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불제 민주주의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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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는 노무현 이후 격랑의 시간을 지나왔다. 특히 노무현 시대를 지나면서 소화하지 못할 만큼 풍부한 민주적 권리와 개인적 자유로 인해 기름 진 배를 두드리며 느긋하게 다음 시대를 맞이했다. 너무 방심했다. 어느 것 하나 공짜로 주어지는 법은 없었다. 모든 진보적 사상과 문화 정치적 환경이 ‘역행’하는 이명박 시대를 맞이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누렸던 민주주의가 누군가의 희생에 대해 ‘후불제’로 치러지는 중이었고 방심하는 자에게 청구권이 주어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러한 맥락에서 쓰여진 작가의 반성문이다. 책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행복’에 대한 언급은 ‘반성’은 하되 ‘투사’가 되어 싸우지 않는 모두를 위한 ‘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를 두근거리게 만든 헌법10조의 행복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당신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기 위해 존재합니다. 당신이 재벌 회장의 운 좋은 상속자로 태어났든, 아니면 일하고 또 일해도 끝없이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딸 아들로 세상에 나왔든, 국가는 행복을 추구할 당신의 권리를 인정합니다. 당신이 빼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이든, 아니면 남들만큼의 평범한 재능만 가진 사람이든 상관없이, 국가는 당신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합니다. 당신이 여자든 남자든, 당신이 키가 크든 키가 작든, 당신이 힘이 세든 힘이 약하든, 국가는 당신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존중합니다. 당신은 그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합니다. 당신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당신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행복추구권에 대한 주장이 결코 ‘헌법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헌법에서 보장하는 그 권리를 행사하려한다. 그는 ‘행복’하게 느끼는 일을 하기 위해 정치를 떠나 작가의 길로 복귀했으며 작가로서 행복을 누리는 스스로 귀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행복’은 여러 가지 자양분을 필요로 한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자유가 억압당하는 감옥에서, 당장 내일 먹을거리를 걱정해야하는 굶주림상황에서 ‘행복’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성찰은 자연스럽게 ‘헌법’의 전문으로 향한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뒷받침이 되어야한다는 성찰을 통해 헌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첫 번째로 ‘자유’를 보자. 그 누구도 한번 자유를 맛보고 권리의 소중함을 체험한 국민들을 다시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맹목적 추종의 본능 아래 복속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야만의 시대(이명박시대)에 온갖 시련을 통해 한국 사회는 권력자의 선의에 의지하지 않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세우고 ‘맛있는’ 자유를 수호하기위해 기꺼이 개인의 행복추구를 위한 비용을 지불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가 없어도 어느 정도의 ‘행복’은 가능하다. 강한 지도자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면 무엇이 옳은지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삶이 간단해 진다. 즉,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지만 맹목적인 추종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왕왕 국민들은 국가 지도자가 국민의 권리를 박탈하고 국가의 주권을 사유화하는 것을 보면서도 압도적 지지를 보낸다. 유신헌법이 그렇게 탄생했다. 유신헌법은 헌법 제1조 제1항을 교묘하게 변화시켜 국민은 아주 가끔씩 주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국민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았고 이 대의원들이 서울에 모여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은 긴급조치 위반이었다. 긴급조치를 비판하는 것도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며 긴급조치 위반건에 대해서 허가없이 보도하는 것도 모두 긴급조치 위반이었다. ‘이러한 완벽하고 아름다운 독재의 폐쇄회로’도 종신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무너졌지만 아직도 그 독재의 망령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자유가 적당히 침해당해도 좋으니 스스로 판단하고 결과를 책임져야하는 ‘완전한 독립체로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많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이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제발전에 반드시 독재가 필요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자유 없이는 진정한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반드시 깨닫기를 바란다.

이 ‘아름다운 독재의 폐쇄회로’는 분명 전문가의 솜씨로 디자인되었으며, 그 전문가는 당연히 ‘명석한’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작가는 ‘명석’ 하지만 ‘맑지 않는’ 사람들을 ‘양복 입은 침팬지’라고 명명하고 있다. 지식은 있으나 지성과 양식은 없고 두뇌는 명석하나 심성은 혼탁한 이 ‘양복 입은 침팬지’들이 사라져야 대한민국은 비로소 온전한 민주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다시 헌법 제1조로 가보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작가는 헌법 제1조는 ‘존재(sein)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당위(sollen)’를 선언한 것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즉,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명박시대에 작가는 뼈저리게 깨닫는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선언한 ‘당위’는 아직 ‘존재로’로 전환되지 못했다는 점을. 그리하여 온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절대적인 충성을 서약하고 실현하기위해 다짐하는데 그 이유로 자신과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유시민은 자신이 어떤 글에서 지적하였듯이 유려한 글 솜씨나 세련된 수사법으로 글을 쓰는 작가는 아니다. 그래서 그는 시인이 될 수 없고 소설가도 될 수 없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최근 tv에서 보았듯이 그는 매우 논리적인 사람이다. 어떤 주장도 논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글은 없다. 그는 자신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충분히 주장하기 위해 ‘지구’라는 아주 아주 작은 행성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짧은 인생의 허무감을 들고 온다. 몇 억만년, 몇 천만년의 시간 속에서 겨우 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이 찰나의 시간동안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뭐 그렇게 대수냐고 말한다. 일견 이것이 어떻게 자신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가 될 수 있냐고 아니꼬운 감정이 스멀거릴 수도 있다. 하지만 논리적인 글쓰기를 표방하던 작가 유시민의 마음속에 이런 문학적인 감수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니 반갑기만 하다.

나 또한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헌법 10조를 읊조리겠다.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를 더 사랑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읽고 생각하겠다.

더불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능동적인 ‘주장’도 할 것이지만 그 이면에 심사가 꼬인 미움의 감정은 털어내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행복’하기 위한 찰나의 시간에 사랑만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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