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의 실체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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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면서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이름난 소설이나 희곡을 영화로 만들어 성공한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해마다 적잖은 서사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세계영화의 30% 정도가 소설원작에 기반하며, 성공한 소설의 80%가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원작은 같은 이름의 논픽션 베스트셀러에 기초한다. 남산은 1960년대 이후 독재 권력의 산실이었던 중앙정보부가 위치한 장소를 가리키며, 부장은 그곳의 최고 권력자를 뜻한다. 따라서 원작은 김재규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인물들을 포괄한다. 하지만 영화는 10.26과 김재규(영화 속 김규평)를 중심에 두고 펼쳐진다.

<내부자들>(2015)로 유명세를 탄 우민호 감독은 영화 첫머리에서 허구의 개입을 통지한다. 각본을 쓴 감독의 상상력이 곳곳에 동원됐다는 얘기다. 더욱이 영화가 주목하는 시간은 10.26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40일이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18년 철권통치를 끝장내는 극적인 40일 동안의 인간군상과 사건기록!

40일의 사건과 인물

<남산의 부장들>은 40일을 다루기 때문에 1979년 9월 15일에 시작하여 10월 26일 끝나도록 예정돼 있다. 제한된 시간이지만 공간은 상당히 확장돼 있다. 청와대, 남산, 궁정동 안가, 미국 대사관, 워싱턴, 파리, 부산과 마산 등등. 한국과 미국을 넘어 프랑스까지 공간이 확장된 것은 알려진 것처럼 김형욱 (영화 속 박용각) 전 중정부장 때문이다.

우리는 1979년 가을의 40일과 연루된 인물들과 사건을 개략적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는 다만 최고 권력자 박정희와 결부된 대표적인 인간군상의 면면만 지적하자. 김재규 중정부장, 차지철 (영화 속 곽상천)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전두환 보안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 등이 그들이다.

그들이 집중하는 지점은 단 하나. 박정희가 통치한 18년에 담긴 의미와 종착점이다. 종신 최고권력, 총통을 꿈꾼 인간 박정희와 “각하가 곧 국가”라는 등식을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는 차지철. 주한미군 철수까지 거론하며 김재규를 압박하는 글라이스틴. 미 하원 증언대에 선 김형욱을 무마하면서 이른바 ‘혁명’의 본질을 고뇌하는 김재규.

김재규와 이병헌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배역을 맡은 이병헌에게는 <남한산성>(2017)의 최명길 냄새가 난다. 주전파 김상헌의 대쪽 같은 성품과 기개가 아니라, 국가안위를 총체적으로 사유하는 주화파 최명길. 개인적인 소신이나 절개보다 나라와 백성 그리고 임금의 권력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최명길. 그런 인간의 내면을 그려낸 이병헌.

<남산의 부장들>에서 감독은 김재규의 내면세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심리 스릴러나 사이코드라마가 아님에도 감독은 김 부장의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챙긴다. 이른바 ‘혁명 주체세력’의 동질성과 혁명목표의 실현에 대한 대통령과 중정부장의 시각차를 잡아내지 못하면 영화는 평작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설득력 있는 장면들은 김형욱 암살과 관련하여 이병헌이 보여주는 복잡다단한 표정연기에서 찾을 수 있다. 죽어버린 친구이자 지난날 혁명동지 ‘김형욱’을 위해 젯술을 높이 드는 김재규. 이것은 김재규의 인간됨됨이를 여실히 포착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도 김형욱도 차지철도 박정희에게 똑같은 지시를 받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임자가 알아서 해.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김재규와 차지철

박정희는 2인자를 결코 곁에 두지 않는다는 말이 김형욱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1960년 5월 16일 동트기도 전에 장갑차를 앞세우고 한강다리를 건넜던 쿠데타 거사동지 김형욱과 김재규. 목숨을 걸고 총탄이 날아오는 과거를 함께 했지만, 그들은 이제 박정희 권력을 매개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부자지간도 이간질한다는 권력!

그와 아울러 영화는 우리를 박정희를 정점에 두고 김재규와 차지철이 벌이는 노골적인 권력쟁투를 목도한다. 그것의 정점은 <김형욱 회고록> 출간을 둘러싼 박정희의 크나큰 분노와 양자의 충성경쟁이다. 2인자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김재규와 그의 실수를 빌미삼아 2인자가 되려는 차지철의 권모술수가 치열하게 펼쳐진다.

문제는 그들 사이의 차이에 있다. 인간됨이나 역사의식, 국가관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은 물과 기름 같은 관계다. 오직 1인자 독재자에게 충성함으로써 개인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차지철. 반면에 김재규는 야당과 대미관계, 부마항쟁에 대한 유연한 자세를 견지한다.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깊이에서 차지철과 천양지차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버러지 같은 놈’이라든가, ‘대국적인 견지에서 국가경영’ 운운하는 김재규의 발언에는 충심이 내재돼 있다. 18년 독재의 마지막을 박정희와 함께 하려는 그의 흉중에는 최고 권력을 향한 강력한 권력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필시 그것은 목숨을 걸고 실행한 쿠데타의 우두머리에 대한 인간적인 정리 때문일 것이다.

10.26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각

우리는 아직도 김재규의 삶과 철학, 그가 결행한 10.26 거사의 근본동인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영화에서도 다루지 않는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일방적인 평가와 판단이 김재규의 자기변호와 엇갈릴 뿐, 사건의 전면적인 진실은 가려져 있다. 41년 전에 발생한 중차대한 현대사의 한 페이지가 여전히 어둠속에 은폐돼 있는 셈이다.

영화는 그럼에도 몇 가지 시사점을 던지면서 우리의 판단을 유도한다. 청와대 비밀금고를 열고 금괴와 지폐를 챙기는 보안사령관. 대통령 자리에 오르려고 박정희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는 김재규. 다만 우리는 명징하게 알고 있다. 10.26 이후 46일 만에 보안사령관을 필두로 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독재가 연장되었다는 사실을.

그래서다. 아직도 실체적 진실은 가려져 있지만,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쏘지 않았다면 한국 현대사의 향방은 어찌 됐을까?! 부마항쟁 시위대에게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면서 막장의 권력의지를 표명하는 박정희. 그의 든든한 우군으로 기능하는 차지철과 전두환. 무능과 보신으로 일관하는 정승화와 김계원. 과연 어찌 됐을까?

글을 마치면서

2시간 가까운 상영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상영 전에는 소란스럽던 객석에서 한 번도 소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의 몰입도가 상당하다는 방증이다. 20대 관객이 9할 이상 차지하는 객석의 현대사 지식은 일천할 듯하다. 그럼에도 영화를 향한 그들의 집중도는 지식과 무관하게 유쾌하게 다가온다. 어쨌든 문제제기는 제대로 한 것이므로.

2005년 임상수의 <그때 그 사람들>은 10.26을 향한 첫 번째 제비였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흥행도 역사도 문제의식도 참패했던 영화로 기억한다. 그런 점에서 <남산의 부장들>은 젊은 세대에게 무엇인가 생각하도록 인도하는 영화다. 한반도 문제가 비단 청와대나 중앙정보부 같은 특정집단이 전유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하는 것 같다.

요즘도 우리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대미관계, 대북관계, 대일관계 등으로 분망하다. 외교의 밑바닥에는 민주주의를 향한 민초들의 열망과 의지가 항시 내재해 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던 김재규와 그것과 정면으로 승부하려던 박정희와 차지철 그리고 전두환 일당의 역사의식이 어떻게 다른지 <남산의 부장들>은 긴장된 얼굴로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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