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작]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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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제도를 폐지하라
_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가명으로 출판된 베스트셀러

내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률, 나와 부유한 자의 사이에 그토록 큰 간격을 설정하는 이 법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부유한 자는 내가 한 푼만 구걸해도 거절하면서 나더러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윽박지른다. 누가 이따위 법률을 만들었는가? 빈민의 누추한 오두막에 발을 디딘 적도 없고, 배고픔에 우는 무고한 자식과 눈물 젖은 아내와 함께 곰팡내 나는 빵 부스러기를 먹을 필요가 없는 부유층과 권력층이 만든 것 아닌가. 다수의 생존을 위협하고 오직 소수의 나태한 압제자에게만 이로운 이 굴레를 부수어버리자. 나는 원래의 독립 상태로 돌아가겠다. 내가 슬퍼하고 후회할 날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하루 동안의 고통은 짧다.

혁명가의 법정 최후진술이 아니다. 베카리아가 《범죄와 형벌》에서 절도범이나 암살범의 범행 동기를 추론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하루 동안의 고통은 짧다’는 사형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베카리아는 사형이 사형수에게 짧은 공포와 고통을 주지만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는 크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베카리아는 사형 제도의 전면 폐지를 주장했다.

베카리아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파르마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들어갔는데, 훗날 그곳에서 받은 교육이 인간 정신의 발달을 질식시키는 광신적인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파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세 살 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 밀라노에서 국가위원회 위원과 치안판사를 역임하면서 계몽주의적인 문인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범죄와 형벌》은 베카리아가 1763년 함께 문인단체 활동을 하던 피에트로 베리( Pietro Verri)의 권유로 쓰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인 1764년에 출판한 책이다. 이 책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1765년 프랑스어 판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1800년까지 23개의 이탈리아어 판, 14개의 프랑스어판, 11개의 영어 판이 나왔다. 그 외에도 네덜란드, 스페인, 덴마크, 그리스, 러시아,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번역판을 간행했다.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책이지만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판될 때 베카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가명으로 발표했다. 이 책이 나올 당시 절대왕정의 말엽이었다. 베카리아가 죽기 2년 전에야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절대왕정이 무너졌다. 절대왕정은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사상 탄압을 했다. 더욱이 이탈리아는 로마 교황청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로마 교황청은 이 책이 나오자 200년 동안이나 금서로 지정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책은 형사법에 관한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권력 남용을 견제한 사람은 드물었다

베카리아는 ‘서론’에서 《범죄와 형벌》을 쓴 이유를 밝혔다.

인쇄술의 발달로 확산된 철학적 진리는 군주와 그 백성 그리고 여러 국가 사이의 참된 관계를 사람들에게 인식시켜주었다. 상업이 활기를 띠면서 여러 나라 사이에는 이전의 전쟁보다 훨씬 인도적이고 이성적인 전쟁, 즉 근면성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런 훌륭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 시대의 창조적 계몽정신 때문이다. 그러나 형벌의 잔혹성과 형사 절차의 불규칙성을 연구하고 그것들과 맞서 싸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 잔혹하고 무지한 자와 나태한 부자들에 의해 희생된 약자의 신음 소리, 증거도 없이 혹은 가상적인 범죄를 구실로 잔혹하게 가해지는 고통, 불확실한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잔인한 고문, 한층 악화된 감옥의 더러움과 공포. 이 모든 사항에 대해 법률가들은 주목했어야 했다.

베카리아는 계몽주의 시대의 성과와 부족한 점을 요약하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썼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인간 이성에 대한 각성, 주권재민 의식의 발전, 중세 시대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이 널리 선전되었다. 인쇄술의 발달로 수많은 책자, 팸플릿 등이 발간되면서 계몽사상은 급격히 확산되었다. 베카리아는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다. 《범죄와 형벌》 ‘서론’에서 장 자크 루소를 ‘진리의 첫 번째 씨앗을 뿌린 용기 있는 철학자’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베카리아가 볼 때 형벌에 대해 연구하고 싸운 계몽사상가가 없었다.

사실 절대왕정 시대에 자의적 권력 남용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을 당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파리 시민들이 가장 먼저 습격한 곳이 바스티유 감옥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끌려가 고통당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바스티유 감옥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절대왕정의 권력 남용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비판했지만 베카리아 이전에 형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상가는 없었다.

