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어우(허망한 말)’ 지식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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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유투브 MUN JANG

유몽인은 1622년 금강산으로 떠나면서 일찍이 인연을 맺은 천덕암 법견 스님에게 이런 글을 남긴다. “노산군이 폐출되어도 종사는 의구하지만 온 고을 사람이 다 죽었고, 육신(사육신과 생육신)은 굽히지 않았습니다.” “죽고 사는 것을 떠나는 것은 군자의 대절이니, 제가 대체 어느 곳에 처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제 평생의 저술로 <매월당집>을 잇고자 합니다.”

유몽인은 1618년 집권 대북 세력의 탄핵을 받자 즉각 사표를 내고 서산(지금의 고양시 송추)에 은거해 집필에 몰두했다. 그는 1621년에서 1622년 사이 <장자>의 우언적 기법을 차용해 자유롭고 다양한 문체로 시사와 학문 인륜을 아우른 야담집 10여 권을 지었다. 자신의 글을 모은 문집 80여 권도 정리했다. 그리고는 제목을 각각 <어우야담>과 <어우집>으로 했다. ‘어우’는 <장자>의 ‘천지편’에서 따온 호였다. “於于以蓋衆”(어우이개중) 곧 ‘허망한 말로 백성을 속인다’는 대목에서 ‘허망한 말’을 뜻한다. 내용은 이렇다.

자공이 하루는 길을 가다가, 항아리로 길어 채소밭에 물을 주는 노인을 보고 ‘왜 두레박을 이용하지 않느냐’고 안타까워했다. 노인이 물었다. “뉘시오.” “공자의 문인입니다.” “섣부른 지식으로 성인을 흉내 내며, 허황된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홀로 현을 타면서 슬픈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천하에 명성을 팔려는 사람 아닌가?” 노인은 당대의 석학 공자를 단칼에 ‘혹세무민하고 곡학아세하는 사기꾼’으로 매도했다.

유몽인 시절, 공자는 석학을 넘어선 존재로, 조선 지식인이 신앙하는 성인이었다. 유몽인은 그런 성인을 능멸하는 옛말을 제 호로 삼았던 것이다. 그에겐 일찍이 응문, 간재 등의 호가 있었지만 50대가 넘어서면서 묵호자(말없음을 즐기는 이)나 어우를 주로 썼고, 50대 중반부터는 ‘어우’만을 고집했다. 그의 절친 이정구는 그를 ‘유어우’라 했고, 남창 김현성의 행장에서도 그는 ‘유어우’로 나온다. 유몽인은 나아가 자신의 저작이 지식인의 거짓과 허위의식을 남김없이 까발린 <매월당집>(김시습 저)의 뒤를 잇기를 희망했으니, 그의 뜻은 태양처럼 확연하다. 그것은 시대에 대한 도발이었고, 지식인 권력에 대한 조롱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찌하여 그런 망발이 될 수 있는 도발을 한 것일까. 그는 거짓과 위선에 질색했다. 글쓰기에서도, 당시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당송의 화장기 짙은 문장을 버리고 ‘질박하고 거친 말’을 사용해 심중의 진실을 직설로 드러내는 것을 모범으로 삼았다. 그는 ‘어우’를 자신의 호로 삼음으로써 스스로 영달을 위해 타락하는 것을 경계하고, 동시에 당대 지식인들의 거짓과 위선을 조롱했던 것이다.

그는 색목을 굳이 따진다면 북인. 임진왜란 중 광해군을 호종하며, 자연스럽게 남명 조식의 제자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북인의 대부 정인홍을 존경했다. 그는 한 번도 ‘북인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신념을 팔지 않았고, 붕당의 이익을 위해 시비를 왜곡하지 않았다.

유몽인은 서인의 영수 정철이 1591년 세자 책봉 문제로 궁지에 몰렸을 때 엄벌을 주장하는 당론과 달리 정철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정철은 당시 이산해의 꾐에 넘어가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앞장섰다가 선조로부터 날벼락을 맞은 터였다. 정철은 기축옥사에서 동인 그중에서도 북인을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의 처리는 동인이 남북인으로 분열하는 계기였지만, 그는 강경론의 북인에 발을 담그고 남인의 온건론에 동조했다.

북인은 1599년 홍여순의 대사헌 천거 문제를 놓고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했다. 대북과 소북은 1608년 선조의 죽음을 전후로 왕권 승계를 놓고 생사를 건 암투를 벌였다.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은 세자 광해군의 승계를 주장했고, 유영경 등 집권 소북은 3살배기 적자 영창대군의 승계를 추진했다. 유몽인은 도승지로서 선조의 유교를 있는 그대로 처리해 광해군이 왕위를 이을 수 있도록 했고, 결과적으로 대북의 이익에 크게 기여했다.

