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玉山) 이광수(李光秀) 선생을 만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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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은 어렵다고 한다. 경서에 밝은 전문 연구자들도 간찰의 한문이 어렵다고 하는데, 하물며 나와 같은 한글세대가 어떻게……? ≪운사유고(雲沙遺稿)≫의 간찰에 담긴 그 미묘한 뜻을 밝히기까지 넘어야 할 난관은 높았다.
≪운사유고≫의 간찰이 유독 난해한 까닭은 등장인물에 대해 내가 아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언제 태어났는지, 무슨 활동을 한 사람인지, 도대체 아는 게 없었다. ≪운사유고≫는 그야말로 암흑 상자였다.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올립니다. 선부군 옥산 선생은 참으로 영영 후학을 버리신 것인가요? 남쪽의 선비들은 갑자기 시귀(蓍龜) 시귀(蓍龜)는 점을 치는 데 쓰이는 시초(蓍草)와 거북껍질이다. 중추적 인물을 가리킨다.
를 잃고 통석해하고 서로를 위로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더구나 지순한 효자인 그대의 입장에서 보면 그 절박한 고통을 어찌 견디십니까?
〔頓首拜言, 先府君玉山先生, 其眞永棄後學耶? 南方之士遽失蓍龜, 莫不痛惜而相慰, 况在純至之孝, 其摧痛隕迫, 何以堪居?〕 여창현, ≪운사유고≫ 중 ‘춘전(春田) 이혁(李爀)께 드림’

편지의 수신인은 춘전(春田) 이혁(李爀)이다. 이혁이 누굴까? 나는 송사 기우만의 후손 기호중 어른을 찾아가 뵈었다. 어르신은 나에게 풍영계 간부들의 생년이 기록된 ≪풍영계시고집(風詠契詩稿集)≫을 건네주었다.

≪풍영계시고집≫을 들추어 보았더니 이혁은 풍영계 1대 부계장이요, 광주 출신, 무술년(1898년) 생이었다. 그러니까 풍영계 1대 계장인 여창현과 부계장 이혁은 풍영계를 이끄는 주장들이었다. 여창현은 정유년(1897년) 생이었고, 이혁은 무술년(1898년) 생이었으니, 한 살 차이의 동료인 셈이다.

그렇다면 선부군 옥산 선생은 누구일까? 옥산 선생은 이혁의 선친임에 분명하나, 선친이 언제 어디에서 무슨 활동을 하였는지, ≪운사유고≫에는 언급이 없다. 정신없이 자료를 뒤지던 어느 날, 김종가(金種嘉) 씨가 옥산에 대해 쓴 묘갈명을 찾았다.

“어어! 선군께서 돌아가시고 공(公)마저 계속해서 돌아가시니, 나는 공의 맏아들 혁과 대대로 이어온 교분이 있었다.” 묘갈명은 혁을 언급하고 있었다. 나는 눈이 번득였다. 아니, 여기에 등장하는 혁은 ≪운사유고≫에 등장하는 그 혁이 아닌가? 하지만 성급하게 단정짓지 말자. 동명이인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다행히도 묘지명은 공의 정체를 밝히고 있었다.

“공의 휘는 광수요, 호는 옥산이다.”

옥산이 이광수의 호임을 알게 된 것은 하늘이 내린 행운이었다. 어둠의 굴속에서 더듬이 하나만으로 더듬다가 마침내 출구를 찾았을 때 연구자는 희한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지없이 깨끗한, 벅찬 희열 말이다.

그때까지 나는 선비에 대한 이중적 감정을 품고 있었다. 세속의 이해로부터 멀리 있어 한평생 절개와 의리를 추구하는 깨끗한 지식인이라는 이미지도 있었으나,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고 ‘위정척사(衛正斥邪)’만을 고집한 답답한 분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묘지명이 전하는 옥산의 삶은 달랐다. 춘원 이광수는 친일의 길을 앞장서 열어간 분이었으나, 옥산 이광수는 을사오적을 처단한 암살단의 일원이었다.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김인식(金寅植), 이기(李沂), 민형식(閔衡植), 윤주찬(尹柱讚) 등과 함께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대궐에 들어가는 것을 기다려 오적 권중현을 쏘았으나 …….”

우리는 을사오적의 암살단을 이끈 이가 나인영이라고 배웠다. 묘갈명은 내가 찾고 있는, 이혁의 부친, 옥산 이광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1907년 사형이 감형되고 진도로 유배되었으나 일 년이 못되어 석방되었다.”

