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의 물꼬를 튼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1907년 장성 수연산에서 거병… 남도 의병부대 이끌어 담양, 장성, 영광, 고창 등에서 일군 토벌대와 치열한 전투 순창서 붙잡혀 광주천 서천교 백사장에서 재판없이 처형돼 한말 최대 의병 항쟁… ‘의향’ 남도의 정체성 확립 단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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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 의병장이 일본군 토벌대에게 붙잡히기 전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담양 금성산성 (출처:전남일보)

장하도다 기삼연

1910년 무렵 전라도 일대에서는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 같다 전해산, 잘 싸운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라는 동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동요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른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도 우상으로 여긴 남도 의병장들이다. 이 중 맨 앞에 등장하는 기삼연은 1907년 장성 수연산에서 거병한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으로, 한말 호남 의병의 큰 물꼬를 튼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김죽봉은 광주 농성광장에 동상이 세워진 김태원 의병장을, 안담살이는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교과서에 이름이 실린 보성 출신의 안규홍을, 박포대는 기삼연 의진의 부장인 박도경을 가리킨다.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 사후 부장이었던 김태원, 전해산, 이석용, 심남일, 박도경 등이 남도 의병을 이끄는 독립의병 부대로 분화, 발전한다. 그리고 이들 의병부대의 활동 때문에,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25일까지 소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라 이름 붙은 ‘전라도 의병 대토벌 작전’을 전개했고, 전라도는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가 된다. 광주·전남이 ‘의로움의 고장’이라 불리게 된 밑바탕에는 이처럼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삼연은 1851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마을에서 진사 기봉진의 4남으로 태어난다. 호는 성재(省齋)다. 일찍이 위정척사운동의 거두인 노사 기정진에게 글을 배웠는데, 문장 뿐 아니라 병서에도 재주가 뛰어나 기정진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기삼연은 기정진의 5촌이 되는 종질(從姪)이었고,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의 삼종숙(三從叔)이기도 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기우만은 1896년 2월 7일(음력) 장성향교에서 거병했다. ‘장성의병’이 그것이다. 장성은 노사학파의 본고장으로, 노사의 손자이며 제자인 기우만의 영향력이 컸다. 이때 기삼연은 백마를 타고 300여 의병을 모집했기 때문에 ‘백마장군’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나주로 행군한 장성의병은 동년 2월 2일, 이학상을 의병장으로 거병한 나주의병과 함께 호남 각 읍치를 점거하고 북상하려는 개혁을 세운다. 그러나 전 학부대신 신기선이 사령관 이겸제와 관병 500을 이끌고 와 임금의 해산명령을 전하자, 나주의병에 이어 장성의병마저 해산하고 만다. 이에 기삼연은 “유생과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을 받은 것으로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랴. 이 군사가 한 번 파하면 우리 무리는 모두 왜놈이 될 뿐이다.”라고 개탄한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요한 후 외교권을 빼앗자, 기삼연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대낮에도 산짐승이 나타나는 인적이 드문 수연산 기슭 송계마을로 이사한다.

호남창의 회맹소 대장이 되다

수연산에 은거한 기삼연은 날마다 상민 출신의 선머슴들과 술을 마시며 놀았다. 큰 뜻을 품은 선비가 저잣거리에서 술이나 마시며 폐인처럼 행세했던 것은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는 위장술이었다. 그는 가슴 속에 ‘인통함원(忍痛含寃)’, 즉 원한을 품고 고통을 참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연산 자락으로 이사 후 그는 총을 사 모으고 화약과 실탄을 만들었다. 식량과 의복도 구했다. 종손인 기형도는 총을 보탰고, 형 양연은 무쇠 덩어리를 구해주었으며, 전 군수 이용중은 군자금 900냥을 내놓기도 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기삼연은 장성 수연산 석수암(石水庵)에서 ‘호남창의회맹소’라는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거병한다. 대장에 기삼연, 통령에 김용구, 선봉에 김준(김태원)이, 동요에 등장하는 박도경은 포대(砲隊)에, 전해산은 종사(從事)에 임명된다.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한 후 격문을 지어 사방에 돌려 백성들의 협력을 촉구하며, 적에게 부역하는 자는 처단하고, 그 재산은 몰수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격문 끝에 평민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주고, 순검 일진회원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 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고 첨가하여 포고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1907년 9월, 고창 문수사 전투부터 시작된다. 1907년 12월에는 법성포를 공격, 순사주재소와 일본인 가옥을 불태운다. 세곡을 탈취한 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머지는 군량미로 사용한다.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1908년 1월에도 계속된다. 담양, 장성, 함평 등 여러 읍과 광주의 일본인 농장을 습격했다. 헌병분견소, 세무서, 관청, 일진회원, 일본인 상점, 우편 취급소 등이 주 공격 대상이었다.