대북은 1613년 계축옥사를 계기로 소북과 과점했던 권력을 장악했다. 대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정에서 다른 정파를 숙청하고, 대북 일당 독재를 추구했다. 이를 위해 제기한 것이 ‘폐모살제’였다. 패륜 논란 속에서 대북은 골북, 육북, 중북으로 분열했고, 유몽인은 중북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중북은 골북이나 육북에 속하지 않은 이들을 통칭한 것에 불과했다. 기자헌 유몽인 등의 입장은 서인이나 남인과 같았다.

유몽인은 성장 과정 자체가 붕당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일찍이 서인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을 존경하고 마찬가지로 동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문과 삶을 흠모했다. 퇴계와 남명의 제자들이 남북으로 분열한 뒤에도 당대의 스승들에 대한 마음은 변치 않았다. 서인이었던 백사 이항복, 월사 이정구 그리고 후일 인조반정의 주역 이귀 등과도 우정을 나눴다.

유몽인이 등과한 1589년은 기축옥사와 함께 분당, 분열, 파쟁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그는 임용과 함께 서인의 횡포, 동인의 집권과 분열, 동서남북 붕당의 공리공론을 지켜봤다. 당리를 위해 시비를 왜곡하고 당략에 따라 세상을 속이는 짓을 지긋지긋하게 경험했다.

1604년 월사 이정구가 세자책봉주청사로 명에 갈 때 준 전별사에는 그의 분노가 잘 녹아 있다. “성인은 붕우의 의리를 오륜에 나란히 놓았다. 조정에서 사론(士論)이 나뉜 뒤부터 봉우의 의리를 평생 지키는 일이 어려워졌다. 벗 사귀는 도리는 하나인데 어찌하여 둘로 나뉘고, 둘도 불행한데 어찌하여 넷이 되고 다섯이 되었는가? 하나인 도리가 넷, 다섯으로 나뉘어 줄을 세워 사당을 만드니……한 편에 들어간 사람은 각기 하나의 세력이 되어 나머지 네다섯 편과 적이 되었다.”

그는 결코 어느 당파의 입장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백성을 속이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혼자다. 홀로 세상길을 가는 데 어찌 한 편에 붙을 수 있을까? 한 편에 붙지 않으므로 네다섯이 모두 내 친구가 된다. 파벌의 차가움은 얼음을 얼릴 정도지만 나는 떨지 않을 것이며, 파벌의 뜨거움은 흙을 태울 정도지만 나는 불타지 않겠다. 될 것도 없고 안 될 것도 없으니, 오직 내 마음을 따르겠다.”

이 다짐은 계축옥사 이후 집권 대북, 그 중에서도 육북이 제기한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출론 속에서 오롯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는 자신이 속한 붕당, 나아가 광해군조차 버거워하던 집권세력에 맞섰다. 곽재우, 기자헌, 정구, 이항복, 이덕형 등 소수의 강개한 지식인들과 함께 한 것이지만, 그 결과 이이첨 등의 탄핵을 받아 면직됐다. 그를 총애하던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곧 조정으로 돌아왔지만, 해주옥사 등에서 인목대비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다가 투옥된 이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한성좌윤이었던 1618년 봄, 그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다.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돼 사실상 폐서인 됐을 때였다. 한성부에 써놓은 ‘백주지창’이 문제였다. 시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장사가 홀연히 장검을 들고 일어나니, 취중에 마땅히 노간의 머리를 베리라.” 이에 대해 “허균은 자신을 지칭하는 줄 알았고, 이이첨은 소북의 박승종을 지목했고, 박승종은 이이첨을 지목했으니, 소북 대북의 권간들이 모두 노하여 중상하는 말을 임금께 아뢰었다.” 결국 정인홍 이이첨은 “그가 원수를 잊고 역적을 비호한다.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유몽인은 ‘코흘리개의 놀잇감’이 된 벼슬을 버리고 서산으로 들어갔다.

그가 서산에 은거해 문집을 정리하고 야담을 완성한 뒤 ‘어우’라 이름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어우야담에는 ‘문장가와 도학 대가들의 당파성’이란 단편이 나온다. 중국 최고의 문장가라는 한유와 소동파, 최고의 도학자라는 주자 등이 ‘상대를 배척하는 데 온 힘을 다 했다’는 옛이야기를 상기하고, 퇴계와 남명의 제자들이 문묘종사를 놓고 티격태격하며 싸우는 것을 한탄한 글이었다. 결론은 이러했다. “(두 사람의) 도학과 절의가 뛰어남에도 다투는 것은 양쪽 제자들이 재주가 지혜가 떨어지기 때문 아닐까.” 퇴계와 남명은 남인과 북인의 큰 어른이었다.

