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전쟁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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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묻고 어제가 답하다>

선택은 화친, 화친 밖에 없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의 태종 홍타이지에게 맞서 45일간 농성을 벌였던 남한산성. 화친할 것인지, 결전을 벌일 것인지 갈팡질팡하느라 조선 백성의 피해가 커졌다.[출처: 서울신문]

1637년 1월17일(양력 2월13일). 청 태종은 남한산성의 인조에게 이런 조서를 보냈다. “운명이 아침저녁에 달려 있는데도 오히려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헛소리만 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이제 네가 살고자 하느냐? 마땅히 빨리 성에서 나와 항복하라. 아니면 싸우고자 하느냐? 그러면 빨리 나와서 한 번 싸워보자.”

청 태종은 쌓인 분을 다 털어놓았다. “(너희는) 왕왕 우리 군사를 오랑캐 도적이라 하지 않았느냐, … 내가 과연 도적이라면 너는 어찌하여 잡지 아니하고, 내버려두어 불문에 붙이느냐.” “너희가 비방하고 욕하는 짓은, 양의 바탕에 호랑이 껍질이라는 속담이 참으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더냐.”

그렇게 치욕적일 수가 없었지만 인조는 안절부절 발만 굴렀다. 그는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방안만 찾았다. 사실 청 태종이 지적한 것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묘조약을 파기한 것도 인조였고, 청을 오랑캐라고 업신여긴 것도 그였고, 청을 정벌하겠다고 8도에 교서를 보낸 것도 그였다.

1월18일(양력 2월14일), 인조는 항복의 뜻을 밝히는 국서를 쓰도록 했다. 대외문서 작성은 예조 소관이었지만 예조판서 김상헌이 나자빠지고 다른 신하들도 꽁무니를 뺐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써야 했다. 인조의 당부는 한 가지였다. ‘다만 성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해달라는 내용을 담으라’는 것이었다. 출성(出城)은 곧 죽음이거나 포로로 심양에 끌려갈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최명길이 국서를 쓰자 김상헌이 찢었다. 최명길이 조각난 국서를 다시 붙이는 모습을 본 병조판서 이성구가 김상헌에게 화를 냈다. “화의를 배척하여 나랏일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대감이니 대감이 적에게 가시오.” 김상헌은 울면서 뛰쳐나갔다. 척화와 화친 사이에서 표류하던 조선 조정은 이렇게 난파하고 있었다.

그해 2월은 참혹했다. 6·25 3년 전쟁도 있었고, 임진왜란 7년 전쟁도 있었지만 한반도 역사상 이렇게 혹독했던 겨울은 없었다. 남한산성 안에 갇힌 조선 왕실과 대소 신료 그리고 병사는 추위와 기아에 죽어가고 있었다. 성 밖의 백성은 수만 명이 죽임을 당하고, 수십만 명이고 청의 노예로 끌려갔다. 조선은 삶은 닭 털 뽑히듯 산 채로 벗겨지고 있었다.

1637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 산성 도피 47일째) 인조가 삼전도 수항단(受降壇 : 항복을 받아들이는 제단)에서 항복의식을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갈 때였다. 청군에 잡혀 있던 1만여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외쳤다.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그 절규를 외면하고 돌아온 한양 도성은 “시체가 길거리에 이리저리 널려 있”(인조실록 1637년 2월1일 자)는 거대한 무덤이었다.

“경성에 사는 백성이 가장 혹독하게 화를 당해 남아 있는 자라고는 단지 10세 미만의 어린이와 나이 70이 넘은 사람들뿐인데, 대부분 굶주리고 얼어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2월3일 호조의 보고였다. 이튿날 한성부는 조정에 이렇게 요청했다. “백골(白骨)을 묻어주는 일이야말로 왕정(王政)의 급선무입니다. 적에게 죽은 도성 백성들이 길가에 버려져 있는데, 참혹해서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 남정(男丁)을 징발해서 시체를 매장하게 하소서.”