재판 없이 광주천에서 총살되다

‘호남창의회맹소’의 기세가 날로 높아지자,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폭도토벌대’를 편성하여 의병부대를 추격한다. 일군 토벌대에 쫓긴 기삼연은 1월 30일(양력) 300여 의병을 이끌고 담양 금성산성에 들어온다.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큰 비로 노숙하는 의병들의 옷이 젖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있을 때, 담양 주둔 일군의 기습을 받는다. 의병 30여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자, 기삼연 부대는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북문을 통해 탈출한다. 순창의 복흥산으로 옮긴 기삼연은 설날을 맞아 의진을 일시 해산하고, 정월 보름에 다시 집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삼연의 계획은 설날 일군에 체포되면서 물거품이 된다.

복흥산에서 의병을 해산한 기삼연은 구수동(九水洞)에 사는 6촌 동생 기구연의 집에 숨어들어 아침 설상을 받는다. 이때 일군 수십 명이 들이닥쳐 기삼연을 찾으며 집주인을 헤치려 하였다. 기우만이 저술한 『호남의사열전』에는 당시의 모습이 다음처럼 서술되어 있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음식을 먹으려는데, 적 수십명이 들이닥쳐 수색하였다. 기대장을 내놓으라면서 집주인에게 총칼을 들이댔다. 돌연 성재는 창에서 큰소리를 질렀다. 기대장은 여기 있다. 주인이 무슨 죄냐?”

담양에서 광주로 압송되어 가는데 길에서 보는 이들이나 가마를 메고 가는 이들이 모두 눈물을 흘려 잘 가지 못했다고 한다. 1908년 2월 2일(양력) 설날이었다.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 김태원이 담양 무동촌에서 일본 수비대장 요시다(吉田)을 죽이고 그 잔졸들을 추격하다 기삼연 대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태원 부대원들이 대장을 구하기 위해 경양역까지 쫓아오지만, 기삼연은 이미 광주헌병대에 수감 된 뒤였다. 일군은 의병들이 기삼연을 구하기 위해 광주헌병대를 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튿날인 2월 3일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에서 재판 없이 처형하고 만다.

광주 헌병대에 수감 당시 기삼연은 죽음을 직감하고 다음의 절명시를 남긴다.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出師未捷先死)/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呑日曾年夢亦虛)” 기삼연이 일찍이 삼키려 했던 ‘해’는 ‘일본’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광주천에서 쓰러진다. 그가 처형당한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은 10년 뒤 ‘조선독립 만세’ 소리로 가득 찬 광주 3·1운동의 발발지가 된다.

기삼연의 시신은 한동안 광주천 백사장에 방치되었다. 며칠 뒤 광주의 선비 안규용이 관을 갖추고 염한 후 서탑등(지금의 사직공원)에 매장하고 ‘호남의병장 기삼연’이라 쓴 목비를 세운다.