나는 ≪운사유고≫의 선비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분명 그들은 시대의 주류로부터 뒤떨어진 선비들이었다. 20세기도 중반을 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까지 주자의 성리학을 금과옥조로 모시고 있었으니, 분들의 고집을 뭐라 말하리 ……

하지만 ≪운사유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달빛을 희롱하며 시대의 고통을 외면한 분들은 아니었다. 망하는 나라를 보고 좌시한 분들은 아니었다. 옥산 이광수는 행동하는 선비였다. 1897년 그는 오적의 심장을 향해 총구를 겨눈 테러리스트였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양한묵과 함께 광주의 시위를 이끌었다. 또 투옥되었다.

옥산 이광수는 송사 기우만의 제자였다. 그래서 기우만의 제자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운사 여창현은 옥산 이광수의 부음 앞에서 통석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옥산은 운사 여창현을 이끈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2017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타는 더위를 피할 길은 독서삼매뿐이다. ≪운사유고≫의 미로 속에서 나는 더위를 잊었다. 8월 하고도 마지막 주가 되면 더위가 한풀 꺾인다. 아침이면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분다. 그즈음 가을이 오는 하늘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는 ‘고전공부모임’의 동학들과 함께 광주 인근의 고가를 찾았다.

고서에서 창평을 지나 대덕으로 가는 길목에 몽한각(夢漢閣)이 있었다. 이름 그대로 ‘꿈꾸는 사나이’(夢漢)가 은거하던 자리였다. 몽한각의 입구엔 신도비가 서 있었다. 신도비 비문의 작자는 공교롭게도 송사 기우만이었다. 신도비를 에워싸고 있는 한 아름 되는 육중한 금강송을 보노라니, 어떤 지기(志氣)같은 것이 온몸에 휘감아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몽한각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예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대문을 여는데 성공했다. 가을로 들어서는 문턱, 정오의 햇살은 따사로웠다. 숲속에선 매미가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뒤안의 백일홍은 마지막 붉은 빛을 토하고 있었다.

세종의 이름이 이도(李祹)였는데, 몽한각의 주인은 이서(李緖)였다. 양령대군의 5대 손이었다. 중종 시기 옥사에 연루되어, 이곳 창평으로 유배를 왔다. 유배가 풀렸는데 이서는 그대로 시골의 선비로 눌러 앉았다.

뜰 한가운데에는 바위돌이 우람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서가 읊었다는 시, 낙지가(樂志歌)를 새긴 비석이었다. 비석 앞에만 서면 우리는 작아진다. 모른 척 그냥 지나가려 했는데, 일행 중 한 분이 기어이 나에게 낙지가의 풀이를 부탁하는 것이다. 어려운 시험 문제를 위태롭게 풀어나갔다. 다, 풀었다. 그러니까 “낙지가는 낙지(鮹, Octopus) 예찬가가 아니구요,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안빈낙도의 삶을 찬미한 노래입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처럼 은일(隱逸)의 삶에 대한 찬가입니다.”

몽한각의 주인 이서의 후손이 바로 옥산 이광수였다. 옥산의 할아버지는 그 유명한 노사의 제자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이었고, 옥산의 아버지는 송사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청고(靑皐) 이승학(李承鶴)이었다. 옥산의 집안은 3대에 걸친 애국투사의 집안이었다.

옥산의 아들 춘전 이혁은 고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 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었다. 전남대 문리대학장을 역임하였다. 2012년 나도 전남대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었으니, 한 세대를 격하여 나는 이혁의 땀이 배어 있는 문리대 교정을 함께 걸었던 셈이다. 이렇게 하여 내 삶의 뿌리인 선조들의 삶, 그 실뿌리 한 오라기를 나는 마침내 찾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선조들의 슬픔은 우리와 사뭇 달랐다.

시일만 끌다 이제 해가 또 저물어갑니다. 만약 며칠이 더 지나 3년 상을 치르고 나서 조문을 하면, 비록 당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더라도 선부군의 영연(靈筵) 영연(靈筵)은 궤연 또는 영좌로 죽은 이의 혼령을 위해 차려놓은 자리를 말한다.
에 나아가 곡하는 것을 너무 늦게 하였으니 그 태만의 죄가 두렵습니다. 이제 믿을 만한 인편을 구해 위로 편지를 올리고, 애사(哀詞) 한 편을 부치니, 부디 사람을 시켜 영연에 나아가 대신 읽게 하거나 혹 잠시 펼쳐두는 것은 어떠합니까?
〔故遷延至今, 歲又暮矣. 若過幾日, 三年而弔, 雖蒙哀恕, 而象生之筵進哭太晩 逋慢罪悚. 玆別討信便, 疏上而哀詞一幅, 使人讀進於靈筵下, 或展布移刻, 如何?〕 여창현, ≪운사유고≫ 중 ‘춘전(春田) 이혁(李爀)께 드림’.

황광우
30만부가 나간 '철학콘서트'에 이어 '역사콘서트'와 '촛불철학'을 출간했다. 지난 5년 동안 운사 여창현의 문집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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