유대인에게는 수천 년 지켜온 절기가 있다. 유월절(Passover)이다. 기원전 1513년 노예 생활을 하던 히브리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의 고난을 기억하는 절기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지금도 양고추냉이 등 쓴 채소와 발효되지 않은 빵(무교병)을 먹으며 노예 시절의 고통과 탈출 과정에서의 고난을 기억하며,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들은 비록 기원전 6세기 바빌론에 의해 패망했고, 서기 1세기 로마 제국에 의해 갈갈이 찢겨지는(디아스포라) 비운을 겪었지만, 조선만큼 그렇게 자주 당하지는 않았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7년 전쟁 동안 전체 인구가 1/4이나 줄어드는 참극을 당했다. 불과 30년 뒤 정묘호란을 자초했고, 그로부터 9년 뒤 병자호란 불과 47일 만에 50~60만 백성이 청의 노예로 끌려가는 참화를 당했다. 양대 호란으로부터 3세기 뒤엔 을사늑약에서 병탄에 이르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

조선이 유대인과 달랐던 것은 민족적 비극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거나, 편리하게 각색해 기억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은 참화의 원인이었던 ‘숭명’의 의리와 ‘소중화’의 허위의식을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국가 이념화했으며 이를 통해 무능하고 부패한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하긴 ‘숭명배청’을 앞세워 쿠데타로 집권한 권력이었으니, 달리 선택할 것도 없었다.

그런 전통은 해방 후 ‘반공’을 앞세운 독재 및 군사정권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고려 왕조의 강화도 도피, 조선 왕조의 남한산성 도피를 ‘위대한 항전’ 혹은 ‘불굴의 저항’으로 미화했다. 그런 정권을 떠받들었던 친일·매판세력과 그 후예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려 했다. ‘숭명반청’ 세력이 화친을 주장하던 최명길을 오랑캐의 앞잡이로 몰아 역사의 죄인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그들은 ‘자주’와 ‘화친’을 주장하면 친북 빨갱이로 매도했다.

병자년(1636년)의 참화는 자연의 미물도 일찍이 예감하고 있었다. 2월 인조의 비인 인열왕후 상의 조문을 핑계로 조선을 떠보기 위해 마부대와 용골대가 사신으로 왔다. 왕과 반청 신료들이 오랑캐 토벌을 공식화한 뒤였다. 인조는 이들의 접견을 아예 거부했다. 당시 사헌부 장령 홍익한은 상소를 올려 “황제를 참칭한 청의 사신을 참수하고 문서를 불살라 버리라”고 주청했다. 청과의 화친을 앞장서 추진한 “최명길 등의 목을 베라”고 주장했다. 불안해진 청 사신은 민가에서 말을 훔쳐 타고 야반도주했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이렇게 개탄했다. “압록강이 얼면 다시 조선이 병화에 휩쓸릴 것입니다.” “진실로 화친을 끊겠다면 어찌 어정쩡하게 대응하면서 한마디의 말도 한 가지의 계책도 시행하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까. 간원의 의견을 받아들여 싸우거나 지키기 위한 계책을 세우지도 않고, 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병화를 늦추는 계책도 시행하지 않으니 하루아침에 오랑캐 기병들이 휘몰아 쳐들어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는 알고 있었다. ‘싸우자’는 주장은 얼마나 안전하며, ‘싸움을 피하자’는 주장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주화라는 두 글자가 평생 신의 허물로 따라다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화친하는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쟁을 하면 결국 다치는 건 백성들입니다.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지금은 저들을 타일러 전쟁을 피해야 합니다.”

그사이 조선 팔도에는 이런 괴담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부평 안산의 돌이 옮겨져 놓이고, 영남과 관서지방에서는 물오리가 서로 싸우고, 대구에서는 황새가 진을 치고, 청파의 개구리가 싸우고, 죽령에서는 두꺼비가 행렬을 지어 나가고, 예안의 강물이 끊어졌다. 또한 능에 벼락이 떨어지고, 서울의 땅이 붉게 변했으며, 도성 안에 하루 스물일곱 곳이 벼락을 맞았고, 큰물이 들이닥쳐 동대문이 막혔고, 세 채의 대궐이 일시에 흔들리고,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별이 변괴를 일으켰다.”