기삼연 의병장 순국비. (출처 전남일보)
기삼연 의병장 영정(출처:전남일보)
장성 수연산 석수암 터(출처:전남일보)
기삼연 의병장이 처형당한 광주천 서천교 백사장(출처:전남일보)

기삼연 의병장을 품은 현장을 찾다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1851~1908) 의병장은 어디에 묻혀 있을까? 지역사를 들여다본 지 이십 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의 무덤을 찾은 적은 없다. 다행히 후손 되는 기호철 교수로부터 황룡면 아곡리 산 44번지에 위치한다는 소식 듣고, 현장을 찾았다.

그의 무덤은 그가 태어난 아곡리 하남마을에 들어선 홍길동 테마파크에서 황룡강 쪽인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0여 미터 쯤 가다 보면, 오른쪽 산자락에 있다. 무덤 앞은 상석이 놓여 있었고 돌로 무덤 주위를 둘렀다. 무덤 오른쪽에는 1974년 장성의 유학자 변시연이 글을 짓고 이병현이 글을 쓴 ‘호남창의영수성재기삼연선생지묘(湖南倡義領袖省齋奇參衍先生之墓)’라 새긴 묘비가 서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기삼연 의병장의 시신이 이곳에 묻힌 것은 아니었다. 1908년 2월 3일 재판 절차도 없이 광주천 백사장에서 일군에 의해 총살된 후 묻혔던 곳은 서탑등, 지금의 사직공원이었다. 20여 년 후 조상들이 모셔진 장성 황룡면 관동리 21번지(보룡산)로 이장하지만, 산짐승들이 자주 출몰하여 무덤을 훼손하곤 했다. 2009년 다시 옮긴 곳이 고향 마을 뒷산인 지금의 장소다. 통한의 순국, 그리고 두 번의 이장, 이제는 고향 하남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마음 편히 잠들었으면 싶다.

장성공원에 오르면 장성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에 기삼연 의병장을 기린 제법 큰 규모의 순국비가 서 있다. 기단부와 오석(烏石)의 비신, 전통 한옥 문양의 머릿돌을 갖춘 당당한 비다. 비신에는 ‘湖南倡義領袖奇參衍先生殉國碑(호남창의영수기삼연선생순국비)’라 새겼다. 의병장이 아닌 ‘선생’이란 표현이 다소 생경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성재 기삼연은 의병장 이전에 한학자였고, 유림이었다. 무덤 옆 묘비명에도 ‘선생’이라 쓰고 있었다.

기삼연이 일군의 총에 맞고 순국한 곳은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이다. 이곳 백사장은 기삼연 의병장이 순국 10년 후인 1919년 다시 독립 만세 소리로 진동한다. 광주 3·1운동이 거의지였기 때문이다. 지금 광주천 부동교 옆에는 기삼연의병장의 순국지임을 알리는 표석이 광주 3·1운동 표석과 함께 서 있는 이유다. 10년 단위로 일어난 두 사건은 광주·전남이 항일·독립의 역사에 어떤 역할을 수행 한 곳인지를 잘 보여준다.

장성 수연산 석수암도 꼭 기억해야 한다. 기삼연은 1896년 봉기 실패 후 이곳 수연산에 은거하며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1907년 9월(양력), 석수암에서 기삼연을 대장으로 한 ‘호남창의회맹소’가 결성된다. 석수암은 실질적인 최초의 남도 의병 결성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수연산 석수암은 찾아보는 것조차 쉽지 않다. 대한민국 장교를 양성하는 상무대의 관할구역으로 군 당국의 허락이 필요한 군사지역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현장을 찾았지만, 출입금지란 푯말 앞에 현장을 확인할 수 없었다.

지금 수연산에 석수암이란 암자는 없다. 의병 토벌 당시 일제에 의해 불살라졌고, 이후 복원되었다가 6·25동란 때 다시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터만 남아 있는 이유다.

역사는 꼭 보존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오늘 광주·전남인의 정체성이 된 호남창의회맹소의 결성지인 석수암도 그 중 하나다. 표석을 세우고 석수암을 복원하자. 이는 남도를 ‘정의로움’으로 고장으로 자부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까 싶다.

장성 황룡면 아곡리 기삼연 의병장 무덤(출처:전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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