 복원된 모습이다. 그리고 내삼문과 정원 등은 아직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금성관은 늘 역사의 현장이었다

나주 객사 금성관은 늘 역사의 현장이었다. 몇몇 사례를 살펴보자. 희대의 폭군이었던 연산군은 팔도에 채홍사를 파견하여 아리따운 여인을 구하라는 명을 내리는데, 나주 사는 천민 우부리의 딸이 뽑히게 되고,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된다. 딸이 종 3품 숙용(淑容), 즉 후궁이 되자 우부리는 딸의 권세를 믿고 남의 전답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온갖 못된 짓을 자행한다. 민심은 흉흉했지만, 우부리의 비위를 거스르면 목이 달아났으므로 나주목사도, 전라도 관찰사도 그의 못된 짓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이때 박상(1474~1530)이 지방관리를 감찰하는 전라도사에 부임한 후 나주에 내려와 나주목사도, 전라도 관찰사도 어찌하지 못했던 우부리를 체포, 나주 금성관에서 매질하여 죽인다. 이를 ‘우부리 격살 사건’이라 부른다.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의로움을 실천했던 박상은 남도 의로움의 출발로 불린다. 남도인의 정체성이 된 의로움의 실천지가 금성관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한 달도 안 되어 수도 한양이 점령당한다. 호남에서는 6월 3일 나주 출신 건재 김천일이 최초로 300여 의병을 일으켜 북상 길에 오른다. 56세 김천일이 의병들과 함께 피를 입에 나누어 바르고 출병의식을 치른 곳도 금성관이었다.

영조 31년(1755) 나주 금성관에 괘서(掛書) 한 장이 붙는다. 괘서에는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백성이 곤궁한데 가렴주구는 더욱 심하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이려 하니, 백성은 동요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었다. 영조의 정책과 당시 집권 세도가였던 노론을 비방하는 내용으로, 소론 일파가 노론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내건 괘서였다. 금성관은 현실 정치를 논박하는 정치의 현장이기도 했다.

1895년 일제는 무례하게도 러시아에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개한 나주 유생들은 금성관에 명성황후의 분향소를 설치하고 곡(哭)을 했다. 나주 객사인 금성관은 이처럼 남도인의 정의로움과 애국·충절을 다지고 실천했던 남도인들의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현장이었다.

금성관은 일제강점 시기 칸막이를 하고 나주군청 청사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1976년 해체 복원된 후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출입문인 망화루와 중삼문도, 그리고 최근 연못도 복원되었다. 마당 한켠에는 현종, 관찰사, 목사 등 나주와 인연을 맺은 권력자들의 선정비나 영세불망비 등 각종 비도 가지런히 모아져 나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고려 현종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몽진(蒙塵)했던 사실을 담고 있는 있는 ‘사마교비’나 동학농민군을 격퇴시킨 내용을 적은 ‘금성토평비’는 나주가 역사적으로 어떤 곳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흔적이다.

오늘 동익헌인 벽오헌 마루에서는 나주시립예술단 단원들이 매주 토요일 공연을 연다. 이제 보물이 된 나주 객사 ‘금성관’은 나주시민 만의 것이 아닌 전 국민의 것이 되었다.

궐패 (출처:전남일보)

 

객사는 왜 동헌보다 더 크고 웅장할까?

1018년 전라도가 생겨나게 된 근거가 된 나주는 ‘천년 목사골’로 불린다. 정3품의 품계를 가진 목사가 다스렸던 고을이라는 의미다. 고려·조선 시대를 통틀어 목사가 다스리는 목은 꽤 큰 고을이었다.

목사고을에는 목사만이 파견되는 것은 아니었다. 부시장 쯤에 해당되는 판관(判官, 종5품)과 지방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敎授, 종6품)가 관원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나주목여지승람』에 보면 군관 50, 아전 80, 기생 22, 사령 41, 관노 31, 관비 17명 등 많은 관속이 딸려 있었다.

따라서 목사의 근무지인 동헌과 거처지인 내아를 비롯하여 수많은 건물이 필요했다. 그 중 핵심 건물이 지방 궁궐로 ‘금성관(錦城館)’이라는 편액이 붙은 객사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를 뜻한다. 그러나 객사가 관리들만의 숙소만은 아니었다. 객사는 정청과 좌·우익헌(동·서익헌)으로 구성된다. 객사의 중심 건물인 정청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와 전패를 모시고 고을의 관리들이 매월 초하루나 보름에 임금께 하례하는 망궐례라는 의식을 행하는 장소였고, 동·서익헌만이 숙소였다. 동·서익헌 중 동익헌은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이 이용하였고, 관찰사가 각 고을을 순행할 때 정무를 보는 장소이기도 했다. 서익헌은 종 3품 미만의 당하관이 이용한 숙소였다. 정청인 금성관에 붙은 동·서익헌 중 동익헌의 규모가 서익헌보다 더 크고 정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인 마루가 있는 이유다.

객사에서 행한 가장 중요한 의식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나 전패를 모셔놓고,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를 올리는 일이었다. 궐패의 ‘궐(闕)’이나 전패의 ‘전(殿)’자는 나무패로 궁궐, 즉 국왕을 상징한다.
객사는 망궐례의 의식만을 행하는 장소는 아니었다. 성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 「가례」 편에는 객사에서 치러지는 7가지 의식을 명문화하고 있다.

하나, 사신 및 외관이 설날, 동지, 탄생일에 전패에 하례하는 의식
둘, 사신 및 외관이 초하루, 보름에 전패에 하례하는 의식
셋, 사신 및 외관이 지방관이 왕에게 올리는 글인 전문(篆文)을 올리는 의식
넷, 사신 및 외관이 선로(宣勞, 왕이 선지를 내려 노고를 위로함)를 받는 의식
다섯, 사신 및 외관이 내향(內香, 왕이 내린 향)을 맞이하는 의식
여섯, 사신 및 외관이 교서를 받는 의식
일곱, 외관이 관찰사를 맞이하는 의식

여기서 사신은 임금이나 국가의 명령으로 외국의 사절로 가는 신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왕명으로 지방에 나가 있는 관리를, 그리고 외관을 지방 고을 수령을 가리킨다.

이처럼 객사는 왕을 경배하는 장소였을 뿐 아니라 왕과 관련된 각종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일종의 지방 궁궐이었다. 따라서 객사는 지방 관아 건물 중 가장 크고 웅장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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