‘고변이 성행하게 된 연유’라는 단편에선 “밥숟가락이 남보다 조금이라도 큰 것을 보면 고변을 하는” 세태를 개탄했다. 고변의 주인공은 대개 글줄이나 읽고 쓰는 선비들이었다. 어우야담에는 제목 그대로 말이나 글, 문장이나 도학, 풍속과 규범으로 백성을 속이고 뜯어먹는 지식인의 ‘어우’에 대한 기록이 많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한국 사회에서 ‘어우이개중’의 작태는 민주화 이후 표현의 자유를 방패삼아 더 극성을 부린다. 지독하게 전염력이 강한 코로나19마저 정쟁화하고 이념화하는 요즘의 작태는 그 극단을 보여준다. 일부 지식인과 정당, 언론은 바이러스가 우군이라도 되는 양, 정부가 이 바이러스에 무너지도록 기를 쓴다. 중국과의 관계단절과 경제적 파탄 가능성을 알고서도 중국인 출입금지를 줄기차게 주장한다. 세계보건기구의 권고도 무시하고 ‘우한폐렴’ 명칭을 고집한다. 세계인이 인정하는 우리 방역 당국의 노력과 역량 그리고 투명성에도 복지부장관 질병관리본부장을 쫓아내기 위해 안달이다. 생산량의 한계로 말미암은 마스크 부족을 이유로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의 눈에게 오로지 선거 승리와 권력 쟁취밖에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안중에도 없다. ‘허황된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홀로 현을 타면서 슬픈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천하에 명성을 팔려는’ 자들이란 장자의 비유는 이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니고 무엇일까.

유몽인은 문집과 야담을 탈고한 뒤 1922년 가을 금강산에 갔다가 학질에 걸려 60여 일간 생사를 오가다가 겨우 살아나 1623년 봄 산에서 내려왔다. 청년 시절 공부를 했던 철원 보개산 영은사를 들렀을 때 주지가 물었다. “새 임금이 나타나자 벼슬을 구하는 자가 줄을 섰는데 왜 중로에서 헤맵니까?” “진흙탕에 뒹굴어도 때가 타지 않는 것을 두고 깨끗하다 하고, 먹을 것이 있다고 좇는다면 비루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절의 벽에다 ‘상부탄’(청상과부의 탄식)을 썼다.

“일흔 살 늙은 과부가/ 혼자서 규방을 지키는구나/ 사람마다 개가를 권하는데/ ……흰머리를 젊은 얼굴로 단장한다면/ 어찌 연지분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일찍이 모시던 광해군이 비명횡사했다고, 그를 몰아낸 인조 아래서 벼슬을 취하는 것은 삼척동자에게도 부끄러운 일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유몽인은 이 시로 말미암아 역모에 엮이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난다. 그가 역모와 무관하다는 사실은 반정 주역들도 알고 있었다. 원로대신 이원익이 앞장서 처형에 반대했다. 그러나 허망한 말의 힘이 더 셌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반정에 따르지 않는 세론이 커질 것”(이귀)이라는 주장에 따라 인조는 그를 처형했다. 이귀는 그가 오랫동안 우정을 믿어 의심치 않던 친구였다.

후일담이다. 기호 남인인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유몽인을 이렇게 평가했다. “유몽인은 광해의 유신이었다. ‘상부시’를 지은 까닭으로 사형 당했다. 그 뜻은 ‘노객부요’를 지은 원나라 양염부의 절의를 높이 평가해, 그가 자신(명 고조)의 명을 거부했음에도 방면한 것을 본받아 지은 것인데 인조는 유몽인을 죽였다. 두 사람의 뜻은 같은데 어찌 일은 이렇게 되고 말았는가.”(<성호사설> 중 ‘상부시’에서)

소론 집안인 이긍익의 평가도 같았다. “지금과 같은 말세에 유몽인을 본받아 벼슬을 버릴 사람도 없을 텐데, 어찌 유몽인을 살려두는 것이 폐단이 된다고 그를 꼭 베어야만 했나. 비록 상은 주지 못해도 억울한 누명은 풀어주어야 하는데 이를 건의하는 사람이 없어 아직까지 죄적에 남아 있으니 애석하다.”(<연려실기술> 23권 ‘우곡일기’)

결국 사후 171년(1794년)에야 정조는 유몽인을 신원하고 이조판서에 증직한다. “시습과 몽인 저 두 사람이 흠모한 것은 백이와 숙제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아서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다만 자취와 때(의 차이)일 뿐이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의리를 취한 그 지극한 혈성은 백 년 뒤에 가서 대조하여 보아도 털끝만치도 차이가 없을 것이니, 조정에서는 시습에게 이미 베푼 것을 몽인에게 베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다시 묻는다. 과연 허망한 말로 국민을 속이는 자 누구인가. 오로지 권력을 위해 코로나19 바이러스 숙주 노릇까지 자임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곽병찬
전 한겨레신문 대기자. 이 시대 인문의 승묵(繩墨), '향원익청(香遠益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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