인조는 불안했다. 최명길의 주장을 따라 청의 분위기를 탐색하기 위해 낮은 직급의 역관을 청에 보냈다. 청 태종은 그를 통해 통첩을 보냈다. “11월25일(음력)까지 왕자와 대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하지 않으면 군사를 동원해 조선을 칠 것이다.” “지금 척화를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유학자들인데 그들의 붓끝이 어찌 나의 군사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청 태종은 통첩대로 병자년 11월 말 환구단에 조선과의 전쟁을 고하고, 군사를 일으켜 정벌에 나섰다. 청군이 압록강을 넘은 것은 12월 9일(양력 1637년 1월 4일)이었다. 마부대가 이끄는 선발대는 불과 나흘 만에 한양 초입인 홍제원까지 밀고 내려왔다. 인조와 조선 조정은 12월 14일(양력 1637년 1월 9일) 강화도로 도주하려다 길이 차단된 것을 알고는 허겁지겁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산성에 갇혀 있으면서도 ‘숭명’ 척화론자들은 청군이 아니라 최명길과 싸웠다.
산성 5일째, 심광길과 인조 사이에 오간 대화이다. “한 사람의 목을 베어 화의를 끊고, 백성에게 사과를 해야 합니다.”(심광길) “그게 누구냐.”(인조) “최명길입니다.”(심광길)
산성 21일째 인조실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도 김상헌은 화친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김상헌을 따르는 사간 이명웅, 교리 윤집, 정언 김중일, 수찬 이상형 등은 상소했다. “최명길의 죄를 다스려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소서.” 윤집은 “최명길이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는 머리털을 뽑아 세어도 속죄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남한산성은 피난처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독안에 든 쥐 신세였다. 하루하루 병사들은 추위와 기아로 쓰러졌다. 산성 11일째 겨울비가 내리고 밤에 기온이 뚝 떨어졌고 병사들이 얼어죽었다. 왕은 대전 뜰에 나와 그 헤픈 눈물을 뿌리며 하늘에 호소했다. “저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죄를 주려거든 병사들이 아니라 저에게 주십시오.” 산성 17일째였다. 왕의 수라상에 반찬으로 달랑 닭다리 하나 올라왔다. 인조는 탄식했다. “처음 산성에 들어왔을 때 새벽닭 우는 소리가 제법 들렸는데, 요즘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이게 마지막인가.”

정약용은 훗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먹을 것도 땔감도 떨어져 곤궁하기 이를 데 없다. 남은 소와 말도 굶주림이 심해 서로 꼬리를 물어뜯어 먹을 지경이었다.” “장수와 군사들이 추위에 얼어붙어 얼굴빛이 푸르고 검어 사람 같지가 않았다. 살갗이 찢어지고 동상에 걸린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 그 참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시 식량 배급량은 병졸 하루 3홉이었다. 소주 반 병, 맥주컵 한 잔 정도의 양이다. 입으로만 결사항전을 외치던 문관들에게는 5홉이 배급됐다.

서울 송파구에 있는 ‘삼전도비’, 정식 명칙은 대청황제공덕비.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사실을 기록한 비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비신의 앞뒷면에 몽골, 만주, 한자 이렇게 3개국 문자가 새겨져 있다.[출처: 서울신문]

35일째 사실상 항복을 결정하고도 청이 요구한 척화 주동자 압송 문제로 조정은 뭉그적거렸다. 40일째 참다못한 병사들이 무장한 채 행궁 앞에서 시위했다. 그래도 미적거리자 43일째 대전 앞까지 들이닥쳤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인조와 신하들은 등골이 서늘했다. 서둘러 ‘주동자’를 자수 받았다. 우두머리 김상헌 등은 빠지고 소장파인 윤집, 오달제가 선택됐다. 47일째(양력 1637년 2월 24일) 인조는 왕의 곤룡포를 벗고 신하의 남색 옷으로 갈아입은 채 죄인이 드나드는 서문을 빠져나와 삼전도의 수항단으로 향했다.

인조는 훗날 김상헌과 척화파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훔치기란 쉽다.”

그러나 오늘의 사서는 그들의 충절을 한결같이 칭송한다. 불과 40여 년 전 임진왜란의 참화도 망각하고, 9년 전 정묘호란의 치욕도 잊고, 대책은 없이 대륙의 패자에 대한 정벌을 부르짖다가 사직의 유린을 자초했다. 참극은 예견됐고, 그 피해는 온전히 백성에게 돌아갔다. 호란 이후 그들은 ‘숭명'(존주대의)과 ‘복수설치’를 이념화했다. 자신의 무능과 죄과를 숨기고 권력을 유지하며, 착취구조를 온존하려는 것이었다. 승객을 죽인 만취운전자의 만용과 무지를 용기요 절의라 칭송할 순 없는 일이다.

통상 2월이면 한반도는 긴장 속으로 빠진다. 2월 말부터 한미연합훈련이 시작하면서, 북한은 미사일과 핵 실험으로 맞섰다. 북미와 남북은 경쟁적으로 비난하며 군사적 대치를 강화했다. 이런 악순환은 불과 2년 전에야 잠복했다.