 

형벌의 목적은 범죄 예방

베카리아는 먼저 형벌과 형벌권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밝힌다. 베카리아는 형벌의 기원을 사회계약에서 찾았다. 법은 인간들이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조건이다. 원시 상태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의 자유를 보전하기 위해 그 자유의 일부를 할애하여 법을 만듦으로써 나머지 몫의 자유를 평온하고 안전하게 누리고자 했다. 그런데 인간들 중에는 법을 어기고 원래의 전쟁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가 있다. 이런 자들을 제어하기 위해 형벌이 만들어졌다. 형벌은 개인적 자유의 일부를 할애한 것이다. 그러므로 형벌을 집행하는 형벌권은 최소한의 권한이어야 한다. 그 한도를 넘어서는 형벌권은 권력 남용이다. 베카리아는 권한 남용에 대해 “법적인 권리가 결코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베카리아는 형벌과 형벌권의 기원을 밝힘으로써 절대왕정의 폭압적 권력 행사가 아무런 법적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형벌의 목적은 무엇인가? 범죄자의 응징인가? 베카리아는 형벌의 목적이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이미 범해진 범죄를 원상태로 회복하려는 것도 형벌의 목적이 아니다. 형벌의 목적은 범죄의 예방이다.

형벌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불행한 자의 비명 소리가 이미 행해진 범죄를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가? 형벌의 목적은 오직 범죄자가 시민들에게 새로운 피해를 입히는 것을 예방하고, 타인들이 유사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것일 뿐이다.

베카리아는 형벌이 반드시 범죄자에게 큰 고통을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범죄자의 신체에 고통을 덜 주는 방법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잔혹한 형벌은 박애(博愛) 정신에 비추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정의에도 어긋나고 사회계약의 본질과도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카리아는 가장 잔혹한 형벌인 사형제도에 반대한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이웃을 죽일 권한이 없듯이 어떤 국가도 개인을 죽일 권리를 갖지 못한다. 인간이 자유의 일부를 할애하여 법과 국가를 만들 때 그 할애한 자유에는 생명의 자유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형제도는 사회계약의 본질에 어긋난다. 뿐만 아니라 사형은 범죄 예방에도 효과가 크지 않다. 베카리아는 역사적 사례를 들어 사형이 범죄 예방에 효과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베카리아는 범죄를 예방하려면 형벌의 강도보다는 지속성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형당하는 장면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지만 그 효과는 일시적이다. 사형은 하나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사형 장면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린다. 베카리아는 사형제도에 대한 대안으로 종신 노역형을 제시했다. 종신 노역형은 사람들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평생 저렇게 비참하게 사는구나!’라는 관념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음은 형벌에 관한 베카리아의 유명한 명제다.

형벌이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범죄자가 그 형벌로 받는 손실이 범죄로부터 얻은 이득을 넘어서는 정도면 족하다. 이득을 넘어서는 손실을 계산할 때는 처벌의 확실성과 범죄로 인한 재화의 손실 부분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 그 이상의 처벌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폭압적인 처벌이 된다. 인간의 행동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고통에 의해 규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고통이 반복된다는 사실에 의해 규제된다.

 

홍승기
인민노련 홍보부를 담당하면서 6월 항쟁을 현장에서 이끈 숨은 일꾼. 술만 사 준다면 지옥에도 함께 들어갈 천진무구한 청년이다.

1개의 댓글

  1. 글 잘 읽었습니다. 출처는 불분명한데 이전에 봤던 영상이 떠오릅니다. 다음은 메모의 일부입니다.

    <1761년, 전 유럽을 뒤흔든 칼라스(Jean Cals) 사건. 장 칼라스 가족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장남을 제외하고는 모두 프로테스탄트였다. 그러던 어느날 가톨릭 신자인 장남 마르크앙투안이 목을 매 자살한 채로 발견된다. 그런데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던 시민들은 가족들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판사는 가족들을 모두 체포해 가혹한 고문을 가하는 일이 벌어진다. 칼라스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한다. 그리고는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끝까지 범행을 부인한 칼라스에게는 결국 사형이 선고되고 거열형을 거쳐 교수대에서 처형된다. 사건은 일단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이 사건에서 잔인한 고문과 종교적 광기의 흔적을 발견하다. 볼테르는 끈질기게 사건에 매달렸고 장남은 자살했다는 최종 판결을 이끌어낸다. 사건 발생 3년이 지나서야 칼라스는 아들을 죽인 아버지라는 오명을 벗고 무죄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의 젊은 형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는 이 사건을 보며 질문했다. “오늘날 유럽에서 법으로 이름으로 통용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대답은 ‘야만’이었다. 그리고는 “법이란 무엇인가”에서 더 나아가 “법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물었다. 이 질문을 거치며 베카리아는 죄형법정주의를, 무죄 추정의 원칙을 주장한다. 또한 범죄를 예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형벌의 ‘잔혹성’에 있지 않고 ‘정확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고문 폐지와 사형 폐지로 이어진다. “고문은 진실의 수치스러운 발견 방법이며 야만적인 시대의 법적 잔존물이다.” “사형은 폭정의 가면이자 개인에 대한 국가의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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