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미래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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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책장 어디엔가 먼지를 덮어쓰고 있을 책을 찾기 시작했다. 노 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책은 모두 구입했으니 분명 어디엔가 있을 거라는 확신은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을 찾은 끝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책장 구석 논문참고서적들 틈에 풀죽은 아이마냥 다소곳이 놓여 있는 책을 찾아냈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겠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에 책을 펴드니 제일 첫 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기념메모가 적혀있다. “2009년 12월 19일 이제 역사가 된 사람, 노 무현 그가 그립다. -진주에서- ” 그 해에 이 책을 샀지만 당연히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후 몇 해 동안 노 무현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뾰족한 바늘이 되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감정을 아프게 찔러 대서 되도록 눈길이 가지 않게 의식적으로 피해 왔기 때문이다.

하여 과제를 핑계 삼아 이제야 그의 유작을 펴 든다. ‘진보의 미래’를 걱정했으나 재임기간 그는 진보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진보이건 보수이건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퇴임한 대통령은 당신이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한 미래를 그리며 ‘노 무현 없는 노 무현 시대’를 세부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그래서 부 제목이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인 걸까. 하지만 야심차게 시작한 의제는 거대한 풍랑을 만나 자초하는 배처럼 곳곳이 구멍이 뚫린 채 앙상하게 뼈대만 남아있다. 연구해야할 것, 논의해야할 것, 토론 해볼 것, 자료 찾아볼 것 등등 미처 다 채우지 못한 책의 주제는 결국 대통령의 말속에서 이삭줍기 하듯 하나하나 실체를 찾아내야 한다.

대통령은 진보와 보수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세계적인 흐름이 진보냐 보수냐 두 개의 명확한 경계로 가지 않으니 당신이 이쪽저쪽에서 잠시 방황했던 것쯤은 긴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어쩔 수 없던 일로 기록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보수주의 시대의 진보주의’로 시작하였지만 결국은 신자유주의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흐름이 있었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이 진보. 보수 논쟁과 100프로 맞느냐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진보정권인지에 대한 논쟁이 촉발한 것은 한국사회의 지난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비상 대책, 해방이후 겨우 두 번의 정권 창출로 여론을 주도하는 세력의 조직적 한계 그리고 분파와 분열, 갈등이 결정적인 진보진영의 한계였다. (물론 대통령이 말씀하신 ‘분열’은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을 의미하고 있지만 필자로선 노무현 정권 후반기에 잔인하게 물어뜯던 소위 ‘진보 진영’의 잘나가던 이빨들의 분열책동을 잊을 수 가 없다.) 대통령은 결국 시민의 생각만큼 정치가 흘러가기 때문에 자기의 이해관계를 정확하게 판단해 나가는 지식적 탐색, 탐구 과정을 통해 시민들의 생각이 진보해나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보수는 철학이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암울하다. 서구와는 달리 한국의 보수는 극우와 가까운 천박성을 갖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통령의 대답은 조금 톤 다운되어 있다.

... 그래서 보수의 철학이 뭐냐? 보수의 철학이 뭐요? 없어요. 보수라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이런저런 글도 읽고 책도 읽고 했는데, 보수는 가치 이론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왜 보수냐 했을 때 철학적인 기초가 없습니다. 그 보수, 보수의 가치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놓은 걸 본 일이 없어요. 그냥 이대로 가자, 이대로 가자인데우리가 사회가 좀 괜찮은 사회라면 뭐 이대로 가도 되지. 그런데 아무리 괜찮은 사회라도 변화가 없으면 썩는다는 것 아닙니까? 무너진다는 것인데 그래도 천천히 가지, 천천히 가 이러는 데, 우리 한국처럼 이렇게 문제가 많은 사회, 풀어야할 문제가 산적한 사회, 청산해야 할 잔재들이 이렇게 많은 사회를 두고 이대로 가자니까….

사실은 “한국의 자칭 보수 세력들은 조선시대로부터 꾸준히 이어져오는 당파 싸움의 잔재들이다. 이들은 논리도 철학도 없이 상대방이 하는 모든 것에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본다. 기득권 보호 하에 똘똘 뭉친 세력이거나 그 세력에 빌붙어 기생하는 무뇌아 집단이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진보는 기본적으로 ‘변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견고한 사회 기득권의 카르텔은 근본적으로 ‘변화’를 싫어하며 ‘유지’를 추구한다. 대표적인 집단이 한국의 관료주의라고 할 수 있다. 관료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충실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기준으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직 이기주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무조건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날씨와 환경의 변화가 계절을 알려주듯 주기적으로 지금이 진보정권인지 보수정권인지 시민들의 관심거리가 무엇인지를 지적해 주며 시대의 기온으로 신호를 주어 함께 가야할 대상임을 강조한다.

경제와 관련하여 진보는 어떤 청사진을 그려야할까. 기본적으로 보수의 경제, 소위 시장원리주의의 핵심은 부익부 빈익빈이 가속화되는 것이고 주기적으로 시장이 붕괴된다는 두 가지 원리로 집약된다. 그렇게 시장이 붕괴되면 잘나가는 사람들이 죽진 않고 바닥에 있는 사람들만 거리로 내몰려 실업자가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하지만 보수에서는 답을 내 놓지 못하고 잠시 정권을 넘겼다가 몇 년 되지 않아 다시 경제 경제… 거리며 정권을 빼앗아가곤 했다. 무슨 새대가리도 아니고 경제가 하루아침에 좋아지고 나빠진다는 주장을 믿어버리는 국민이 문제겠지만 이 프레임 싸움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진보 진영도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대통령은 경제의 본질이 분배문제에 있으며 복지와 분배를 어떻게 하느냐가 두 진영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영역이라고 지적한다. 진보에서는 국가가 분배에 직접 개입하여 소득격차를 줄이는 문제에 집중하고 보수는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작은 정부를 통해 시장에서 분배가 이루지는 것을 선호한다. 물론 시장 차원의 분배에서 국가가 개입하는 것도 있고 시장 분배 이후에 국가가 다시 개입하는 것도 있지만 쉽사리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보수가 만들어놓은 경제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 꼼짝달싹하지 못한 채 정권을 넘겨주어야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고자한 진보의 미래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가 보이고자한 국가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끝을 보지 못했다. 가슴 두근거리며 시작했을 찬란한 꿈들은 2009년 5월 23일 그 순간에 그와 함께 영원히 봉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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