통일연구원은 그런 한반도 리스크가 올해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북핵 문제를 순전히 선거용으로 이용한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앞으로 대선 판세에 따라 어떤 돌출 카드를 내밀지 알 수 없다. 국내에서도 4월 총선을 앞두고 다시 ‘척화’의 목소리가 기승을 부린다.

심지어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기대, ‘친북’의 외연을 ‘친중’으로 확대하고 여론을 ‘친미인가 친중인가’의 택일로 끌고 가려 한다. 오로지 선거 승리를 위해 곤경에 처한 이웃을 조롱하고 배척하는 부도덕과 파렴치가 놀랍다. 저 참혹했던 ‘겨울 전쟁’의 기억까지 지우는 만용은 더 놀랍다.

경쟁하는 초강대국 틈에 끼어있는 우리에게 선택지란 없다. ‘화친’뿐이다. ‘척화’란 없다. 미국과도 중국과도, 북한과도 러시아와도 화친해야 한다.

 

곽병찬
전 한겨레신문 대기자. 이 시대 인문의 승묵(繩墨), '향원익청(香遠益淸)'을 쓰다.

1개의 댓글

  1. 글을 읽고 나서 찾아보았습니다.

    조정에서 청에 항복하자는 결정을 내린 이후에도 주전파와 주화파 간의 논쟁은 계속되었다. 다음은 논쟁의 한 장면을 재구성해 본 것이다.
    이조판서 최명길, 국서(항복 문서)를 쓰다. “조선 국왕은 삼가 청나라 황제께 말씀을 올리나이다. 소방(小邦, 작은 나라)이 대국에 거역하여 스스로 전란의 화를 촉했고 고립된 성에 몸을 두게 되어 위급함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 소방은 이미 죄를 알고 있사오니 이 생령들을 구휼하시어 소방으로 하여금 다시 스스로 새로움을 도모하게 하시면 오늘부터 마음을 깨끗이 하여 쫓아 섬기겠나이다.”
    주전파 김상헌, 국서를 찢다. “대감은 어찌 항복하는 글을 쓰오. 대감의 조상은 명성이 있던 분이었소. 창피하지도 않단 말이오.”
    예조판서 최명길, 국서를 다시 붙이다. “찢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고, 붙이는 사람도 없어서는 안 되오. 대감의 절개로서는 마땅히 찢을 만하오. 대감은 과연 의로운 선비요. 그러나 종묘사직을 보존하기 위해서 나는 다시 붙여야 하겠소.”
    병조판서 이성구, 김상헌을 꾸짖다. “대감은 예부터 척화신(=화친을 배척하는 신하)이었소. 대감 같은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소. 아마 대감의 명성은 훗날까지 빛나겠지만 종묘사직은 결딴나는 것이오. 왜 직접 나가서 싸우지 못하여 성안에서만 척화하자 떠드오.”
    김상헌, 통곡하다. “나를 묶어 적진으로 보내주오.”

    그리고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보인다.
    “전하, 뜻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길 터인데, 이 항복 문서가 과연 살자는 문서이옵니까?”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상헌이 다시 임금을 다그쳤다. “전하, 이제 칸을 황극으로 칭하였으니 문서가 적에게 가면 전하는 칸의 신하가 되고, 신들은 칸의 말잡이가 되며, 백성들은 칸의 종이 되는 것이옵니까?”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상헌이 다시 말했다. “적이 비록 성을 에워쌌다 하나 아직도 고을마다 백성들이 살고 있고 또 의지할 만한 성벽이 있으며, 전하의 군병들이 죽기로 성첩(城堞, 성벽 위에 낮게 쌓아 총알과 화살을 막는 담)을 지키고 있으니 어찌 회복할 길이 없겠습니까. 전하, 명길을 멀리 내치시고 근본에 기대어 살 길을 열어 나가소서.”
    최명길이 말했다. “상헌은 제 자신에게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적들이 성벽을 넘어 들어오면 세상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온데, 상헌이 말하는 근본은 태평한 세월의 것이옵니다. 세상이 모두 불타고 무너진 풀밭에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날 터인데, 그 꽃은 반드시 상헌의 넋일 것이옵니다. 상헌은 과연 백이(伯夷)이오나, 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하옵니다. 전하의 성단(聖斷, 임금의 결단)으로 신의 문서를 칸에게 보내 주소서.”
    김상헌이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소리쳤다. “전하, 명길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최명길이 김상헌의 말을 막았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바닥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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